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영.화. 그 무모한 게임을 향해
Prologue
<살인의 추억> 개봉 사흘 전, 명필름 사무실에서 만난 심재명 대표와 심보경 이사의 관심사는 자신들이 투자한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었다. 두 작품을 차례로 배급한 CJ엔터테인먼트는 <살인의 추억>을 예정보다 한주 앞당겨 개봉하기로 하면서 <질투는 나의 힘>을 ‘버렸다’. 당장 큰 손해를 입게 된 명필름으로선 <살인의 추억>이 곱게 보이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질투는 나의 힘>에 대한 걱정보다 “<살인의 추억>이 잘돼야 하는데…”를 거듭 되뇌고 있었다.
‘경쟁자’마저 <살인의 추억>의 흥행을 기원할 만큼 이 영화는 충무로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상태였다. 이들은 “이쯤에서 <살인의 추억>이 뭔가 보여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야 한국영화의 흐름이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진정성을 가지고 잘 만든 영화가 흥행도 된다는 걸 너무 오랫동안 보여주지 못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살인의 추억>이 대박 조짐을 보이면서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작자들은 “당장 큰 변화는 없더라도…”라고 운을 떼면서도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시나리오가 아주 좋으면 흥행 가능성이 적어 보이더라도 도전하고 싶은데 <살인의 추억> 개봉 전까지는 당분간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살인의 추억>으로 많은 게 달라졌다.”(오정완 영화사 봄 대표)
<살인의 추억>은 이른바 ‘차승재식 영화’로 불리며 감독 중심형 영화를 일관되게 추구해온 싸이더스가 만들어낸 ‘사건’이다. <비트> <봄날은 간다> <무사> <결혼은, 미친 짓이다> <지구를 지켜라!> 등 숱한 화제작을 낳았으면서 이제서야 한국영화 흥행 톱10 안에 들 수 있는 희망을 만났다.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는 “쉬운 게임의 룰로 영화를 만들면 재미가 없다. 복잡하고 다면적인 게임을 벌이자. 이게 내 인생의 노하우”라고 말한다. <살인의 추억>이 어떤 아슬아슬한 게임을 거쳐 ‘사건’을 쳤는지 5라운드 게임으로 들여다본다.
1 Round | 제작자 vs 감독
차승재의 유인작전과 봉준호의 고집 <플란다스의 개> 9억8천원, <살인의 추억> 35억원. 순제작비만 3배 이상 차이난다. 2000년 2월 개봉한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흥행에서 참패했고, 평단의 초기 반응은 시들했다. 그런데도 싸이더스는 불과 6개월 뒤 봉준호 감독에게 훨씬 큰 규모의 영화를 마음껏 만들어보라고 결정했다. 오기에 찬 도박이었을까?
“나는 범죄영화를 좋아한다. 두 번째 프로젝트가 범죄영화가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사실 <플란다스의 개>도 일종의 범죄영화이지 않나. 연극 <날 보러와요>의 원작자 김광림씨부터 만나 영화화의 가능성을 타진해본 뒤 차 대표를 만났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면서 차 대표는 집으로 찾아온 봉 감독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봉 감독은 연이어 두 작품을 자기 하고픈 대로 하게 된 듯하다. 하지만 여기엔 차 대표의 ‘유인작전’이 있었다. <살인의 추억>이 차기작으로 결정나기 전, 봉 감독은 ‘이거 어때요’라며 두 작품을 내놨다. 고3 수험생이 시험지 훔치는 이야기와 유괴를 소재로 한 아이디어였다.
