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유머를 숨긴 액션히어로,<헐크>의 에릭 바나
2003-07-16
글 : 박은영

어두컴컴한 바에서 두 남자가 술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의 그들을 다른 이들과 구별해주는 것은 약간의 호주 악센트. “이상하지 않아?” 광대뼈가 튀어나온 갈색머리 남자가 말했다. “당신이 울버린이고, 내가 헐크라니….” 한발 앞서 할리우드에 진출한 <엑스맨>의 휴 잭맨과 축배를 든 이는 <헐크>의 에릭 바나였다.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닥치는 우연”이라는 생의 좌표는 그렇게 에릭 바나를 운명처럼 우연처럼 할리우드로 이끌고 있었다.

리안이 <헐크>를 연출하기로 한 것만큼이나 놀라웠던 사실은 주인공 브루스 배너 역으로 에릭 바나가 캐스팅된 사건. “그러게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어요. 리안이 스타가 아닌 날 선택했다는 것보다 스튜디오가 그 무모한 결정에 힘을 실어줬다는 사실, 그게 더 놀라웠죠.”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신예이면서도 소심한 과학자의 분열된 내면을 품을 만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를 찾아 헤매던 리안의 레이더망에 걸려든 에릭 바나는 유니버설도 거부하지 못할 ‘더 원’이었다. 그들 모두 호주 인디영화 <차퍼>에서 연쇄살인범을 연기한 에릭 바나에게 ‘꽂혀버린’ 것이다. 전설적인 영웅이 되기 위해 범죄를 택한 과대망상 환자의 극단적 성격 변화를 체현한 그는 호주 영화평론가협회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호주 밖에선 미지의 인물이었다. 전우애에 중독된 베테랑 군인 후트로 분해, 커피로 철학하던 이완 맥그리거나 착한 모범생 이미지로 일관한 조시 하트넷보다 강한 인상을 남긴 <블랙 호크 다운>이 공개되기 이전의 일.

에릭 바나의 커리어를 함축할 수 있는 단어는 아마도 ‘아이러니’일 것이다. 크로아티아 출신 아버지와 독일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에릭 바나는 <매드 맥스>를 본 이후로 막연하게 연기자의 꿈을 품었다. “배우가 되는 방법을 몰랐으면서도, 연기학교는 무시할 정도로 거만했다”는 그는 부두 노동자, 세차원, 웨이터 등을 전전하다가, 남의 흉내를 곧잘 내는 재주 덕에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길에 들어섰다. 92년 TV에 스카우트돼 토막극 코미디 <풀 프론탈>을 시작으로, <에릭> <에릭 바나 쇼 라이브> 등 자신의 이름을 딴 쇼프로를 통해 인기를 얻었고, 97년에는 <더 캐슬>로 영화에 데뷔했다. 러셀 크로의 캐스팅이 좌절된 뒤 난항을 거듭하던 <차퍼>는 영화의 모델인 마이크 리드가 에릭 바나를 지목해 캐스팅을 성사시킨 케이스. ‘연쇄살인마를 연기하는 코미디언’이라는 가당치 않아 보이던 이 캐스팅은, <택시 드라이버>에서의 로버트 드 니로의 연기에 비견되며, 뜨거운 호평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국의 배우인 에릭 바나와 온전한 미국의 문화인 코믹북영화 <헐크> 사이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에릭 바나는 호주산 가족코미디 <너깃>에 출연하기 위해 <트리플X>의 출연을 고사한 바 있다. 그러나 <헐크>는 달랐다. “원할 때 폰부스나 동굴 속에서 변신하는 게 아니라,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서, 그것도 괴물로 변하는” 브루스 배너의 슬픈 운명에, 그는 이끌렸다. 리안은 떠나도, 그는 <헐크>의 속편에 남게 될 전망. 그 사이 에릭 바나는 <니모를 찾아서>에서 채식주의 상어 앵커에게 목소리를 빌려줬고, <트로이>에서 브래드 피트의 적수 헥터로 출연하고 있다. “브래드 피트랑 싸우는 장면이 아주 많아요. 하지만 다치지 않게 살살 했다고요.” 그러니까 <헐크>의 숨겨진 ‘리스크’는 에릭 바나가 그 용솟음치는 유머감각을 억누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진제공 U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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