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버스터로서 <헐크>는 완벽한 실패작이었다. 2시간30분이라는 믿지 못하게 긴 러닝타임 동안, <스타워즈> 몇회분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과잉으로 뒤얽혀 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컷 수를 늘린 화면은 또다시 화면분할 기법으로 조각나 있다. 늘 프로작(항불안제)을 상용하는 것 같은 심중있는 무사인 리안은 갑자기 처방전을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로 바꾼 사람처럼 공격적인 연출 스타일에 대한 매혹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는 특수효과라는 마법을 처음 손아귀에 쥔 아이처럼, 기존의 카메라로는 도저히 보여줄 수 없는 극단적인 줌인과 줌아웃으로 개구리 눈알과 헐크의 눈동자를 늘렸다 줄였다 좁혔다 멀어지게 했다 만든다. 관객의 감정이입은 산산조각나고 헐크와 슈렉의 차이가 무언가 하는 질문이 끼어드는 사이, 영화는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헐크의 가족사에 시간을 낭비한다. 그러니까 <헐크>는 <배트맨>이 보여주는 장대한 시각적 세트의 매혹이 거의 없는 영화이다. 심지어 헐크가 일개 사단에 해당하는 비행기와 탱크를 부수고 짓이길 때도 그 흔한 폭발신 하나 보여주지 않는 이상한 블록버스터이다. 가장 미국적인 소재를 동양의 한 이방인 감독이 연출하겠다고 덤벼들어 유니버설 사상 가장 많은 액수를 써버린 지금, 제임스 카메론이 <춘향전>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이럴까, 전 미국의 언론과 관객은 <헐크>에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는 ‘<헐크>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닉 놀테의 머리카락’이라고 조소를 보내고, <롤링스톤즈>는 ‘헐크야말로 통통 튀는 녹색 비치 발리볼’이라며 어이없어한다. <뉴욕타임스>는 헐크가 너무 온순하다고 투덜댔고, <타임>은 십대에나 했을 프로이트적 방황을 위해 리안이 너무나 많은 돈을 써버렸다고 비수를 날렸다. 그렇다. 다시 한번 보아도 여전히 블록버스터로서 <헐크>는 완벽한 실패작이다. 재미없고 지루하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종일관 어지럽고 산만하게 만드는, 시간 때우기로는 젬병인 그런 영화이다.
이드적 본성, 비극적 가족관계
돌이켜보면 블록버스터로서 <헐크>의 좌초에는 하필이면 왜 리안이 헐크에 매료되었는지 그 출발점부터 수상한 구석이 있다. 미국에서 자란 미국의 악동감독들이 코믹북스에 매료되어 자신들이 읽어온 코믹북스의 영웅을 영화화하고 싶어하는 심리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팀 버튼이 배트맨의 고담 시티를 천지창조하고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의 초능력을 되받아칠 때, 그러나 리안은 하필이면 TV시리즈물의 키치한 기억이 생생한 헐크를 선택했다. 리안은 원한다면 <터미네이터3>의 연출도 맡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헐크는 엄밀하게 말하면 슈퍼맨류의 액션영웅이 아니다. 그는 일종의 괴물로서 킹콩과 사촌간이며, 원자력 시대의 지킬과 하이드씨이다. 헐크는 슈퍼맨과 달리 누군가를 구하거나 세상을 위해 일하는 데 관심이 없다. 분노에 의해서만 팽창하는 이 녹색 괴물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유구한 프로이트적인 법칙을 체화하는 사회적 억압 안에서 그 기능을 다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헐크의 본성 때문에, 헐크는 흥미로운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정신병리적 관점에서 보자면, 슈퍼맨류의 초인영웅들이 본인의 자아가 영웅의 상태를 인식하고 있는 신경증적인 인물이라면, 헐크는 자신의 자아가 괴물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슈퍼맨처럼 폼나는 팬티를 갈아입거나 자신의 사생활을 방어하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병적인 인물이라 하겠다. 한마디로 증세가 더 심각한, 인간의 가장 진한 그림자와 최악의 자아를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헐크인 것이다.
리안은 이러한 헐크의 이드적 본성에 숙명론적인 가족관계의 비극을 덧씌우려 마음먹은 듯하다. 화면은 최대한 코믹북스의 만화적 속성을 살리면서도 이야기는 되도록 유장하게. 이 절대로 화해 불가능할 것 같은 지킬과 하이드씨를 하나로 융합하려는 리안의 야심이 바로 헐크를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실험은 완벽한 실패처럼 보인다. 전례없이 많은 익스트림 클로즈업에 의존하며 리안은 허겁지겁 이야기를 삼키는 것처럼 보이는 엉망진창인 도입부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혹은 포기하지 못한다). <엑스맨>의 그 깔끔한 도입부,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자신의 힘을 인식하는 매그니토의 과거를 한달음에 요약하는 브라이언 싱어의 재간을 돌이켜보자. 이와 달리 리안은 브루스뿐 아니라 그 아버지인 데이빗(닉 놀테)이나 또 다른 오이디푸스의 원죄에 시달리는 것같이 보이는 베티(제니퍼 코넬리)의 심리적 동기와 가족간의 관계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든다. 헐크의 변신과 무자비한 주먹질의 난장판을 기대하던 관객을 여지없이 배반하며, 영화 중반부까지도 리안은 아직도 본론은 멀었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래서 어쩌겠다고, 그래서 대체 리안은 어쩌겠다는 말인가?
