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충무로에서 바쁜 사람들을 대다보면, 그중에서 정두홍 무술감독이 빠질 수 없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에선 무술감독을, <아라한 장풍대작전>에선 무술감독과 배우를 겸업하다보니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것. 게다가 그가 무술감독을 맡았고 ‘싸이퍼’라는 악역으로 출연한 <내츄럴시티>까지 개봉했으니 정두홍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곳저곳에서 번쩍거리고 있는 셈이다. 요즘 정두홍 감독의 표정은 한결 밝아졌다. ‘일복’이 많아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탓도 있지만,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던 서울액션스쿨의 이전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덕분이다. 자칫 공중분해될 위기에 놓였던 액션스쿨을 강우석 감독이 사재를 털어 새롭게 만들어주기로 약속한 탓에 그는 가뿐한 마음으로 몸을 활활 태워가며 여러 현장을 누비고 있다. 액션스쿨의 리더로, ‘국가대표’ 무술감독으로, ‘성격파’ 배우로 맹활약 중이며 감독의 꿈을 키우고 있는 정두홍 감독을 만나 그의 숨가쁜 나날들에 관해 들어봤다.
-요즘 무척 바쁜 것 같다.
=오늘(9월23일)까지 1주일 동안 부안에서 <실미도> 촬영현장에 있었고, 내일은 <아라한 장풍대작전>, 모레부터는 <태극기 휘날리며> 현장에 결합해야 한다. 배우만 안 하면 그래도 덜 바쁠 텐데, 연기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 일이 너무 많다. 그래도 <실미도>와 <태극기…>가 거의 끝나가 다행이다.
-<내츄럴시티>의 싸이퍼 역을 포함해 배우로 얼굴을 많이 비추고 있다.
=단역을 처음 맡았던 영화는 <장군의 아들2>였고, 배역 이름이 있는 연기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때 처음 해봤다. <내츄럴시티>에는, 민병천 감독과 여행을 함께 갔다가 내 술 먹은 모습을 본 민 감독이 캐스팅해 출연하게 됐다. (웃음) 한이 많아서인지 술을 먹으면 눈빛이 강렬해지는 것 같다. 그걸 본 민 감독이 ‘잠깐 나와서 죽으면 된다’고 하기에 그러자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주로 악역만 맡는다.
=날 보고 순해 보인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만날 악역만 시키더라. (웃음) 그래도 <챔피언>과 <네 멋대로 해라>에선 착한 역 아니었냐.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피도 눈물도 없이> <챔피언>처럼 배우로 나온 영화들의 흥행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나도 속이 상한다. 배우 입장이 아니라 스탭 입장에서 자기가 맡은 작품이 잘 안 되면 되게 지치고 스트레스받는다. 오죽하면 흥행 좀 잘되게 해달라고 절이란 절은 다 찾아다녔겠냐. 그래도 <내츄럴시티>는 좀 흥행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츄럴시티>의 와이어 액션, 한계를 실험하다
-힘과 시간을 많이 들였던 <내츄럴시티>가 개봉하니 감회가 남다르겠다.
=<내츄럴시티>를 찍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촬영 여건도 썩 좋지 않았고, 난이도도 높았던 편이다. 초반부 액션장면 중 사이보그가 물속에서 탁 튀어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30∼40명이 한꺼번에 와이어를 잡아당기는데도 멋있게 튀어오르지 않는 거다. 크레인 위에서 와이어를 잡은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힘으로 잡아당기는 방법도 생각했는데, 촬영장 여건상 크레인을 놓을 수가 없었다. 또 그 장면은 강원도 시멘트 공장에서 찍었는데, 촬영을 하고 나면 온몸에 분진이 범벅이 됐고, 목소리가 안 들려 칠판에 글씨를 써서 의사 전달을 해야 했을 정도다. 수십명이 함께 힘을 써야 하는 와이어 액션을 하기엔 정말 악조건이었다.
-<내츄럴시티>의 액션에 대해서 자평을 한다면.
=이 영화는 정말 한계를 느끼면서 찍은 작품이다. 만약 지금 찍는다면 그렇게까지 고민을 하지 않고 찍겠다는 생각이 든다. 와이어도 익숙지 않던 상황인데다 조건도 안 좋았다. 이젠 와이어 액션도 예전과 달리 많이 숙달된 편이다.
