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찍는 행위의 아버지
<내가 여자가 된 날> <칠판> <사랑의 시간>이 잇따라 개봉한다. 알려진 대로 이 영화들은 마흐말바프 가족의 영화이다. 온 가족이 영화를 만드는 희귀한 사례로 이들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들의 영화 만들기는 이제 단순한 가십을 넘어섰다. 그 성공의 추동력을 아버지, 교육자, 감독으로서의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통해 다시 생각해본다.
부산영화제에 참석하기 직전에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개에 물렸다.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그 개가 불쌍해서 음식을 먹이려다 오히려 손가락을 물렸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아직도 광견병이 치명적인 이란의 테헤란에서 개에 물린다는 것은 목숨을 위협당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모흐센은 다음날 그 개가 다시 눈에 보이자 이번에는 장갑을 끼고 다가가 음식을 주었다. 이 일화를 들려주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되물었다. 우리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의사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가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모흐센은 결단코 한국에 왔고, 포탄과 지뢰에 팔다리가 잘려나간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교육을 돕기 위해 편치 않은 몸으로 남포동 한가운데에서 ‘사랑의 펜 모으기 행사’를 벌였다. 선의지란 칸트의 책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말릴 길 없는 그 살아 있는 행위에 있는 것이다.
민주적인 아버지이며 교육자
탈레반 정권 이후 최초의 아프가니스탄영화를 완성한 <오사마>의 세디그 바르막 감독은 이 영화의 공동제작자이자 지원자인 모흐센을 “위대한 감독이기 이전에 위대한 인간”이라고 불렀다. 모흐센이 그런 표현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눈물’을 영화로 만드는 용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모두가 흘릴 수는 있지만, 그러나 선뜻 영화로 만들어내지는 못하는 그것을 모흐센은 카메라에 담는다. “아버지가 <칸다하르>를 찍을 때 따라갔었다. 아버지는 식당에 들어가서는 며칠씩 굶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먹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셨다.” 그것이 막내딸 하나 마흐말바프가 기억하는 ‘인간’ 모흐센의 모습이다.
이제 그의 가족, 마흐말바프가의 모든 식구들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되새겨질 일이 아니다. 어머니 마르지예 메쉬키니는 <내가 여자가 된 날>이라는 아름다운 영화로 데뷔했다. 큰딸 사미라는 <사과>에 이어 <칠판>으로 20살에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고, <오후 5시>로 심사위원상을 연이어 받았다. 막내딸 하나는 <오후 5시>의 캐스팅 과정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은 다큐멘터리 <광기의 즐거움>으로 14살의 나이로 베니스의 초청장을 받았다. 그리고 아들 메이삼은 이미 몇편의 영화를 통해 그들 영화에 없어서는 안 될 편집기사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온 가족이 영화를 만든다는 이 익숙해진 신기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가 지금으로선 중요하다. 여과없이 그 점은 모흐센에게서 출발한다. ‘민주적인’ 아버지이며 교육자이며 감독인 모흐센에게서.
