[스페셜1]
제8회 씨네21 영화평론상 [1]
2003-05-16
글 : 권은주
최우수상 정승훈, 우수상 김종연. 90년대 문화지형 속에서 문제 풀어낸 시각 돋보여

새로운 눈으로 보고 힘있는 펜으로 쓰다

총 80여편의 응모작 가운데 시선의 독창성과 문체의 힘이라는 기준으로 6편을 골라 최종심에 올렸다. 이선주의 ‘홍상수와 작가주의, 한국영화의 정체성’은 홍상수 감독을 둘러싼 국내외 비평담론의 맥락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부지런함과 솜씨가 눈에 띄었으나, “바깥을 경유해서 내부를 들여다본다”는 문제 설정에 대한 스스로의 답변은 무엇인가에 대한 아쉬움을 남겼다. 이남석의 ‘우유부단함의 미학: 워쇼스키 형제’는 소재를 다각도로 정리해나가는 저널리즘적 발랄함의 와중에 비평가로서의 집요한 시선이 흐트러진 경우였다고 보았다.

황승현의 작품론 ‘위장된 판타지의 주인, 현수’는 페미니즘과 다른 각도에서 <나쁜 남자>를 비판적으로 해명하는 성과를 보였으나, 작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 분석을 했더라면 좀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반면 ‘상투성이 거둔 새로운 승리’는 작품들에 대한 충실한 내재적 비평을 통해 귀납적인 작가론을 도출했지만, 에세이의 구성력과 문체가 뒷받침되었더라면 모범적인 사례가 되었을 것이다. 거부기라는 아이디로 제출된 ‘경계에 대한 사유-이미지’는 김기덕 감독의 <해안선>을 정치적 비평이 아닌 영화언어를 통해 해명했고,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시선이라는 단일한 테마로 이창동 감독의 작품세계를 해명하는 저력이 돋보였지만 어느 것도 영화사적 맥락을 고려하고 있지 않아 허전한 느낌을 주었다.

최우수상으로 선정한 정승훈의 ‘한국영화의 ‘집짓기’와 ‘길가기’’는 이창동과 홍상수의 작품세계를 ‘집’과 ‘길’이라는 서로 다른 키워드로 비교할 뿐만 아니라 1990년대 한국의 문화지형 안에서 문제를 풀어간 점이 설득력과 흥미를 높였다. 작품론의 안정감과 짜임새도 호감을 주었다. 김종연의 ‘2000년대 한국 복고영화의 특징과 그 정치성’은 주제의 시의성과 통찰력, 오염되지 않은 문체가 돋보였지만 글을 풀어가는 기술적인 숙련성 문제로 우수상으로 선정했다.

저널리즘의 안경을 통해 가리고 뽑긴 했으나, 응모작들을 통해 <씨네21>이 도리어 배운 바가 크다. 신선한 시각과 열정으로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도니 다코> 정승훈 작품비평 전문

평화로운 세상에 침을 뱉다

살다보면 한번쯤 지금과 다른 길을 택했다면 싶을 때가 있다. 타임머신 타고 선택의 순간으로 되돌아가던 코미디 프로처럼, <도니 다코>도 두 시간대의 교차로로 회귀하는 영화이다. 몽유병자 도니는 어느 날 가수면 상태로 집 밖으로 나오지만, 그 사소한 우연의 나비효과는 애인의 죽음으로 증폭된다. 그래서 시간이 되감겨 그날로 돌아갔을 때, 그는 침대에 누워 예정된 파국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가 살면 애인이 죽고 그가 죽으면 애인은 산다. 복잡한 내러티브와 미해결의 난점들을 생략하고 최종 인과론으로 환원하자면 <도니 다코>는 세계를 구원하는 대신 애인을 살려놓는 <희생>인 셈이다.

