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황산벌> 제작기 [1]
2003-10-17
상상사극 <황산벌> 제작현장에서 건진 뉴스 톱 10

내 영화인생의 절반은 황산벌에서 배웠다

유난히 비가 많이 왔던 올 여름, 어느 촬영현장이라고 쉬웠겠느냐마는 유달리 몸으로 뒹군 현장이 있었으니, 바로 <황산벌>의 현장이다. 질퍽해진 땅 때문에 다리 한쪽 옮기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20kg이 넘는 갑옷과 온갖 무기들을 들고 나뒹굴어야 했으니 말이다. 6년 전 기획 때부터 올 여름 촬영현장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황산벌>이 드디어 이번 주말 극장에 걸린다. 그리고 이 영화와 함께한 정승혜 제작이사가 <황산벌>의 지난 6년의 기록을 여기 풀어놓았다.

#1 ▶ 6년 전, 조철현의 이준익 옆구리 찌르기

“‘백제의 마지막 날’을 소재로 사극영화 한편 맹글면 어쩌것소이. 계백장군, 의자왕, 김유신, 화랭이 관창 나오는 황산벌 전투 야그 안 있소….”

<키드캅> 이후 5년 만에 만들어 개봉, 절반의 성공을 거둔 <간첩 리철진>을 끝내고 이미 그 이전에 기획되었던 <아나키스트> 투자 건으로 헤매고 있을 무렵, 그러니까 거의 6, 7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기획의도나 의미는 좋았지만 중국 올 로케여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에는 선뜻 누군가가 나서서 투자를 하겠다고 전의를 불태워주지 않았다. 당시 감독으로 내정되었던 박찬욱 감독님과 이준익 대표님, 조철현 상무님은 이미 중국을 한차례 다녀온 뒤 너무 멋지고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낼 듯이 흥분해 있던 터였다. “이걸 몰라주네!”라며 의기소침해 있던 어느 날, 언제나 기발한 기획을 내놓던 조 상무님이 이준익 대표님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투자도 안 되는 <아나키스트> 붙들고 거시기(조 상무님은 늘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 허덜 말고 ‘백제의 마지막 날’을 소재로 史劇영화 한편 맹글면 어쩌것소이. 계백장군, 의자왕, 김유신, 화랭이 관창 나오는 황산벌 전투 야그 안 있소….” 조 상무님이 던진 말에 살 붙여서 물건 만드는 데 선수인 이준익 사장님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황산벌이 어디요?” 하셨다. “충남 연산군인가 연무대인가, 긍께 거시기 논산훈련소 근처라든디…” 라며 말끝을 흐리고 계신데 “지금 거기 갑시다” 그러면서 이미 몸은 문 밖으로 반이 나간 상태였다.

핑 연산군으로 내려가 허탕, 막상 황산벌에 가보니 암것도 없고 그냥 아스팔트 국도랑 철길이랑 지나가는 평범헌 논밭 만나 허탈, 인근의 계백장군 가묘, 공주, 부여, 익산 등지로 돌아다니며 사진도 찍고 현지인들 이야기도 듣고 논산의 계백장군 묘 관리허는 할아버지에게 고대(古代)의 병법 듣고 고개를 끄덕끄덕 했단다. 이 할아버지의 기가 막힌 설명을 들어보라!

“동서양 불문허고 옛날 전쟁은 정면에 적을 두고 돌아가는 벱은 없는 것이여. 앞에 있는 적군은 무조건 까부시고 지나가야 헌다 이 말이제. 전쟁에서 젤로 중요헌게 뭐라고 생각허능가? 보급과 병참이여. 군사 쪽수나 무기, 전략전술은 낸중 문제라 이 말이여. 수양제나 당태종이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수차례 침공혔다가 줄줄이 깨진 이유가 뭣이것능가? 수나라 당나라가 뭣이여, 오늘날의 미국이 아니것어. 무기가 후졌겠어, 전략이 후졌겠어. 모도다 당시로는 최첨단 아니었것냐 이 말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고구려 헌티 깨졌느냐. 그것은 바로 보급선이 끊겼기 때문이라 이 말이제. 알아묵것는가? 전쟁은 시작도 끝도 보급과 병참이라 이거여. 시쳇말로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 아니것어. 보급 끊기면 나폴레옹 아니라 김유신 할애비도 끝장나는겨. 굶어 디지고 얼어 디지고 도망가다 맞아 디지는겨, 이거 남부군 빨치산 야그가 아녀. 알것제?”

