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Round | 원작 vs 80년대
조 형사의 다리 절단은 군홧발에 대한 응징
<날 보러와요>의 판권을 원작자로부터 곧바로 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이미 영화화를 생각하고 판권을 사들인 CF감독이 있었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지만, 차 대표가 협상을 벌이며 웃돈을 주고 재구입하는 “번거로운 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진짜 게임은 그 다음부터였다. 6개월 동안 조사해 모은 사건 자료와 자기 완성도를 지닌 원작을 놓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짜들어가야 하는 새로운 창작.
“몇명의 용의자를 두고 범인이다, 아니다를 주고받으며 긴장의 강도를 높여가는 흐름과 FM 라디오 플롯이 원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다. 너무 방대한 사건이어서 길잃기가 쉬운데 그 덕분에 감을 잡았다.”
연극과 가장 갈라지는 건 원작에 없던 80년대라는 시대를 끌어들인 대목이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는 나라였으나 아무도 보호받지 못하던 시대의 공기를 끌어들이는 것. 등화관제, 부천서 성고문사건, 거리의 전두환 대통령 환영인파, 그리고 강제수용소의 음습한 분위기마저 내뿜는 산업현장까지 곳곳에 80년대를 배치했다.
<몽정기>부터 <지구를 지켜라!>까지 80년대의 인용은 대성공 아니면 대실패로 갈리는 까다로운 지점이다. <살인의 추억>이 이 시대를 성공적으로 소화시킨 건 ‘80년대의 의인화’에 있을 것이다. 까르르 웃고 깜짝깜짝 놀라다가 분노와 감동으로 이르는 절정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불을 지르는 건 고문경찰 조용구의 다리 절단 시퀀스다.
“조용구 형사를 통해 감정을 확 터뜨려달라는 게 시나리오 단계에서 있었던 차 대표의 유일한 주문이었다. 조 형사가 목발을 짚고 등장하는 걸 넣으면 어떻겠느냐는 제안도 해왔다.”(봉준호)
“수술대 위의 조용구를 바라보는 송강호의 리액션을 통해 충분히 효과를 내줬다. 목발보다 감정적으로 더 흡인력을 발휘했다.”(차승재)
흥미롭게도 조용구 형사는 <박하사탕>의 영호처럼 공권력의 최전선에서 사람들을 짓밟았던 그 시대의 심부름꾼이다. 두 영화는 그들에게 잔혹하리만치 못된 일면을 드러내게 하고는 덜컥 면죄부를 준다. 그건 네 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넘어서는 일이었다고. 분노한 만큼 정서적 감응도 크게 일으킬 수 있는 장치인 셈이다. <박하사탕>에 이어 <살인의 추억>에서도 관객은 이를 찜찜해하기보다 감동적으로 수용했다.
“다리를 자르는 건 폭력을 휘둘렀던 군홧발에 대한 응징이다. 그 상징이라고 다들 공유했던 대목이다.”(김무령 프로듀서)
“응징이라는 코드를 읽어주는 이도 있겠지만, 감정의 흐름을 좇아가게 만드는 것이어서 좋았다고 본다.”(차승재)
<살인의 추억>은 일찌감치 ‘죽이는 시나리오’라고 소문이 났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감독의 두뇌게임은 그만큼 치밀하고 정교했다.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폭발시키는 장면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시골마을 대표바보 백광호가 범인의 얼굴을 아는 유일한 목격자임이 밝혀지는 순간과 소녀를 대상으로 했던 마지막 범죄행각이다. 두 장면 모두 ‘아버지’란 대사가 들어가 있었다. 백광호에게 가장 유력한 용의자 박현규의 사진을 들이대고 “맞지”라고 형사들이 묻는 그 긴박한 순간에 그는 엉뚱한 말을 한다. “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어렸을 때 날 아궁이에 던졌던 사람은 아버지야.” 또 범행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줘 가장 분노를 자극하는 순간에 소녀가 범인의 얼굴을 보고 “아빠…”라고 나직이 말하는 장면이 있었다. 나중에 소녀의 아버지 대목은 “오해의 여지가 있어” 들어냈지만 만약 그대로 갔다면 백광호 장면과 더불어 <살인의 추억>을 새롭게 읽게 만드는 코드가 됐을 것이다.
