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여름, <결혼 피로연>과 <아이스 스톰>의 감독 리안은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의 폭력적인 갈등을 그리스식 비극풍으로 장엄하게 묘사한 2시간 반짜리 영화를 연출했다. 이 작품은 꾸준히 가족간의 상하갈등을 모티브로 삼았던 리안의 이전 필모그래피와 연결되며 미국 문화의 가장 유명한 아이콘 중 한명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관객이 이 영화 <헐크>의 장엄한 심각함에 거북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간단한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만화책은 얼마나 진지해질 수 있을까?
만화팬들의 요란한 항의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 항의의 대부분은 맞는 소리다. 세상엔 한없이 진지한 만화책들이 있다. 예술 작품이 속해 있는 매체로 개별 작품의 진지함과 깊이를 저울질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더 제한해보자. 미국 슈퍼히어로 만화책은 얼마나 진지해질 수 있을까? 이번에도 항의가 들어온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 미국 슈퍼히어로 만화팬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 저번처럼 큰소리는 아니겠지만. <헐크>가 소속되어 있는 마블코믹스의 슈퍼히어로들은 결코 일차원적인 선과 악의 세계에서 싸우는 단순한 영웅은 아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꼭 일일이 설명하며 지면을 채울 필요도 없을 듯하다. 이미 <엑스맨>이니 <스파이더 맨>이니 하는 작품들이 할리우드에서 각색되어 개봉되는 동안 이 주제는 수없이 토의를 거쳤기 때문이다.
헐크/브루스 배너 역시 단순한 캐릭터는 아니다. 일단 이 캐릭터는 스판덱스 옷을 입고 악당들과 싸우는 영웅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나 에드워드 하이드처럼 반영웅에 가깝다. 지적이고 얌전한 현대 지식인이 억눌렀던 분노를 터뜨리며 근육질의 원시인으로 변하는 설정은 통쾌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복잡한 세계 속에서 억압되어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 대한 이중적인 초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이들에게 의미와 깊이를 부여해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은 여전히 엉터리 과학의 용광로에서 빠져나온 어처구니없는 존재들이다. 일단 헐크를 보라. 좋다, 우린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신분석학 용어를 들먹이며 억압된 본능에 대해 떠들어댈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거창한 수사를 덧붙여도 그가 절대로 찢어지지 않는 보라색 팬티를 입은 초록색 거인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알록달록 스판덱스 유니폼에 레슬링 선수용 예명을 이름 대신 달고다니는 마블코믹스의 다른 동료들이라고 예외일 수 있을까.
헐크의 종횡무진은 내적 고통의 폭발
하지만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왜 알록달록 스판덱스를 입은 주인공들은 그냥 심각해서는 안 되는가? 왜 쫄쫄이 보라팬티를 입은 거인들은 그냥 심각해서는 안 되는가? 왜 이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는 꼭 설정에 대한 농담을 한두개씩 변명처럼 첨가해야 하는 걸까? 왜 이들의 이야기는 캠프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어야 하는 걸까? 패션의 영향력이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영화 속의 심각한 주인공들은 꼭 베스트 드레서이기도 해야 하는 걸까?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초록색 피부라는 핸디캡을 고려해보면 보라색 팬티는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런 질문은 <헐크>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스파이더 맨>이나 <엑스맨> 시리즈와 달리 <헐크>는 설정 농담이 전혀 없는 슈퍼히어로영화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헐크가 신비스러운 보라색 팬티로 스크린을 끝도 없이 비벼대는 동안에도 영화는 심각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농담 비슷해 보이는 건 만화책을 흉내낸 화면분할인데, 이 역시 따지고보면 농담은 아니다.
사실 이 영화의 감상에 계속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작에 친숙한 마블코믹스 팬들의 불만도 여기에 비하면 대단치 않다(예를 들어 미국 그릭 문화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AICN의 해리 놀스는 이 영화에 상당히 호의적이었으니 그쪽도 의견 일치를 보지 않은 게 분명하다. 게다가 <헐크> 관객 중 얼마나 원작 만화책에 익숙할까? 미국에서는 꽤 많겠지만 해외로 나가면 그 비율은 순식간에 떨어질 것이다). 진짜 문제는 리안이 이 영화의 황당함을 정당화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헐크의 보라색 팬티는 등급용 눈가리기였다고 치자. 그래도 그는 한번 점프로 몇 킬로미터를 날아가고 탱크를 장난감처럼 집어던지는 헐크의 모험을 브루스 배너의 심각한 내적 고통과 동격으로 취급한다.
이건 예술적인 실수일까? 이 점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일단 슈퍼히어로영화와 슈퍼히어로만화의 차이점에 대해 한번 지적해야 할 것 같다. 아니 나는 지금 매체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수용과정의 차이이다.
부자간 세대 갈등, 그리스식 비극풍 묘사
자, 여러분이 지금 <엑스맨> 만화책을 하나 읽는다고 치자. 여러분은 이 만화에 가득 찬 과장된 액션과 황당한 스토리 전개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만약 영화가 이런 내용을 그대로 담는다면 여러분은 옆구리가 빠질 정도로 웃어댈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만화책을 보는 동안에는 웃지 않는다. 액션이 과장됐다는 것도 알고 스토리 전개가 황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만화책을 읽는 동안에는 그 황당함을 받아들인다. 나중에 매체가 부여한 진지함을 무시하고 농담거리로 삼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만화라는 매체는 과장된 허황함을 영화보다 쉽게 용납한다. 실사영화를 볼 때 관객이 용납하지 않을 허황함은 만화책 속에서 당연한 것처럼 진지함과 공존한다.
이쯤 되면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여러분은 물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린 비슷하지만 좀더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왜 우린 영화를 보면서 그 황당함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어차피 우린 화가 나면 초록색 거인이 되는 남자 이야기를 보려고 극장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거인의 보라색 팬티와 점프 능력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가 만화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도 황당함이 주는 자유 때문이었을 텐데.
질문 하나 더. 결정적으로 왜 황당함이 진지함과 공존할 수 없는 걸까?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하는 수많은 예술작품들이 <헐크>만큼이나 비논리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데도 우린 그 작품들을 보며 한없이 심각해진다. 그리스 신화는 어떤가? <파우스트>는 또 어떻고? 물론 우린 어느 때라도 “성경을 보라…”라고 말할 수도 있다. 결정적으로 리안이 <헐크>를 만들면서 그리스 신화적인 테마와 줄거리를 가져온 것도 순전히 <헐크>라는 만화주인공의 황당함이 그리스 신화에 걸맞은 거창함에 맞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황당함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거대함과 진지함에 도달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 아닐까?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그렇단 말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려도 관객의 반응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헐크>에 대한 관객과 평론가들의 엇갈리는 반응은 이게 단순히 단답식 정답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어떤 관객은 헐크의 보라색 팬티를 그리스 비극식 드라마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관객은 헐크의 보라색 팬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비극식 드라마를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관객은 그리스 비극식 드라마가 보라색 팬티를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되어 화가 날 것이다. 어떤 관객은 그리스식 비극도, 보라색 팬티도 싫을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 정답은 리안의 영화 <헐크>가 관객을 통제하는 데 그렇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특히 할리우드처럼 상업적인 결과가 중시되는 세계에서 비난은 감독에게 돌아간다. 하지만 예술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고 소통의 책임은 양쪽 모두에 놓여 있다. 리안은 이미 자기 일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만화와 영화, 황당함과 진지함에 대한 선입견을 잠시 접어놓고 한번 백지상태에서 그의 작품을 감상해보는 게 어떨까? 물론 여러분이 그뒤에도 보라색 팬티에 진저리가 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