신화적 공간
바로 이 지점부터 리안은 흥행감독으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포기하고, 작가주의 블록버스터 혹은 블록버스터적 드라마의 길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와호장룡>에서처럼 <헐크>에서 리안은 인상적인 악당의 모습을 선보이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혹은 그런 악당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베티를 사이에 두고 브루스와 과거 연적 상태였던 글렌 탈봇이 등장하지만 이 악당은 <배트맨>의 조커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의 인장도 남기지 못하는 평범한 악한이다. 브루스를 보자마자 느닷없이 내보이는 적개심, 그 피상적인 묘사와 정형화된 모습을 보자면 혹시 리안이 이 인물을 그냥 방기하거나 심지어 일부러 정형화한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면서 리안은 동시에 <헐크>를 둘러싼 시스템의 문제를 세밀히 검토해나간다. 기둥 줄거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은 무기 개발을 위한 시험과정과 미치광이 과학자의 욕망 그리고 헐크의 생포 뒤 보여지는 정부의 과민한 대응 등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점점 더 이야기가 흩어지는데도 리안은 개의치 않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헐크가 탱크의 총신을 휘어 그걸 다시 탱크 입구에 가져다댈 때, 리안이 과연 <헐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슬슬 숨겨둔 퍼즐이 보이기 시작한다.
<와호장룡>에서 네 무사를 통해 그리고 고비사막이라는 영화적 공간을 통해 클래식 차이나의 전설을 복원했던 리안은 다시 한번 애리조나의 사막에서 신화적 공간으로서의 미국을 짧게 재현한다. 이때 <헐크>는 떠돌이 총잡이 같았던 과거 서부극의 품새를 지녔던 TV시리즈의 <헐크>가 아니라 오히려 와이어줄을 달고 베이징의 지붕을 나르던 리무바이의 분신처럼 보인다. <헐크>는 중력 즉 모든 사회적 억압을 이겨내려는 의지로 서부극의 무수한 배경이 되었던 애리조나 사막을 거쳐 다시 현대적인 공간인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 이르는 종단을 한걸음에 해치운다. 그러나 바로 이 신화적 공간에서 미국은 나쁜 인디언 대신, 슈퍼맨류의 영웅 대신, 마침내 더욱더 사나워진 자신의 이드와 대면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오직 분노에 의해서만 힘을 키우는 이 괴물은 완벽한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은 정부의 기물들을 단번에 부수고 파괴한다. 이 순간, 결국 신이 되려 했던 브루스의 아버지, 그래서 애완동물마저 혹은 자신의 친자식마저 괴물로 만들었던 비정의 아버지는 더 나아가 미국이란 시스템 자체와 한몸이 된다. 헐크의 아버지는 군사시설의 전기적 힘을 입으로 받아들여 한마디로 구강기적인 함입을 통해 헐크와 맞서는 또 다른 괴물이 된다. 반면 헐크는 미국의 모든 파워와 기능의 핵심이 되는 두 장소, 즉 연구소와 군대 기지 시설을 파괴해버린다. 그뒤 그는 애리조나의 자연으로 되돌아가 마침내 아마존의 더욱 깊숙한 자연으로 은둔한다. 초인영웅이 아니라 마치 동양의 무협협객처럼. 리안을 통해 <헐크>는 혹은 미국은, 자신의 과거 기억뿐만 아니라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대면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미국에 관한 심층적 보고서
부드러운 허무의 늪에 빠져들어가며 서로가 서로를 죽였던 <와호장룡>의 무사들처럼 <헐크>의 인물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의 과거 때문에,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멸망해간다. 그것이 바로 리안이 진단한 현대 미국의 모습이 아닐까? 무엇이든 흡수해서 내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미국이라는 괴물이 선사하는 악몽. 스탠 리의 원작 <헐크>가 핵전쟁시대의 공포, 냉전시대 미국의 불안을 읽어냈다면, 리안은 가장 미국적인 소재인 <헐크>를 통해 세상을 구하는 대신 미국에 관한 가장 심층적인 보고서를 꾸민다. 아무리 9·11 테러가 터져도 미국은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스스로의 팽창주의적인 욕망에 의해 망하게 되리라는 섬뜩한 예언. 그걸 단지 리안식의 오이디푸스 드라마로 읽어내는 미국의 언론은 얼음조각이 눈에 박혔단 말인가?
<센스, 센서빌리티>에서 서양적인 것을 서양적으로 구현하였고, <와호장룡>에서 동양적인 것을 동양적인 것으로 구현했다면 리안은 <헐크>에 와서 서양적인 것을 동양적으로 구현하려 든다. 공간이 인물과 함께 말하고, 화면 분할과 빠른 팬과 줌이라는 서양적 연출 도구로 오히려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을 막는 리안의 교묘함은 네이처 대 너처, 자유의지 대 억압, 아이 대 어른, 괴물 대 영웅 그리고 서양 대 동양의 관문을 지나, 미국의 중심에서 미국의 맹점을 들추는 저력을 발휘한다. “미국은 자기 소멸적이고 억압되고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숨기고 삽니다. 저는 그 점에 대해 흥미로웠어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리안이 고백한 것처럼, 그에게 중국은 누워 있는 용이라면, 미국은 영원한 애증의 근원, 오랫동안의 탐구로도 부족한 꼭꼭 숨어 있는 호랑이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