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황산벌> 제작기 [2]
2003-10-17

#5 ▶ “사투리에 능한자 우대, 숙식제공”

“캐스팅도 다 했고 이제 슬슬 전쟁 혀야제!”

거시기 역의 이문식, 의자왕에 오지명, 계백 처에 김선아…. 그리고 류승수, 이원종의 기꺼이 특별출연, 김승우, 신현준 즐거운 우정출연…. 이렇게 원하는 대로 되는 거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모든 것이 잘 진행되었다. 분에 넘치게 좋은 주연급 배우들로 캐스팅 윤곽이 잡히고 대사 있는 역할만 60여명이 필요해 불가피하게 오디션을 봐야 했다.

과감히 신인배우들로 포진하자는 전략을 세운 뒤 500여명의 지원자 중 추리고 추린 250여명의 연기를 꼬박 열흘간 심사했다. “사투리에 능한 자 우대, 숙식제공”. 이 한줄에 몰려든 배우들의 열렬한 응원과 노력은 제작진에게 커다란 힘이 되었다. 사실 사투리는 표현의 방식일 뿐 무조건 사투리를 잘한다고 뽑는 대신 열정이 살아 있는 배우들로 선발했다. 이른바 엑기스 천군만마인 그들은 끝까지 주연들을 긴장시키면서 ‘참여영화’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시끌벅적 즐거웠던 오디션을 끝마치고 긴 싸움을 잘 치르기 위해 백제는 백제끼리, 신라는 신라끼리 합숙 훈련에 들어갔고 제작진은 양쪽의 전략을 일부러 조금씩 흘려대며 잔머리를 굴렸다. 틈나는 대로 “백제 병사들, 장난 아니게 연습하던데?”, “와, 신라가 개발해낸 욕 들어봤어?”, “백제는 전라도로 어학연수 갔다는디?!”, “신라병들, 일주일째 대학로 연습실에서 산대”라며 양쪽의 사기를 올렸다. 참, 우리도 못됐지…. 묘한 질투에 경쟁심 유발, 이간질로 미리 전쟁을 부추긴 셈이다.

#6 ▶ 거시기 때문에 영화를 못 찍는구만

“나 쪄죽으면 눈밭에다 묻어줘!” 더워서 미치고, “왜 이리 비니?” 비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되고….

4월31일 양수리 세트장에서 크랭크인을 하면서 스탭들끼리, 부여 세트장 지으면서 무사고를 기원하는 현장 아저씨들과 상량식을, 서울 손님과 부여 군민 함께 모여 제작발표회를 겸해 대대적으로…. 총 3회에 걸친 고사를 지내고 본격 촬영에 들어갔다. 입으면 하루 만에 무조건 2kg이 빠진다는 공포의 갑옷을 입고 30도 날씨를 견뎌낸 모두의 피부색은 점점 블랙커피가 되어갔고 7∼8월을 통과하는 촬영의 절정에 기대(?) 이상의 장마로 촬영에 차질이 생겼다.

하늘 바라보며 원망하고 시간이 많아지니 숙소에 눌러앉아 틈틈히 술 마실 일만 많아졌다. 평소 소주 한잔에 얼굴이 토마토가 되던 이준익 감독님은 주량이 소주 한병으로 늘어나 “안 마시면 잠이 안 온다∼”며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다. 정진영 역시 부여강가에서 시조를 읊으면서 술 마시는 법까지 터득하야 슬슬 야인이 되어갔다. 스케줄 빼기 가장 힘들었던 거시기 역의 이문식, 일주일에 한번 현장에 겨우 오는데 혼자서 기우제를 지내고 오는지 그가 오면 늘 비가 따라와 언제나 밥만 축내고 돌아갔다. 평소에 그와 친했던 나는 구박과 닦달을 일삼으며 문식씨를 괴롭혔다.

“우쒸∼거시기 때문에 영화를 못 찍어! 오 피디! 머시기로 바꿔버려라!"

#7 ▶ 1인3역은 기본, 노가다는 선택?

부지런한 감독님이랑 작업하면 손, 발, 머리가 다 고생한다네∼ 놀면 모해, 뛰랑께!