모흐센은 <순수의 순간>(1996)을 만들고 난 뒤 위기에 봉착한다. 정부는 그의 영화 일부를 잘라낼 것을 요구했다. <순수의 순간>은 집을 저당잡히고 빚을 끌어들여 만든 영화였기 때문에, 정부의 요구를 거부한다는 것은 상영불가를 의미했고, 그것은 곧 집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전제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물었다. “우리의 집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사유와 예술을 지킬 것인가.” 만장일치로 선택된 것은 사유와 예술에 대한 신념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마흐말바프필름하우스’라는 제작사가 생겨난 것이다. 그때부터 제작하는 모든 영화에 그 이름을 달았고, 또 그 이름을 통해 팔았다. 모흐센은 가족의 생각을 거스르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가장이기보다는 일원으로 행동했다. 어린 막내딸의 의견까지도 수렴했다. 평소 그의 신념대로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결단을 지은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것의 일부였다”는 큰딸 사미라의 말은 그 절차에 대한 완벽한 동의인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가
마흐말바프필름하우스와 함께 출발한 것이 바로 마흐말바프영화학교이다. “사실상, 마흐말바프필름하우스는 마흐말바프영화학교의 제작부문이었다. 한 집안에 제작회사와 학교를 동시에 설립한 것이다.” 모흐센은 이렇게 말한다. 기존의 제도권 학교의 방침을 벗어던진 마흐말바프영화학교는 한달에 한 주제에만 매달려 심도를 깊이 했고, 영화뿐만 아니라 삶과 인성에 필요한 훈련들을 토론과 의향 속에서 자유롭게 가르쳤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으며 지루해하지 않았다. 하루에 8시간 내지 16시간까지 배워가며 얻어낸 결과들이 사미라의 <사과>와 <칠판>이었고, 하나의 <광기의 즐거움>이었다. 6년의 제한을 두고 시작했던 마흐말바프영화학교는 이제 문을 닫았다. 8명의 학생을 놓고 가르쳤던 그 학교는 촬영기사와 녹음기사, 세트 디자이너, 감독, 사진가와 편집기사를 배출했다. 그 결과 20살짜리가 감독상을 타고, 14살짜리가 최연소로 3대 국제영화제 중 한곳에 초청을 받는 놀랄 만한 기적을 이뤄냈다. 그러나 이것은 운이 아니라 성과였다. 운좋은 천재들의 집단이 출현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하나가 페르시안어와 영어, 프랑스어로 낸 시집(마흐말바프 학교에서는 외국어도 가르쳤다)에 들어 있는 모흐센의 격려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누군가가 나의 가족이나 나를 천재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정말 미칠 만큼 화가 난다. 내게 그 말은 발전하고자 하는 욕망뿐만 아니라, 그 교육과 고된 작업의 역할까지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교육’의 중요성이다.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배워야 할 것인가에 대한 원칙이다. 마흐말바프영화학교는 그 점에 대한 토대였던 셈이다.
민주적인 아버지이며 교육자인 모흐센은 무엇보다도 20여편의 작품을 만든 이란의 거장 ‘감독’이다. 메르지예 메쉬키니의 <내가 여자가 된 날>과 사미라의 세편의 영화 <사과> <칠판> <오후 5시>의 시나리오 작업에도 모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영화의 스타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시나리오를 같이 쓰긴 하지만 그들이 지닌 시각과 견해를 단지 들어주면서 넓혀주는 것 그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흐센의 가족들은 그의 영화가 지닌 특징들을 자연스럽게 나누어 갖는다.
이제는 여자가 되어 전날 놀던 남자친구와도 어울릴 수 없는 소녀, 무작정 내리라고 소리치는 남편과 아버지와 오빠의 강압에도 자전거 경주를 멈추지 않는 젊은 부인, 그리고 마지막 희망을 찾아 바다 위에 뗏목을 띄우고 평화롭게 떠나가는 할머니. 이 세명의 인물에 관한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내가 여자가 된 날>은 일종의 알레고리를 형성하며 이란에서의 여성의 일생을 하루로 ‘정지’시킨다. <내가 여자가 된 날>은 모흐센이 종종 사용하는 그 겹침(혹은 순간의 정지)의 영화적 형식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다. 한편, 실제 이란에서 벌어진 사건을 영화로 만든 사미라의 <사과>는 모흐센이 <사이클리스트>(1987)의 영감을 실제에서 얻었듯 현실을 주목한 것이다. 또한, 커다란 칠판을 등에 지고 산골 마을을 돌며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칠판>은 그의 아버지의 영화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워온 것임을 내비친다. 그리고 하나의 다큐멘터리 <광기의 즐거움>은 한 영화 안에서 다른 영화를 만들어내는 모흐센의 방식을 섭렵한 결과이다.
“왜 마흐말바프라고 거짓말을 했습니까?”
“그건… 그분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화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 전 걱정이 생기고 우울해지면 뭔가를 필요로 합니다.
제게는 가슴속의 분노와 슬픔을 들어주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러다가 제 고통을 표현해주는 좋은 사람을 찾게 됐습니다.
바로 마흐말바프 감독님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영화를 자꾸 보게 됐습니다.
그분은 타인의 삶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용기있는 감독입니다.”
- 영화 <클로즈 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