“유괴건은 박찬욱, 변영주 감독 등이 준비하고 있어 충돌이 걱정된다며 다른 걸 찾아보자고 했다. 차 대표가 이야기 덩어리가 더 크고 인물도 훨씬 많은 게 좋겠다는 의견을 내놨고, 거기에 동의했다.”(봉준호)
차 대표는 애초부터 봉 감독의 두 번째 영화를 사건이나 드라마가 강한 걸로 가겠다고 맘먹고 있었다. “준호가 내놨던 두 작품은 이야기의 선이 가늘다는 점에서 <플란다스의 개>와 공통점이 많았다. 준호의 상상력은 원래 만화적이어서 현실에서 약간 뜨고 이야기가 작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연출력은 아주 좋아서 이야기를 잘 끌어간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강아지 한 마리 잃어버린 것말고 무슨 사건이 있나.”
제작자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끌고가는 감독의 힘을 데뷔작에서 봤고 그 장점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차기작을 구상했다. 그래서 봉 감독이 화성사건이란 말을 꺼냈을 때 기다렸다는 듯 오케이했다.
작품에 대한 큰 틀이 합의되면 감독이 ‘전권’을 행사하는 게 ‘싸이더스’의 오랜 원칙이다. 감독의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절대적 지원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다.
“싸이더스 영화는 그 자체가 100% 디렉터스컷이다.”(봉준호)
<살인의 추억> 편집이 한창일 때, 차 대표가 모처럼 찾아와 “조금만 줄이자”고 간곡히 부탁하고 나섰다. 봉 감독은 “큰 선심 쓰는 듯” 2시간10분에 맞춰보겠다고 했다. 그래서 차 대표는 지금도 자기가 7분 정도를 줄인 걸로 알고 있다.
“차 대표가 아주 기쁜 표정으로 ‘준호야 고맙다’며 큰소리로 외치고 가더라. 근데 애초 일정대로 가면 러닝타임이 그렇게 줄어들게 돼 있었다. 마지못해 들어주는 듯 생색낸 거다.”(봉준호)
금실 좋은 제작자와 감독이지만, 한방씩 주고받는 머리싸움이 없었던 건 아니다.
차승재의 감독형 영화론
“ 감독의 장·단점을 읽어라 ”
“감독을 연구하면 대박이 보인다. 감독의 실패도 재산이다. ”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스타감독 제조기다. 허진호, 김성수, 유하, 봉준호, 김태균, 장준환…. 데뷔작은 실패란 소리를 들었던 감독도 차기작을 싸이더스에서 만들면서 ‘뜬’ 감독도 많다. 차 대표는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실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감독의 재능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고, 그에게 제2의 <살인의 추억> 성공기를 만들어주기 위한 구상에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지구를 지켜라!>를 저예산으로 만들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일부 의견에 지금도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준환이가 가진 상상력의 포인트가 있는데 저예산으로 찍으면 그 상상력이 받쳐지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를 저예산으로 찍을 수 있나. 아무리 축구 잘하는 놈도 미끄러운 신발에 반들반들한 아스팔트 위에서 공 차게 해봐라 얼마나 잘하나.”
제작자의 임무는 감독의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걸로 못박아두고 있는 듯했다. 시나리오 단계까지만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다음부터는 ‘믿음’ 하나로 모든 걸 맡겨둔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다.
“감독 연구를 잘해야 한다. 뭘 잘하고 뭐가 약점인지. 영상은 잘 찍는데 배우의 심리연기를 이끌어내는 게 약하다면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를 붙여주고, 감독이 자기 생각을 잘 말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는 스타일이면 그의 뜻을 잘 읽고 품어주는 프로듀서를 붙여주는 식이다.”
감독들에게 직접 시나리오를 쓰게 하는 것에는 다목적 의도가 있지만 무엇보다 감독의 영화적 능력을 파악할 수 있다.
“이야기를 이렇게 구성하는구나, 주인공의 심리를 이렇게 다루는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수없이 많은 영화를 머릿속에 그리게 되고 좌표가 생기고 프로듀서와 공유파일이 생긴다. 또 감독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파악할 수도 있다. 굉장히 좋다. 내가 기획성 영화를 한다면 이런 건 필요없겠지.”
봉준호, 장준환의 조감독들도 데뷔 준비를 시키고 있다. 모처럼 한 가지 조건을 들이밀었다. 20억원 선에서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