서울로 돌아와 일연의 <삼국유사>,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화랑세기>, 삼국시대 실생활과 풍속에 관련한 책들, 중국, 일본 사서들, 정사, 야사 등등을 모조리 독파하신 조철현 상무님은 이미 줄거리를 머리에 줄줄이 꿰고 계셨다.

그렇게 광분하고 흥분하다가 어느 날, <아나키스트>에 전액투자를 한다는 코리아픽쳐스의 김동주(나와는 오랜 친구요, 회사와는 두터운 친분이 있는 현재 (주)쇼이스트 대표) 대표의 등장과 동시에 광분했던 <황산벌>은 어느새 “나가 있어!”가 됐다. “쳇, 내 원 기가 막혀서… 하튼 냄비야, 냄비!!.” 기획도 잘하지만 접기도 엄청 잘하는 두 사람, 어쨌든 하루하루가 이벤트니 지루할 틈은 정말 없었던 회사였다. 이미 6년 전에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가 접은 뒤 <아나키스트> <공포택시> <달마야 놀자>까지 마치고 2003년 10월17에 개봉을 하게 된 <황산벌>은 씨네월드의 역사이기도 하며 나에게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날” 정도의 가슴 벅찬 일이다.

#2 ▶ “경험 있는 이사장이 감독하시랑께!”

감독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였던지라 감독이 결정된 사연도 2박3일을 꼬박 화장실만 가고 들려줘야 할 만큼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다. “너무 재밌는데 부담스러워서”, “준비 중인 영화가 있어서”, “기획이 너무 좋아서… 자신 없네요”, “저도 사극 하나 하거든요?”, “제가 코미디를 몰라요”, “딴 거 하나 하고 오면 안 돼요?”… . 매너 좋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드는 참으로 사연도 많은 거절이었다. 결국은 7명에게 거절당하고 엄청 애를 먹고 있었다. 늘 자체 기획으로 영화를 만들어오던 씨네월드가 넘어야 할 첫 번째 산은 언제나 “감독은 누가 할 것인가”였다.

기획하며 써놓은 <간첩 리철진> 초고로 장진 감독을 섭외했었고, 사찰헌팅도 끝낸 뒤 <아나키스트>의 조감독 출신인 박철관 감독을 데뷔시켰던 <달마야 놀자> 때도 그랬다. 언제나 감독 모셔오기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골 아프고 독특한 영화 <황산벌>에선 더더욱 힘들었으며 고민의 시간도 꽤나 길었다.

어느 날 마치 경제적으로 어려운 회사의 운명을 반전시키는데 본인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는 결심이라도 한 듯 이준익 대표가 말을 꺼냈다. “이준익, 조철현 공동감독 어때요? 우리 둘이 합시다!”

“그런 저런 모든 상황면에서 경험이 아무래도 쪼까 있는 사람이 나을 테니 이사장이 혼자 하시랑께, 나가 써포트는 확실하게 헐팅께”라며 조철현 상무님은 맞장구를 친 뒤 꼬리를 감추셨다. 완전히 형님 먼저, 아우 먼저였다. 그런 두분을 보던 나, 그냥 못 넘어가고 “지금 <여고괴담2> 흉내내세요?”라며 “사장님께서 하시죠” 했다. 결국 그 누구도 아닌 아주 오래전에 <키드캅>을 만들어 데뷔작이 은퇴작이 될 뻔했던 이준익 감독이 감독을 하기로 결정됐다. 판단력 빠르고 성격 급한 그 양반의 눈부신 전쟁터 활약상, 결과적으로 정말 감독 선택을 잘했다는 생각을 두고두고 모두가 하게 됐다.

