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주아 vs 보헤미안
이재용 감독은 “사람이 왜 이런데?” 하는 질문을 받으면 “충청도 중산층 출신이라서 그래”라고 농담처럼 대꾸하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영화에는 구질구질한 인생이 좀체 등장하지 않는다. 한결같이 넉넉한 부르주아들이다. <정사>와 <스캔들…>의 등장인물들은 시대만 달랐지 서로 조응할 만한 상류층이다. <순애보>에서 우인은 비록 동사무소의 말단 직원이지만 아버지 재산 덕에 적어도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그들은 모두 부르주아이지만 동시에 보헤미안이다. 비극적으로 뒤얽힌 사랑 때문이건 남루한 일상이 지겨워서건 그들은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스캔들…>의 조원이 문무에 능하나 출세에 뜻이 없고 유희를 찾아 즐기는 것도 이런 별스런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부르주아를 중심에 세우지만 프롤레타리아를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순애보>에서 삼류 댄서로 살면서 미혼모가 되는 리에나 불법체류자 아랍인 네마자데는 조금도 기죽어 있지 않다. 심지어 게이오대학을 다니는 척하는 스포츠센터 청년은 딸과 아내가 있는 어엿한 가장이자 포르노 배우다. 비난의 빛은 조금도 없다.
감독의 말 >> “한창 영화를 고민할 때가 80년대였다. 어떤 영화를 해야 할지 고민할 때 나는 내가 아닌 걸 하고 싶지도 않았고, 내가 모르는 걸 할 수도 없었다. 내가 하려는 건 다 하찮아 보이던 시대였다. 그래서 영화를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안주하지는 말되 솔직해지기로 했다. 베르트랑 타베르니에의 <시골에서의 일요일>을 아주 좋게 봤는데, 어디선가 ‘프티 부르주아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말을 읽었다. 그게 힘이 됐다. 내가 중산층 출신인 건 맞지만 상류층과 하류층 그 어느 곳에도 속했던 적은 없고 변방에 관심이 많을 뿐이다.
사실 내 영화에 상류층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정사>의 처음 컨셉은 청담동 사는 부인이 아니라 은행의 부장급 아내 정도였다. 그런데 소재가 불륜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아주 좋아하지만 이런 구도로는 그 범위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였다. 추석특선영화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같은 걸 만들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숙과 이정재라는 스타를 데리고 말이다. 그래서 판타지로 가되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하기로 했다. 환상을 심어주는 게 아니라 남의 사랑놀음을 보며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말이다. <스캔들…>도 마찬가지다. 왕실 이야기는 TV에서 넘쳐나고, 토속 에로물도 그동안 수없이 만들어졌다. 다뤄지지 않은 게 사대부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
5. 클래식 vs 트렌디(혹은 근본주의 vs 키치)
“10년 뒤에 봐도 세련된 느낌이 남는 영화를 만들자”는 게 <정사> 이후 일관되게 유지해온 이재용 스타일의 공식 노선이다. 클래식한 영화가 되고자 하는 소망이다. 그는 또 상업영화의 장르 안에서 익숙한 소재들(<정사>의 불륜, <순애보>의 일상성, <스캔들…>의 사극)을 안고 가면서 자기 식으로 비틀어대는 걸 즐긴다. 멜로나 사극 같은 장르만큼 클래식한 것이 있을까. 자기식 변용에서 끼어드는 게 트렌디한 쿨한 감성이다. <스캔들…>에서 조원이 가슴아리게 숨을 거둘 때, 그의 손발이 되어온 자근노미가 중얼거린다. “양반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렇게 값어치없게 죽나!” 이건 재치있는 농담이지만 멜로의 절정을 완성하는 긴요한 시점에서 분위기를 깨는 결정적 대사가 될 수 있다. 제작사 내부에서 논란이 일었지만 감독은 밀어붙였고, 시사회에서 20대 중·후반의 젊은 여성들이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클래식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면서 <순애보>에선 키치적 감성으로 작품 전체를 은근히 감쌌다.
감독의 말 >> “섣부른 퓨전이나 트렌디를 하기보다 근본을 잘하자, 클래식을 잘하자는 주의다. 유행에 관심이 많고 그걸 즐기기도 하지만 내 것으로 선택하고 사야 하는 시점에선 결국 클래식하고 베이식한 걸 고르게 된다. 사실 난 존 워터스나 알모도바르의 초창기 영화 같은 키치하고 펑키한 영화를 좋아하고 그런 걸 만들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키치적인 게 주류가 돼버리면서 흥미를 잃게 됐다. 조폭영화가 유행하면서 양아치라는 걸 지나치게 자랑하고 드러내는 데 거부감이 일었다. 뭐든 관습화되고 주류가 되면 일단 싫어지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스캔들…>의 음악도 대금이나 국악을 싫어해서 쓰지 않은 게 아니라 이 대목에선 이렇게 쓰는 게 정석처럼 통용되는 게 싫었다. 포장마차 메뉴가 어딜 가나 똑같은 것도 난 싫다. <바람난 가족>을 아주 재밌게 봤는데 시니컬하기가 10배쯤은 더할 영화가 토드 헤인즈의 <해피니스>(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 솔론즈의 <해피니스>임. 확인!!!)일 거다. 세상을 혐오하게 만드는 이런 영화를 재밌게 즐기는 편이지만 내가 만들어 보여준다는 것에는 회의가 든다. 쿨한 감성이 내 취향이긴 하나 이른바 ‘쿨한 영화’로 불리는 걸 만들기는 싫다. 그래서 내 영화에 신파적 요소가 자꾸 끼어드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다 모아놓으면 <아멜리에> 같은 영화가 될 것 같다. 모든 캐릭터가 약간 병적이며 신경증적이지만 귀여운.”
