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워킹 타이틀 대표작가 리처드 커티스 [1]
2003-12-12
글 : 듀나 (영화평론가·SF소설가)
면도날과 꽃다발로 세상을 그린다

<러브 액츄얼리>로 감독 데뷔한 워킹 타이틀 대표작가 리처드 커티스

세상에는 두 사람의 리처드 커티스가 있다. 한명은 <블랙애더> <미스터 빈> <디블리의 교구 목사>를 쓴 시트콤 전문작가이고 다른 한명은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의 각본을 쓴 로맨틱코미디 작가이다.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어색하고 이상하다. 한 작가가 텔레비전과 영화 모두를 넘나드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명의 작가가 쓴 각본들이 장르와 매체에 따라 극단적으로 다르다면 그건 신기하고 불편하다.

무자비한 블랙유머의 대명사

시트콤 작가 리처드 커티스는 냉정하고 무자비하며 영국적인 블랙유머에 강하다. 그의 대표적인 걸작 <블랙애더>를 보자. 그와 로완 앳킨슨, 벤 엘튼은 블랙애더라는 성을 가진 일련의 주인공들을 난처한 곤경 속에 밀어넣으며 (가상의) 리처드 4세 시절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영국 역사를 멋대로 두들겨부수고 모욕하고 겁탈했다. 그들은 이 우상 파괴적인 걸작 시리즈를 통해 인간들의 우매함이 얼마나 극단적인지, 어떻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어도 그 어리석음의 총합이 원래의 어마어마한 양을 유지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주인공 전원의 전사로 끝나는 장엄한 <블랙애더4>의 결말을 쓸 때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냉혈한들이었다. 아무리 냉정한 작가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창조물들에게는 약간의 관대함이라도 보이는 법인데, 이들에겐 그런 관대함도 없었다. 교활한 궁중 집사였던 <블랙애더3>의 주인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블랙애더들은 작가들로부터 어떤 자선도 구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블랙애더>의 콤비인 앳킨슨, 엘튼과 뭉쳤던 <미스터 빈>에서도 커티스는 여전히 냉정했다. 물론 영국 역사에 대한 지적인 야유였던 <블랙애더>와는 달리 <미스터 빈>은 거의 대사가 없는 슬랩스틱이었고 로완 앳킨슨이라는 걸출한 코미디 스타의 개성에 의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기본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감상적인 채플린과는 달리 빈은 처음부터 끝까지 면도날처럼 건조하고 날카로웠다. 어린아이와도 같이 순진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논리로 세상을 사는 미스터 빈은 영국 중산 계층의 예절바르고 안전한 세계를 뒤흔드는 무정부주의적인 폭풍과도 같았다. 여기엔 로맨스도 미화도 없었으며, 그건 주인공 미스터 빈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리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주인공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말랑하고 달콤한 로맨스의 길로

그런 그가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의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로맨스로 영화계에 뛰어들었던 것이다(사실은 <톨 가이>가 먼저지만 지금 이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리고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 그냥 보통 영화인가? 너무나도 달짝지근하고 안전해서 최근 앙케트 때엔 가장 유치한(cheesy) 영화 리스트에까지 올랐던 영화이다. 갑자기 그가 사람이 바뀐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그는 그런 남자였던 걸까?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과 같은 해에 나온 그의 마지막 시트콤인 <디블리의 교구 목사>에서부터 변화의 흔적을 찾아도 될까? 던 프렌치가 연기한 뚱뚱하고 리버럴한 여자 교구 목사가 보수적인 마을에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루고 있는 이 시트콤은 그의 이전 작품들에 비하면 상당히 따뜻했다. 여전히 이야기와 주제는 우상파괴적이었지만 커티스는 그가 만든 캐릭터들은 존중했고 그들에게 관대했다. <디블리의 교구 목사>의 이런 성격은 시골 마을의 괴짜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반적인 영국 시트콤의 성격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지만 이 역시 커티스의 최근 개성이 굳어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여전히 그의 영화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감상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러나 또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은 원래부터 커티스의 내부에 내재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디블리의 교구 목사>는 그가 거의 처음으로 전권을 휘두른 작품이었다. 로완 앳킨슨이라는 인물의 개성과 공동작가 존 엘튼의 도움 속에 어느 정도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블랙애더>나 <미스터 빈> 시리즈와는 달리 <디블리의 교구 목사>는 커티스 자신의 개성이 좀더 자유롭게 발휘된 작품이다. 이 작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을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을 통해 원래부터 내재되어 있던 그의 좀더 온화하고 솔직한 면이 터져나왔다고 추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게다가 이 두편의 작품이 나왔던 94년에 그는 벌써 30대 후반이었다. 슬슬 젊은 날의 냉소를 접고 부드러워질 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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