#3 ▶ 2003년 2월1일 새벽 0시25분… 박중훈, 안 하지 않을 거지?

영화의 반은 캐스팅에서 결정난다는데 김유신 역을 하기로 한 정진영씨가 <와일드카드>를 찍으러 가야 했고 박중훈을 추진하던 중 어려움이 생겨 결국 캐스팅 때문에 1년이 다시 미루어졌다. 무대뽀 정신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우리는 1년 뒤, 심기일전에 재충전해서 박중훈과 정진영 이외의 사람에게는 눈도 돌리지 않고 들에게 돌진했다. 정진영 결정하여 스케줄 관리 들어가고, 2개월 동안을 예민하고 논리적이고 똑똑하고 할리우드 입성해 개런티 측정 전선에 이상이 생긴 박중훈을 상대로 나 정말 고생(?)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박중훈 선수의 “계백, 안 하지 않을게”라는 통보를 받았다. 기획하던 6년 전부터 철없이(?) 감상적인 두 어른 모시고 지금까지 겁나게 했던 고생들이 모두 씻겨내려가는 듯 기뻤다. “박중훈 캐스팅은 꼭 정 이사가 해오시오!”라는 압박과 스트레스를 지나 오로지 진심 하나로 접근해 “안 하지 않을게!”라는 박중훈의 대답을 받아낸 것.

오랜 기다림(2002년부터 하면 1년이 넘는다), 국경을 초월한 여러 번의 통화, 좁혀지지 않던 여러 개의 산을 넘고 넘은 고난의 길이었다. 캐스팅이 안 되면 영화제작 자체가 위태로웠던 상황의 위기를 넘기고 원했던 캐스팅을 해낸 그날 밤, 나의 일기는 단 한줄이었다. “박중훈, 딱 걸렸어!! 흐흐흐….”

#4 ▶ 성질 급한 두 남자의 대화, “잘 찍을 거지?”“돈 댈 테니, 배급도 당신이 하고 영화 잘 찍어줘!!”

박중훈도 결정되고 1년간을 한결같이 믿음과 신뢰로 이미 김유신이 되어 있던 정진영, 회사와의 친밀한 관계로 기꺼이 출연을 결정해주신 오지명 선생님…. 우린 좌청룡에 우백호까지 얻었지만 결정적인 메인 투자자가 나서지 않아 2% 부족한 얼굴로 인상을 구기며 살고 있었다. 시나리오는 이미 1년 전에 나온 상태여서 대한민국 영화계는 물론 방송계까지 “<황산벌> 시나리오 안 읽은 사람 여기 붙어라, 내가 보여줄게” 수준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고 심지어 방송사 코미디 프로들은 앞을 다투어 <황산벌> 시나리오에서 얻은 힌트로 코너를 만들어 히트를 치고 있었다. 마지막 언덕에 선 우리, 투자가 다 된 양 크랭크인 날짜 잡아놓고 배짱으로 견디고 있는데 강우석 감독님이 뛰어 올라오셨다. 아래는 두 사람의 짧고도 간결한 투자결정 대화다(참고로 두분은 영화계 오랜 친구이며 <간첩 리철진>으로 강우석 감독님은 한번 투자를 해주기도 했었다).

강우석/ 배급, 꼭 해야 되지?

이준익/ 응!

강우석/ 잘 찍을 거지?

이준익/ 다 안 한다고 해서 내가 하는 거야. 에이 씨, 나도 몰라!(참 이준익 감독다운 대답이었지.)

강우석/ 내가 돈 100% 댈게. 배급도 직접 해. 저녁 때 술 한잔 하게 나와!!

이준익/ 고맙네!!

그야말로 5분 만에 이루어진 아쌀한 투자결정, 마치 치밀하고 논리적인 김유신과 전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의 계백이 만나는 자리 같았다. 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PS: 돌아서시던 강우석 감독님이 나에게 슬쩍 한마디 던졌다. “정승혜, 나 멋지냐?”

글: 정승혜/ 씨네월드 제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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