-와이어 액션에 대한 연구는 어느 정도 성공 단계에 접어든 것인가.
=<명성황후> 뮤직비디오 때부터 본격적으로 와이어 액션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아직 홍콩이나 할리우드와 비교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10년간 (와이어를) 당긴 애들과 한두번 당긴 애들이 같을 수 있겠나. 하나하나 차근차근 익혀나가는 중이다. 그래도 <아라한…>을 보면 많이 달라졌다는 평가를 해줄 것 같다. 보통 상체에 와이어를 맨 특수복장을 걸쳐야 하는데, 여기선 웃통을 다 벗은 상태에서 와이어 액션을 시도했다. 몸이 다 찢기고 그래도 부딪히니까 되긴 하더라.
-와이어 액션이 앞으로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는가.
=와이어는 옵션이라고 생각한다. 자동차로 치면, 에어백, ABS 브레이크 같은. 와이어를 제대로 익히고 나면 나는 개인적으로 라이브 액션을 연구할 생각이다. 지금 할리우드나 어디나 와이어 액션에 CG를 사용하는데, 트렌드는 돌고 도는 것 아니겠냐. 그러다보니 완전한 라이브 액션인 타이의 <옹박> 같은 영화가 화제가 되는 것 아니냐. 내년 후반쯤이면 와이어와 CG가 하나도 없는 액션영화를 하게 될 것 같다.
허무맹랑한 상상에 나를 던진다
-예전에 인터뷰할 때 자신의 액션에 한계를 느낀다고 했는데, 라이브 액션이 그 극복방안인가.
=아니, 이젠 한계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동안은 실현 가능한 것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다보니 한계가 눈앞에 드러났던 것 같다. 하지만 머릿속은 한계가 없다. 지금은 허무맹랑한 상상이라도 하기로 했다. 그러면 될 것은 되고 안 될 것은 안 되지 않겠냐. 만약 정말 만들어내야 하는 장면이라면 CG라든가 다른 쪽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좀더 자유롭게 놀 생각이다.
-서울액션스쿨 이전문제는 어떻게 된 것인가.
=액션스쿨은 서울 대방동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실내체육관을 장기 임대받아 사용하고 있었는데, 서울시 계획에 따라 체육관 자체가 올해 말이나 내년쯤에 헐릴 예정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영화사 사장님들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는데, 다들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강우석 감독님이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에 150평의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주기로 결정을 내렸다.
-강 감독이 내건 조건은 무엇인가.
=없다. 헤이리의 그 땅은 강 감독님 개인 땅이고, 예산도 강 감독님의 사재를 털어서 마련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강 감독님은 그저 건물을 잘 지어서 열심히 일하라고만 말한다.
-뭘 어떻게 했기에….
=이번에 <실미도>를 찍으러 내려갔을 때 술 마시는 자리에서 내가 다짜고짜 그랬다. ‘감독님, 액션스쿨 하나 해주세요’라고. 그러면서 여차저차 사정을 설명했더니 강 감독이 그러더라. ‘꼭 서울이어야 하냐’고. 서울 밖이어도 상관없다고 했더니 ‘가자, 파주로’라면서 바로 결정을 내리더라.
-강우석 감독이 그만큼 정두홍 감독을 아낀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게 아니다. 아마도 <실미도>를 찍으면서 30명의 연기자가 완전히 뭉쳐 연기를 펼치는 것을 보고선, 배우들을 이렇게 단련시켜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들의 액션을 액션스쿨에서 가르쳤으니까.
-강 감독이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계획이었나.
=막막했다. 사실 서울시의 계획이 오래전부터 나와서 나도 열심히 뛰어다녀봤다. 미사리 등을 알아봤지만, 내가 원하는 정도의 공간을 마련하려면 최소한 20억원은 들더라. 그래서 거의 자포자기의 마음이었다. 이번에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갔을 때도 ‘특용작물이나 키워볼까’ 하면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정말로 안 된다면 액션스쿨을 해체하고 나는 농사나 지을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