“가장 똥줄이 타는 순간에 백광호가 갑자기 불이 뜨겁다며 아버지 이야기를 꺼낸 대목은 나 자신이 썼지만 왜 그러는지 나도 호기심 가는 부분이다. 대체로 세 가지 이유로 분석하더라.”(봉준호)
세 가지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 순간 하늘에서 번개가 쳤기 때문에 광호가 퍼뜩 불을 떠올렸다. 둘째, 광호는 화상으로 그을린 얼굴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하다. 나는 왜 못생겼을까 하고 늘 고민하는데, 형사들이 범인 얼굴 봤지 하며 곱상하게 생긴 용의자 사진을 들이댄다. 광호는 사진을 보고 “잘생겼다…” 하고 말해놓고는 자기의 얼굴 콤플렉스가 떠올랐고, 그 원인이 된 사건을 기억하게 됐다(여경 권귀옥 역의 고서희 추론). 셋째, 백광호는 진실 고백을 두려워하게끔 돼 있었다. 아궁이 속으로 던져진 것도 말해선 안 될 것을 말했던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 가령 아버지의 외도를 우연히 봤고 이를 어머니에게 말했다가 아버지로부터 혼이 났다. 그래서 광호에게는 진실을 말하면 처벌받는다는 무의식이 깊이 자리잡게 됐다(최용배 청어람 대표의 추론).
3 Round | 배우 vs 배우
송강호를 기다렸다, 무려 5개월씩이나
송강호, 박해일, 변희봉. 봉준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이미 캐스팅을 끝냈던 배우들이다. 머릿속에서. 박두만 형사 역으로 송강호가 적격이라고 감독과 합의했던 제작사는 다른 배우에게는 시나리오를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와 계약을 체결한 게 2002년 1월이었다.
“우리 영화 전에 <YMCA야구단>을 하기로 약속이 돼 있던 그와 어떤 영화를 먼저 하느냐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YMCA야구단>의 진행이 늦어지면 <살인의 추억>을 먼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무엇보다 2년 가까이 준비해온 봉 감독이 조급해 했다.”(김무령 프로듀서)
<YMCA야구단>과의 순서 결정은 송강호 자신이 내렸다. 약속한 순서대로 가는 게 맞다는 이유였고, <살인의 추억>쪽은 “순리대로 가는 것으로 일단락됐다”고 여겼다. 그러나 단 한명의 배우의 일정을 맞추기 위해 크랭크인을 늦춰야 했다. 무려 5개월씩이나!
결과적으로 송강호가 홈런을 쳐주었지만 싸이더스 바깥에서 보기엔 불안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송강호식 코믹과 <개그 콘서트>식 코믹의 경쟁력 문제다. <넘버.3>의 ‘조필’식 유머는 한참 전 이야기이고, <YMCA야구단>은 기대만큼 대박을 내지 못했다. 혹시 젊은 세대는 <개그 콘서트>식 속도전에 중독돼버린 건 아닐까? 그러나 감독과 배우가 긴밀히 수위를 맞춰간 유머는 객석에서 제대로 작동했다.
“송강호라는 배우는 뭘 해도 리얼리티라는 품 안에 머무른다. 코믹연기를 해도 근본적으로는 사실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그래서 어떤 유머를 해도 걱정이 없었다.”(봉준호)
“현실의 디테일에 밀착하면 특별히 개그를 하지 않아도 웃긴다. 친구들끼리 모이면 남들은 저게 뭐 웃기냐고 하는 것도 자기들끼리는 무지 웃기는 게 있지 않나. 삶의 코드 안에서 웃기는 것, 송강호가 그걸 한 거거든. 갈갈이가 무를 긁거나 정액으로 프라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사실 ‘저기 뱀 많은데’ 하고 한마디 던지는 게 뭐가 웃기냐고.”(차승재)
조연 배치는 또 하나의 결정적 승부처였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 같은 작품에선 조연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살인의 추억>에선 조연이 전체적으로 봤을 때나 조연이지 각각의 신에선 그들이 주인공이다. 이런 차이를 어떻게 아냐고? 시나리오 보면 알지.”(차승재)
조연들을 위해 감독이 감행한 오디션은 처절했다. 시골의 대표바보 백광호 역을 찾기 위해 연출부가 총동원해 대학로의 연극배우들을 죄다 만나고 다녔다. 최종 후보를 7명으로 압축해놓고 그들을 회사 뒷산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얼굴에 화상입은 분장을 해놓고 ‘추리닝’을 입혀 삽질을 시켰다. 그래서 뽑은 인물이 박노식이었다.
“백광호는 가장 고민이 많았던, 신중해야 할 캐릭터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긴 했다.”(봉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