촬영 막바지에 열흘간 진행된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총공격신을 보느라 현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진흙탕에서 치열하게 뒹굴며 싸우는 신인데 엄청 고난도 였다. 진흙을 온몸에 바르고 묻히고 서서히 익숙한 얼굴들이 하나하나 죽어가는 신이었다. 자기가 방금 죽었다며 신라 병사 한 사람이 “이사님, 저 방금 죽었어요! 너무 슬픕니다요. 흑흑!” 했다.

어깨를 두드려주며 “수고했어요! 서운하죠?” 이러며 위로하고 있는데 목에 수건을 두르고 진두지휘하던, 누가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보는 감독님, “야, 석환이 거기서 뭐해! 빨리 목책 위에 올라가서 진흙 던져!”라고 그를 불렀다.

방금 죽어서 슬프다던 그 배우, “넵!” 소리치며 두말없이 뛰어올라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뭉친 진흙을 던졌다. 가만보니 카메라를 잡은 촬영파트만 빼고는 현장에서 모두들 흙 나르고 진흙 던지고 그야말로 난리였다. 심지어 조명기사, 동시녹음 기사도 자리를 이탈해 온몸을 쓰며 현장을 뛰어다녔다. “감독님이 워낙 부지런하셔서 우리가 가만 있으면 노는 거 같다니까요…”라며 몸을 쓰는 힘겨운 노동도 즐거워하는 그들은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들이었다.

마치 걸어다니면 어디서 화살이라도 날아온다는 듯이 엄청 발빠르게 움직였다. 1인3역은 기본에다 대사 있는 현장 연기로 갑옷을 입었던 스탭만 줄잡아도 열명이 넘었다. 자의든 타의든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고생에 온몸을 던져주었다는 것에 언제나 고맙고 감사했다. 잘해주는 것도 없는 제작자 겸 거의 신인감독인 이준익 사장님의 넘치는 인복. 인복도 능력이라면 이준익 감독은 충무로 최고의 실력자다?

#8 ▶ 독수리 5형제 고마워!

보조 줄연자만 2천여명 등장, 하루만 찍어도 갈 때는 모두다 “내 다시 오면 새대가립니더!”

억만금을 준대도 싫은 놈과는 연애를 못하듯이 천만금을 준대도 불가마에서 갑옷 입고 뛰어다니는 일은 못할 것이다. 전쟁영화니 당연히 엑스트라는 많이 동원되어야 했다. 시간이 지나 촬영 막바지이며 엑스트라가 가장 필요한 총공격신을 찍던 8월 초경에는 전주의 각종 엑스트라조합에 가입되어 있는 보조 출연자들 사이에서도 <황산벌>이 기피 영화로 낙인찍혔다. 촬영 도중 갑옷을 벗어던지고 도망갈까봐 걱정했었지만 실제로 부딪힌 현실은 더 심각했다. 올 때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생글생글한 얼굴들이 갈 때는 침만 안 뱉었지 이쪽으로는 고개도 안 돌리겠다는 표정으로 치를 떨며 앞을 다투어 도망들을 쳤다. 정말 그들의 마음은 29000% 동의한다. 보고만 있어도 미쳐버릴 광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날그날 촬영이 끝나면 기존의 배우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고생하셨습니다. 또, 오세요!”라고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를 했다. 1일 개런티에 더 많은 웃돈을 얹어주고 사우나비까지 쥐어줬지만 다음날 다시 오겠다는 사람은 100명에 5명도 안 됐다. 그러나… 거기에 일명 ‘독수리 5형제’가 있었으니 “황산벌은 저희들이 지키겠습니다!”라는 황산벌 폐인 5명이 바로 그들이다. 언제나 촬영장에 와주었고 결국엔 감독의 눈에 띄어 한컷 잡히는 특별우대도 받은 청년들이었다. 정말 <황산벌>엔 특별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 고마움을 다 전할 수조차 없다.

#9 ▶ 최고 개런티, 최고 대우를 받은 스타는?

영화 속에서 가장 비싼 개런티, 밤마다 놀아줘야 했고, 특별관리가 필요했던 최고의 배우!