하지만 결과를 알고 의지가 발휘될 정도라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중간 과정에서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죽음을 택한 데에는 세상의 근본 질서에 대한 도니의 고민이 한몫 한다. 정치적 문화적 보수가 장악한 80년대 후반의 미국은 도니에게 갑갑한 감옥일 뿐이다. 세상에 대한 총체적 테러 없이는 아무것도 바뀔 것 같지 않다. ‘파괴는 창조의 시작’이라 믿는 그는 변함없는 세상의 종말을 꿈꾼다. 여기엔 인간사의 반복에 대한 암시가 숨어 있다. 프랭크는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프랭크인데, 아버지 프랭크와 도니 아버지는 프랭크와 도니처럼 동창이다(영화 속 아버지 부시는 영화 밖의 아들 부시로 반복된다). 시간회귀 구조는 그 자체로 세상의 반복을 닮아 있는 셈이다. 영화상에선 도니가 살아 있는 한 그 회귀가 영원해 보인다. 따라서 세상의 악순환을 끝내려면 그가 죽어야 한다.

이렇게 보자면 영화의 디제시스적 세계는 도니의 주관적 관념에서 비롯된 환상과 마찬가지다. 세상은 그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다. 산에서 잠 깬 도니 시점으로 패닝하는 오프닝은 세상을 굽어보는 신의 시선을 닮아 있다. 정신과 의사와는 시간의 흐름을 정하는 신에 관해 상담한다. 두려움을 사랑으로 이끈다는 정신개조운동가는 “재수없는 안티그리스도”일 뿐이다. 예수는 기껏 중산층의 다이어트 강박이나 치료하는 건전캠페인 전도사가 아니기에. 동시상영극장의 <예수의 마지막 유혹>은 세상의 구원과 개인적 행복 사이에서 고민하는 예수의 다른 버전이 도니임을 시사한다. 101살의 ‘죽음의 할머니’는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듯 (죽음의) 편지를 기다리며 생을 반복한다. 그녀에게 편지를 띄운 도니는 그녀의 고도일지 모른다. 결국 그는 세상을 반복의 수렁에서 구하기 위해 자기를 파괴할 권리가 있는 신과 다름없다.

그러나 “죽을 땐 혼자”라는 노파의 전언처럼, 도니의 죽음을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살려낸 그레첸은 그가 누군지도 모른다. 더이상 타임 워핑은 없겠지만, 세상은 여전히 평화로우며 아마도 똑같이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자폐적 반항아의 아포리아이다. 중산층의 상투적 건전함에 침을 뱉는 도니의 과격함은 과대망상적 백일몽에 갇힌다. <아이다호>의 기면발작증처럼 <도니 다코>의 몽유병은 80∼90년대 비주류 젊음이 맴도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가리킨다. 거기엔 알을 깨고 나오려는 미국판 ‘아브락사스’의 자의식이 내장되어 있다.

관념적 급진성의 현실적 무력함에 대해 감독은 기호 유희로 맞서는 듯하다. 도니는 예수처럼 애초부터 전지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불투명한 기호들로 무의식과 환상을 더듬으며 자신을 발견해가는 포스트모던한 주체이다. 그 과정은 때로 엉뚱한 진실과 만나는데, 계시자 토끼인간이 별 친하지도 않은 프랭크이듯 종래의 필연적 의미망은 해체를 겪는다. 왜 토끼가면을 쓰냐는 물음에 프랭크는 도니(=신?)에게 왜 인간가면을 쓰냐고 반문한다. 의미를 미끄러져가는 이런 기호들은 가슴에서 뻗는 웜홀처럼 인간을 우연과 불확정의 세계로 이끈다. 인간은 “그것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They made me do it). 출처 모를 미지의 기호들은 가장 아름다운 합성어라는 ‘창고문’(cellardoor)처럼 그 자체로 미적인 유혹자이기도 하다. <도니 다코>는 그 뒤에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오히려 상상을 자극하는 창고문들로 가득하다. 감독은 세상의 구원 대신 기호들의 매혹적인 세계를 대안적으로 창조해낸다.

