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급과 B급영화 사이의 모호한 욕망, 영화평론가 변성찬이 만난 감독 박찬욱
지난해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에 당선된 영화평론가 변성찬씨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나서부터 영화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우연히 극장에서 <공동경비구역 JSA>를 보고 할리우드 콤플렉스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평론이라는 것이 풍부한 텍스트가 있어야 가능한데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로 새로운 한국 감독들에 주목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그가 박찬욱 감독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씨네21>은 변성찬씨에게 박찬욱 영화에 대한 꼼꼼한 질문을 부탁했고 지난 11월25일 박찬욱 감독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마치 정신분석 상담받는 것 같다”는 박찬욱 감독의 표현대로 박찬욱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2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소개한다.
박찬욱 감독과의 인터뷰를 앞두고 마음속에 생긴 두 가지 짐. 첫째, <올드보이>는 사전에 ‘말이 많은 것’이 관객에게 죄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영화이다. 그것을 잘 알면서 다시 한번 그 죄를 저질러야 하는 딜레마. 최대한 죄질을 경감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전작들을 통해서 <올드보이>에 도달하는 우회로를 선택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 두 번째 짐. 감독 박찬욱은 그의 영화만큼이나 중의적이고 모호한 화법을 즐긴다. 그 모호함의 장벽을 뚫고 진짜 그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장벽을 뚫기 위해서는 때로 긴 질문에 짧을 답변을 ‘강요’하는 무리도 감수해야 한다고 다짐한다(과연 그것이, 마음속의 상상훈련대로 잘될까?)
변 | 개봉 뒤 관객이 보여주고 있는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 |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지는 못했다. 언론 시사, VIP 시사만 보았는데 다들 너무 조용하고 웃지도 않고 해서 조금 걱정했다. 다행히 일반 관객은 많이 웃기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웃기려고 만든 부분에서 안 웃고 그러면, 세상에 그것처럼 비참한 게 어디 있겠나? (웃음) 사실, <복수는 나의 것> 때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아서, 홈페이지도 잘 안 본다. 흥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출발은 좋다고 전해 들었다. 도덕성 문제가 있기는 한데, 나는 그렇게 크게 문제되지 않을 거라고 봤다. 그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더하고 제작자쪽에서 우려했던 것보다는 조금 덜한, 그런 정도인 것 같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고, 한국사회가 그 정도는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문어체 대사를 즐겨쓰는 박찬욱
변 | <올드보이>는 많은 부분, 당신의 전작들을 상기시킨다. 가령 (1997)의 그 다소 어색한 문어체 대사, 프리즈 숏 같은 만화적 표현 등등….
박 | 같은 것이 보였다는 얘기는 허진호 감독도 하더라. 그래서 내가 만든 영화들의 결산처럼 보였다고. 틀리든 맞든, 아무도 거론하지 않은 영화를 얘기해주니까 고맙더라. 하지만 허 감독은 역시 자기 취향에 맞는 영화는 아니라고 그랬다. (웃음)
변 | 문어체 대사를 즐겨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박 | 촌스러운 문어체 대사, 나는 그걸 참 좋아한다. 우수한 한국영화에서는 늘 그런 면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영화들은 대부분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스스로 생활 속에서 그런 문어체 대사를 잘 쓴다. 일상언어에서의 자연스러움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그런 느낌들이 있다. 어쨌든 그런 대사들을 자꾸 쓰게 된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변 | 내게 한마디로 당신의 영화스타일을 요약하라고 하면, 바로 그 ‘어색한 문어체 대사’라고 대답할 것 같다. 그것은 단순히 상황과 말투의 부조화에서 오는 코믹 효과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영화에 대한 당신의 어떤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때로 그것은 웃기는 방식으로 진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진심을 들키지 않으려고 취하는 위악적 제스처로 보이기도 한다.
박 | 그렇다. 그런데 왜 그런 거냐고? 그것은 그냥 내가 기질상으로 마냥 심각해지는 것을 못 견뎌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자신이 아주 심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어느 정도를 지나치면 못 견딜 만큼 쑥스러워진다. 말하자면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비분강개하고 그런 부분이 있기도 한데, 그것이 계속되면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객관화되면서 그냥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를 볼 때도 <허공에의 질주> 같은 영화를 울면서 보기는 하지만, 그래도 계속 그렇게 가는 것을 좋아할 수는 없다. 영화를 만들 때도 그런 상황이 지속될 때는 왠지 거북해지고 속내를 들키는 것 같고 뭔가 발가벗겨지는 느낌이 들어서 그냥 웃자고 하는 소리였어 하는 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변 | 그런 모습이 당신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완전히 옷벗은 모습을 보여줄 때만이 줄 수 있는 그런 감동이 있는 것 아닌가? 가령 <지구를 지켜라!>와 같은 영화에서 나는 그런 감동의 순간을 맛보았던 것 같다.
