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우연히 김기덕 감독님을 ‘구경’할 수 있었다. 친구들에게 자랑하기 위해 재빨리 사진도 한장 찍었다. 영화제 일정을 매일 디카로 찍어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있었는데, 배우나 유명인사의 사진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다고 나를 압박하던 차였다. 감독님은 선선히 포즈를 취해주셨고, 그러는 와중에 잊고 있던 한편의 영화가 생각났다. 만일 그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내인생의 영화>에서 이 영화를 떠올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명색이 시나리오 작가인 나는 그러나 지극히 평범하고 대중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 마니아들이 줄줄 외는 고전, 혹은 걸작으로 불리는 작품성 있는 영화들은 아예 기억 속에 없다. 어두컴컴한 시사실에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감독의 고뇌를 억지로 머릿속에 쑤셔넣기보다는, 쾌적한 영화관에 앉아 액션영화를 보며 박수를 치고 러브스토리를 보며 훌쩍대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라는 인간이 그다지 깊이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한(또는 포기한) 까닭이다. 나에게 영화는 언제나 두 가지로 명쾌하게 구분되었던 것이다. ‘재미있거나, 아니거나’(오해는 하지 말자. ‘재미있는’ 영화, 즉 잘 만든 상업영화가 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자연히 심각하거나 불편한 주제를 다루는 영화는 멀리하게 되었는데, 그런 내가 어떤 우연으로 <파란 대문>이란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일단 주인공이 ‘창녀’라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과연 매춘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가 아닌가에서부터, 이건 영화에 몰두하기 전부터 미리 입장 정리를 해두어야 하는 부분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뒤이어 영화에서는 한 여성에 대한 여러 남성들의 노골적인 폭력이 이어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동시에 그녀를 안기도 하며, 한술 더떠 우정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창녀의 친구인 여대생이 그녀를 대신해서 몸을 팔기까지 한다! 흠칫!
으윽! 이건 정녕 내 수준을 넘어서는 이야기군, 미쳤지 미쳤어, 왜 사서 이 고생일까? 차라리 비디오로 <인어공주>나 한번 더 보는 건데….
그렇게 억지로 불편감을 인내하며 드디어 엔딩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두 주인공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갑자기 화면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 흰 눈이었다. 영화 속 계절은 분명 여름이었건만, 하늘에서 눈이 내렸던 것이다. 순간, 스크린 속 장면들이 눈앞으로 크게 다가오더니 그대로 가슴속에 박혀버렸다.
그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세상의 한쪽 어딘가에서는 분명 그러한 폭력이 이루어지고 있고, 또 한쪽 어디에선가는 한여름에 눈이 내리기도 한다. 그것은 옳다 그르다, 재미있다 없다를 넘어선 곳에 있는 이야기였다. 문득, 세상의 비밀을 잠깐 엿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김기덕 감독님의 팬이 되었습니다”로 마무리지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그분의 영화는 잘 보지 않고 있다(솔직히 <섬>까지는 봤는데, 영화를 보는 도중 심장이 죄어오다 못해 현기증까지 일어났다. 다시는 안 보리라 생각했다. 정말 적응 안 되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파란 대문>은, 불가해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자화상을 이상한 아름다움으로 그려낸 영화로,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명작 <인어공주>와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추신1: 조금 늦었지만,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자원봉사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특히 이상민군, 하혜정양께 감사드립니다. 곧 사진 보내줄게요. 추신2: <파란 대문>을 만든 제작사는 ‘부귀영화’라고 한다. 아, ‘부귀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