세명의 장정이 매일 밤 돌아가며 지켜야 했던, 비가 오면 비 맞을세라, 컨디션 안 좋으면 촬영에 지장 줄까봐 언제나 보듬고 다듬고 촬영이 끝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보호한 배우가 있었으니 바로 부여의 오픈세트. 2만여평의 부여 벌판에 지어진 이 오픈 세트장은 영화 전체 분량의 70%를 책임진 만큼 10억원의 예산이 투여되어 그 규모나 위용면에서도 놀라운 시각적 만족감을 준다. 모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것도 이 세트였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3개월간 함께 지낸 세트를 떠나며 스탭과 배우들은 마치 단칸방에서 고생하다가 아파트 당첨되어 이사하는 신혼부부가 세들어 살면서 정들었던 집을 떠나는 기분으로 서운해하고 아쉬워했다. 귀신이 산다고도, 남녀의 데이트 하는 소리가 밤마다 소곤소곤 들린다고도, 누군가가 어깨를 자꾸 잡아당긴다고도 했던 사연 많은 공간을 떠나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막상 돈들여서 다시 철거해야 하는 게 더 문제인 이 공간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모하고 저돌적이지만 순수했던 꿈과 도전을 이루어지게 해주었던 곳, “영화 <황산벌> 최고의 일등공신은 세트, 바로 너였단다!”

#10 ▶ 박중훈과 히딩크, 한 여자에게 당하다?

영화 맛보기 겸 이벤트인 쇼케이스 행사장에 나타난 묘령의 여인에 모두 초긴장하다!

내게는 최고로 뛰어나고 든든한 멤버인 우리 마케팅팀엔 추진력이 뛰어난 원정심 팀장, 넘치는 열정의 김지나씨, 차분한 조율사 유세은씨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사무실을 지키며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 힘차게 실행에 옮기는 천하무적의 팀이다. 이벤트 중의 하나인 ‘쇼케이스’ 행사를 위해 강남의 모 레스토랑에서 주연배우들과 일반인 100여명을 초대했다. 음악도 들려주고 맛보기로 영화도 조금 보여주며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을 무렵,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이 벌어졌다.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팔랑팔랑 야들야들 등장한 한 여인이 조용히 박중훈 곁으로 다가가 앉아서는 멀리서 박중훈씨를 만나러 왔다고 5분만 얘기를 하자고 했다. 우리 모두는 예기치 못한 사건에 뜨악, 매니저를 불러 그녀를 진정시키고 박중훈은 그 자리를 떠나 별도의 자리에서 인터뷰를 했다. 5년 전에 박중훈에게 처음 나타난 뒤 간간이 모습을 드러냈다던 광팬인 그녀 이야기는 다음날 스포츠지 1면엔 “5년간 스토킹에 시달려온 박중훈!” 운운하는 기사로 장식됐다. 한밤중의 스토커 해프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다음날, 상상도 못할 더 큰 충격과 만났다.

“박중훈과 히딩크, 한 여자에게 당했다!”라는 1면을 꽉 채운 기사였다. 히딩크와 월드컵이 나라를 들썩거리게 할 때 공항에 나타나 돌연 히딩크에게 키스세례를 퍼붓고 사라진 그녀와 동일인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정말 배를 잡고 웃었던 가장 쇼킹한 해프닝이 아니었나 싶다. “음… 박중훈 선수, 히딩크랑 동급이야!”라며 두고두고 놀려먹었다.

에필로그

누구도 본 적 없는 660년의 어느 전쟁터의 재현, 그곳에서 고생한 스탭들과 배우들, 35억원에 찍겠다고 시작해 약속을 지킨 자랑할 만한 프로덕션, 늘 위험의 중심에 있으면서 큰 사고없이 52회차로 촬영을 끝낼 수 있었던 행운, 끝까지 믿어준 투자사…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열심히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 영화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관객을 만나기 위한 마지막 끝에 서 있다. 현장에서 고생한 사람의 목소리여야 진정한 프로덕션 노트가 되겠지만 어쩌다보니 영화 <황산벌>의 제작이사로서 고생했던 모두를 대신해 이 글을 쓰게 됐다.

가끔 대책없는 낭만주의자이신 두분을 모시고 소중한 식구들과 함께 작지만 행복한 회사인 씨네월드를 난 벌써 12년째 다니고 있다. 여전히 잘 모르겠는 ‘영화’로 정말로 두려운 사람들인 ‘관객’과 만나고 있다. 좀 부족하다 하더라도 이번 영화 <황산벌>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그렇듯이 열심히 만들었기 때문이다.

글: 정승혜/ 씨네월드 제작이사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