노 컷으로 창고문들의 표면을 훑어가는 카메라는 슬로와 퀵 스텝을 섞어가며 나른하면서 초현실적인 ‘몽유병 몽타주’를 펼친다. 효과적으로 배치된 80년대 팝컬처는 영화를 다층적 문화텍스트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스타일은 감독 세대의 감수성과 세계관에 상응하며 시청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지나칠 만큼 절묘한 리처드 켈리는 여기다 정치와 종교, 과학과 철학을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게 풀어낸다. 26살의 데뷔작으로는 놀라울 뿐인 <도니 다코>는 ‘파괴’는 아니라도 ‘새로운 창조’임은 분명해 보인다.

최우수상 정승훈 인터뷰

좋은 영화엔 심층이 있다

1974년생으로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소설보다 해설이 더 재밌었던 적이 많았다니 영락없는 비평가 체질이지만, 영화 워크숍 다니던 친구 부탁으로 5분짜리 단편영화에 주연을 맡은 적도 있다며 자랑. 이후 더이상의 섭외가 없어서 문학-철학-영화-문화연구 등을 오락가락하며 정진 중이라고.

평론상에 응모한 계기가 특별히 있는가. 영화평론가 김지훈씨와 친구인데 지난해 부천영화제에서 표도 없이 쓱 들어가기에 어떻게 된 건가 했더니 아이디 카드를 보여주면서 ‘너도 응모 한번 해봐라’고 놀렸다. (웃음) 진짜 한번 해볼까 진지하게 생각했고, 비록 이상한 계기였지만 마음을 먹고 나니 꼭 해보고 싶었다. 보름간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지훈에게 스페셜 땡스를! 실은 이렇게 해달라고 압력받았다. (웃음)

영화에 대한 감수성의 기원을 찾는다면. 중·고등학교 때 TV 주말의 영화를 많이 봤다. 아마도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문화적 일탈이었을 것이다. 89년 1월 초 MBC에서 <블레이드 러너>를 틀었는데 숀 영이 또각또각 걸어서 등장하는 장면이 너무 멋졌다. 대학 3학년 때 누벨바그 심포지엄에 참여할 때 영화 보는 게 이렇게 힘들구나 하는 걸 처음 알았다. 쥐난 머리를 식히려고 밤에는 야한 비디오 보면서 이중생활을 했다. 참 좋았다. (웃음). <미치광이 삐에로>가 가장 강렬했고, 당시에 본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영감을 주더라.

비평이란 무얼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기본적으로는 텍스트 읽기일 것이다. 시중에 도는 비평적 글들은 대개 해석적 합의가 있어서 평균치를 형성하는 것 같다. 나는 ‘심층으로 한발만 더 나아가자’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면 텍스트 바깥도 더 잘 보인다. 좋은 영화에는 심층이 있고, 밑으로 들어간다고 해서 잠기는 게 아니라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본다.

향후 활동 계획은. 영화를 문학적으로 비평하는 경향이 강해서 영화의 영화적 비평에 신경 쓰겠다. 석사 때 전공한 바르트처럼 지적 영감 가득한 감각적 글쓰기를 나만의 문체에 얹고 싶은데, 당연하게도 아직은 내공 수련 단계이다. 창작에 대한 콤플렉스를 떨칠 수 있다면 성공한 비평가 아닐까 생각 중인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정승훈 당선소감 +++ 인터넷 마감 2분35초 전에서야 메일을 보내게 됐을 때 내 손은 떨고 있었다. 아마 마지막 응모자였을 거다. 여유없이 써낸 글은 아쉬움투성이였고, 나 자신에 대한 짜증의 물결이 허탈감으로 부서져갔다. 왜 이렇게 사나 싶은. 근거없는 인과응보론에 자주 휩싸이던 터라, 나 같은 놈이 뽑힐 리 없으며 당선은 훨씬 더 착실한 자의 몫일 거라 체념했다. 그래서 분명 나보다 훨씬 더 착실했을 모든 분들께 송구스럽다.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싶다.