6. 자기 페르소나와 거리 유지
<정사>와 <순애보>에서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는 우인은 이재용의 페르소나일 것이다. <정사>에서 우인의 세련된 겉모습에서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지만 내면을 드러내는 표정은 어떤 결핍감에 시달려 보인다. 정상적인 듯하나 약간 고장난 상태다. <순애보>에서는 우인을 확실히 고장난 상태로 만든다. 마비된 새끼손가락이 상징하듯 ‘거세된 남자’이고 스스로를 외부세계와 시종일관 차단시킨다. 이렇게 어딘가 고장났고 폐쇄적이지만 우인은 숨어 있는 열정을 발산시키려는 욕망을 갖고 있고, 그런 기회를 만나면 서슴없이 폭발시켜버린다. 특이한 건 이재용 감독이 자기 페르소나를 편애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점이다. <정사>에서 쿨한 감성은 우인의 몫이 아니라 그의 ‘경쟁자’인 서현의 남편(송영창)일 것이다. 우인이 그에게 “행복하십니까”라고 묻자 남편이 답한다. “행복이 별거야? 저 수족관을 봐. 물결은 잔잔하고 온도 딱 맞고, 먹을 건 언제든지 계속 공급되고, 아무 걱정없이 설렁거리며 헤엄만 치는 것. 그게 행복 아닌가.” 쓸쓸하기는 해도 비난할 수 없는 현실감각이다. 남편은 서현의 외도를 알면서도 굳이 캐묻지 않는다. <정사>는 남편을 지리멸렬하게 그리지도 않았고 위기의 원인을 그에게 돌리지도 않았다. 이재용 감독의 ‘관조적 쿨함’은 이렇게 고루 분산돼 있다. <스캔들…>의 조원이 이재용의 페르소나는 아니겠으나 우인보다 훨씬 거리를 두고 있음은 분명하다. 조원은 대범하면서 야비하고, 악하면서 선하다. 이재용 감독은 거꾸로 캐릭터의 이런 이중성에 더 애정을 품고 있는 듯하다.
감독의 말 >> “배우의 얼굴이 너무 진하고 극적이면 부담스러워서 싫다. 평범한 듯한데 뭔가를 감춘 듯한 사람의 얼굴을 한 배우가 좋다. 튀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할 것이다. 그런데 한명한명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선악 같은 어떤 도식으로 사람들을 구분하기란 힘들다. 평범한 듯한데 변태일 수 있다. 그래서 배우도 아주 드라마틱하기보다 살짝 변용이 가능한 친구가 좋다. 이정재는 평범한 듯한데 섹시하고 배용준은 부드러운 듯하지만 안경을 벗으면 매섭고, 단호하며, 야비한 느낌까지 들어서 좋다. 난 내 캐릭터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는 있어도 편들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에 대해 가혹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단죄하지도 못한다. <스캔들…>의 원작에서 조씨 부인은 악인으로서 결국 벌을 받고 병들어서 야반도주한다. 내 작품에선 그렇게 못했다. <정사>의 서현도 내가 단죄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지닌 삶의 무게는 다 똑같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인간적 고뇌에 관한 한 평등하지 않을까.”
7. 디테일 vs 유머
이재용 감독처럼 촬영현장에서 말이 없는 연출자도 드물 것이다. 스탭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다(술자리에서도 도통 말이 없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 “왜 이렇게 말이 없으세요” 하면 “제가 보이나요?” 하고 되묻는 ‘유머’를 구사한다. 그는 투명인간이 돼 보이지 않는 관찰자가 되고 싶을 때가 많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디테일을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스타일리스트의 기본은 디테일에 대한 집착이 아닐까). 이야기의 맥락과 전후관계, 왜 저 캐릭터가 이 상황에서 이런 이상한 짓을 하는지 논리와 상상으로 충분히 납득이 돼야만 한다. 그의 유머감각은 정교하게 설계한 상황의 아이러니에서도 나오지만 한두번 봐서는 찾기 어려운 디테일로 드러나기도 한다. 감독만이 알고 있을 디테일과 유머를 들어보자.
감독의 말 >> “<순애보>에서 아야가 가는 사진스튜디오(실은 포르노 사이트 업체)의 이름이 ‘벨 드 쥬르’(나팔꽃)다. 이건 루이스 브뉘엘 영화에서 따왔다. 성적 리비도에 억압돼 있는 카트린 드뇌브가 남편 친구로부터 고급 매춘업소에 대한 정보를 듣고는 낮에만 몸을 파는 여자가 된다. 그곳에서 지어준 이름이 낮에 피는 꽃이란 뜻의 ‘벨 드 쥬르’다. <순애보>에서도 아야가 ‘아침에 와서 (사진을 찍어도) 좋아요’라고 하자 아침 조(朝)가 들어간 아사코란 예명을 지어준다. 아사코의 머리 모양과 옷은 <비브르 사비>의 ‘나나’ 스타일을 옮겨왔다(안나 카리나가 연기한 나나는 매춘부다). <스캔들…>에서 첫 음악이 불협화음처럼 들려오는데 그건 오케스트라가 공연을 앞두고 악기의 줄을 맞추는 듯한 효과를 염두에 두고 넣었다. 사람들은 공연장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감상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지 않는가. 조원이 춘화를 그릴 때마다 낙관을 찍는데, 자세히 보면 그 호가 ‘발몽’이다(같은 원작을 영화화한 밀로스 포먼의 작품 이름). 춘화도 자세히 보면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을 짜깁기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조씨 부인과 한담을 즐기는 대갓집 마나님들의 이름이 허씨 부인, 오씨 부인 등인데 모두 내가 좋아하는 허진호 감독, 오정완 영화사 봄 대표 이름에서 따왔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