박 | <지구를 지켜라!>는 감독의 진심이 그대로 전달되면서도 재미있는 그런 영화다. 그 영화는 내가 여태까지 보았던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긴 하지만, 그런 영화를 나보고 만들라고 하면 못 만들 것 같다. 그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다. 나는 취향상 좀더 복잡하거나 미묘한 것이 더 좋다. 개인적 기질에서나, 내가 받은 교육을 통해 지니게 된 예술에 대한 개념에서나, 자꾸 모호하고 명쾌하지 않은 부분에 더 끌리게 되는 것 같다. 한 방향으로 막 몰아가다가도 중간에 한번 우뚝 서게 해서 잠깐 딴 얘기하고 그렇게 된다. <올드보이>에서 그런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경호실장이 “말로 하세요” 하고 말하는 그 장면이다. 내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인 것 같다. 더군다나 그게 말 많은 사람(말 많은 게 죄가 되었던 사람)에게 하는 대사라는 점이 내게는 재미있다… 재미있지 않나? (웃음)
<올드보이> 탄생의 비밀을 들키다
변 | 내가 보기에 <올드보이>는 과잉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복수는 나의 것>을 상기시키는 부분이 많은데, 두 작품을 하나로 엮는 것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 | <복수는 나의 것>을 상기시키는 부분이 많다고들 하는데, 원래는 그렇게 안 하려고 했다. 내 능력의 한계이기도 하고, 같은 사람이 만들다보니까 언뜻언뜻 그런 부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다. 나중에 편집하면서 오대수가 경호실장 귀를 찌르는 장면이 류가 송곳으로 목을 찌르는 장면과 너무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차 싶었다. 그게 참 이해가 안 될 거다. 자기가 만든 영화인데 어떻게 그걸 편집하면서야 알았을 수 있느냐고.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사실이다. 그렇게 많이 잊어버린다, 지난 영화들을…. 그런데 또 어떤 점이 그렇게 많이 닮아 보였나?
변 | 지그재그 계단 이미지라든지 특히 인물간의 구도가 매우 상동적이라고 느꼈다.
박 | 계단 이미지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 것이기는 하다.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좀더 전면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다. 높은 탑에 사는 우진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아예 로케이션 스카우팅을 할 때 계단이 많은 곳을 찾아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언뜻 드러난 것이 더 전면에 드러난 경우다. 인물 관계에 대해서는 애초에 원작이 두 남자의 대결과 그 한 남자에게 애인이 생기고 그런 설정이 있었던 것이니까…. 그게 이런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쉽기도 하고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하지 않은가?
변 |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가 아니라 하필이면 근친적 사랑이라는 점이 문제다.
박 | 그게 사실 <올드보이> 탄생의 비밀인데, 그걸 지난번에 <씨네21> 정한석 기자가 딱 지적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고. <올드보이>는 사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누나의 몸을 씻겨주는 장면하고, 딸의 유령이 다리로 아버지의 허리를 감는 장면, 그 두 장면에서 출발한 거다. 그건 나만 알고 있었으면 했었는데…. (웃음)
변 | <복수는 나의 것>에 이어 <올드보이>에서도 A급영화와 B급영화에 대한 감독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것 같다. 도대체 당신에게 B급영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박 | <복수는 나의 것>에서 A형 B형 얘기할 때 사실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다. 촬영을 하면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정도다. 내가 직접 나서서 B무비라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 적도 없다. 일단 제작자들이 기겁을 한다. (웃음) 데뷔작(<달은 해가 꾸는 꿈>(1992))부터 그것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고 그런 말 절대 안 쓰려고 한다. 내가 즐겨보는 영화 중에 그런 것이 많다는 정도지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자꾸 그런 식으로 몰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내가 스스로 무덤을 판 부분도 있다. 베스트 10 뽑아달라고 하면 그런 영화 많이 넣고 했으니까. 한데 내가 그런 영화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볼 때와 만들 때가 정말 다르다. 즐겨보기는 하지만, 만드는 것은 재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