오랫동안 아는 척해왔지만 0순위로 사랑하진 않았던 영화 자체에 대해서도 겸손해야 할 것 같다. 글 쓰려고 영화들을 다시 보다보니 예전엔 그저 소품이던 것들이 마구 의미를 띠며 달려들곤 했다. 숏 하나하나에 담긴 중층적 정성은 내 머리를 영화의 에너지로 감전시켰고 내 가슴을 영화 만든 이들의 마음으로 감동시켰다. 내 몸은 가끔 영화 속으로 번지점프하는 아찔한 희열로 떨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러브레터나 쓰는 것뿐. 그 난삽한 필체를 알아보고 답장해준 영화에 오마주를 바친다. 글감이 된 영화들의 창조주들―홍상수 감독님, 이창동 장관님, 그리고 나보다도 어려서 조금은 기분 나쁜 <도니 다코>의 켈리와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작가론요지_이창동·홍상수 비교론

한국영화의 ‘집짓기’와 ‘길가기’

문학의 죽음이 회자된 90년대 중·후반, 영화는 과거사 중심의 리얼리즘을 동시대적 공간 탐구로 쇄신하며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을 극복해간다. 그 대표 작가인 이창동·홍상수는 서울 변두리에서 서로 다른 리얼리티를 상이하게 재현해낸다. 공간의 원형인 ‘집’과 ‘길’을 방법론적 모티브 삼아, 일상공간연구와 미학적 축조술, 작가주의의 두 흐름을 짚어보자.

이창동은 폭력 역사 상식을 앞세운 근대화의 대립항, 자연 순수 사랑을 탈시간적 ‘유토피아-집’에 거주시킨다. 집의 도시적 변이체들과 도시/자연의 경계인 길은 모두 부정적이다. 기차로 표상되는 길가기는 잃어버린 집으로의 회귀이다. 반면 홍상수에겐 길의 속성을 점층하는 공간들뿐이다. 여관-호텔, 식당-술집 같은 ‘길 위의 집’, ‘유사-집’과 정류소-역 같은 ‘유사-길’, 그외 무규정적인 길은 도시-자연, 도심-주변, 근대-전근대를 결정불능에 빠뜨린다. 이런 탈근대성은 집-길의 리좀 운동으로 종착지가 부재하는 ‘아토피아(atopia)-길’을 그려낸다.

리얼리티의 재현에서 이창동의 마스터 숏과 롱테이크 고정 숏은 미장센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읽게 한다. 유사성에 따른 기호-의미의 결합은 동일성으로 수렴되는 은유적 반복으로 상위 의미체계로의 변증법적 통합을 이룬다. 이때 은유의 ‘집짓기’를 빚는 상징적 총체적 리얼리즘이 태어난다. 반면 홍상수는 마스터 숏의 청사진 없는 롱숏으로 가시-비가시, 전지적-관찰자적 시점의 미결정성을 이끈다. 리얼리즘은 인물이 처한 심층 현실의 사회사적 투사 대신 내면이 표백된 표층 현실의 일상적 채집에 주목한다. 인간과 세계는 유기적 통합체가 못 되며, 기호는 차이를 낳는 반복 운동을 한다. 인접 대상으로 확산되는 환유적 반복의 전염성은 독창성-상투성을 뒤섞는다. 의미의 집을 이탈하는 기호의 다양한 ‘길가기’는 총체성을 해체하는 리얼리즘을 보인다.

재현적 기호를 통제하는 이창동의 의미적 조형술은 아폴론적 ‘집짓기 스타일’로서 통합과 정주에 대한 편집증과 닿아 있다. 기호 자체의 운동성을 신뢰하는 홍상수의 차이나는 반복은 디오니소스적 ‘길가기 스타일’로서 생성과 유동성의 분열증을 띤다. 그러나 작가적 도정에서 두 스타일을 달리 볼 수도 있으며, 전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대한 관심은 동등하다. 다만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규범적 도식보다 리얼리티‘들’의 시대성에 주목해야 한다. 집(짓기)과 길(가기)의 상이한 접근은 이 점에서 더 많은 작가들의 지형도 그리기를 예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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