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는 뚜껑을 열기 전까지 호평의 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려웠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공격적인 마초이즘에 가득찬 수십명의 남자들 이미지뿐이었고, 무엇보다 소재 자체가 매혹보다는 폭로성 다큐멘터리에 어울림직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이중의 직설법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웰메이드’라는 기준에서는 다소 엇갈리는 평을 얻고 있지만 강우석식 대중영화라는 점에서 여전히 흥미로운 <실미도>의 이모저모를 강우석 감독론과 인터뷰를 통해 전달한다.
의미 있는 과욕, <실미도>
강우석과 <실미도>. 언뜻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란 정치영화를 만든 적은 있지만, 강우석의 장기는 어디까지나 상황과 캐릭터가 끌어가는 코미디였다. 코믹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오도가도 못할 상황에서 벌이는 절박함이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북파공작원의 억울한 죽음을 그린 <실미도>에는 코미디가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역사를 왜곡시키고 희화화한다는 비판이 빗발칠 민감한 소재였다. 실미도 사건 자체가 밝혀진 지 오래되지 않았고, 추악한 현대사의 사건들이 제대로 영화화된 적도 거의 없었다. <실미도>의 소재는 드라마틱하지만, 역사의 무게가 너무 컸다. 그 사건을 단지 그대로 그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치지 않을까, 란 생각이었다. 4년 만에 만든 <공공의 적>으로 연출력을 인정받기는 했지만, 다중 캐릭터와 역사 자체가 주인공인 <실미도>는 만만한 작품이 아니었다. 분명히 <실미도>는 모험에 가까운 승부로 보였다.
그러나 강우석에게는 <실미도>에 도전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과거 <씨네21>에서는 강우석 감독을 ‘과욕의 승부사’라고 부른 적이 있다. 누구나 생각하는 목표 이상의 것을 제시하고는, 과감하게 돌진하여 승리를 따냈던 승부사. 그런 과욕의 승부를 통하여, 영화감독으로 시작한 강우석은 당당하게 한국영화계의 파워 1이 되었다. 이제 ‘감독’은 물건너간 것이 아닐까, 란 생각마저 나돌 즈음에 등장한 <공공의 적>은 강우석이 영화계를 끌어가는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영화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는 영화인임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강우석은 영화감독이었고, 사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영화가 있었다. 그의 과욕이 영화에서 출발했고, 영화로 마무리되었음을 의심하기란 힘들다.
<실미도>의 연출을 맡은 것 역시 과욕이고, 이번에도 그 과욕은 의미가 있다. 강우석이 <실미도>에 뛰어든 시점은 이른바 한국형 블록버스터란 명목으로 만들어진 대작영화들이 차례로 실패한 뒤였다. 관객은 물론 제작자와 감독들 사이에서도, 한국에서 블록버스터는 더이상 안 돼, 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급속도로 대작영화 제작이 위축되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강우석은 그 순간에 <실미도> 제작을 선언했다. <쉬리>의 강제규 역시 한국 시장은 너무 좁다며 엄청난 대작 <태극기 휘날리며>를 만들고 있었다. 강우석은 한국영화에서도 대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멜로와 코미디 등 작은 장르에서는 이미 한국영화가 할리우드를 뛰어넘었다고 믿는 강우석은 여름과 겨울 시즌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대적할 한국영화를 원했다. 그래서 직접 <실미도>를 택한 것이다. 순제작비 84억원의 대작영화를.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향후 한국의 대작영화가 어떤 운명에 처할지를 결정짓는 주사위다.
비극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다
<실미도>란 영화는 결코 쉽지 않다. 영화가 아니라, 그 역사적 사실 자체부터가. 68년 북한의 특수부대가 청와대로 진격하려다가 사살당한 뒤, 중앙정보부는 사형수와 무기수 등 범죄자들을 북에 침투시킬 살인병기로 만들어낼 계획을 세운다. 실미도에 만들어진 684부대의 훈련병들은 지독한 훈련을 거치며 최강의 병기로 만들어지지만, 국가 정책이 바뀌면서 북파계획은 취소된다. 목적을 잃어버리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특수부대원들은 반란을 일으킨다. 훈련을 시켰던 기간병들을 죽이고, 실미도를 탈출하여 버스를 탈취하고는 청와대로 향한다. 대방동 삼거리에서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버스 안에서 자폭한 그들의 이야기는 너무 참혹하고, 너무 비극적이다. 한없이 무거운 그 역사적 사실 때문에 <실미도>의 드라마 자체가 좌초할 가능성은 컸다.
그러나 강우석은 그 역사의 무게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실미도>를 직설적인 남자들의 드라마, 국가가 아니라 ‘국가주의’에 희생당한 이들의 비극으로 그려낸다. 강우석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의 절반, 그러니까 그들이 인간병기로 태어나는 훈련과정은 프롤로그다. 그 프롤로그를 거쳐 후반의 진정한 드라마가 시작된다. 프롤로그를 통해서 그들의 동지애가 만들어지고, 드라마에서는 그들 스스로 인간임을 되찾으려는 절규가 들린다. 월북한 아버지 때문에 사회의 낙오자가 된 인찬은 주석궁에 침투하여 김일성의 모가지를 따오는 것이 유일한 목표다. 그가 인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그래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지옥의 훈련을 이겨낸다. 다른 이들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독한 훈련을 참아내는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하지만 북파계획이 취소된 이후 희망은 사라진다. 북으로 가서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그들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억울한 죽음에서 도망치기 위하여, 그들의 이름을 찾기 위하여 실미도를 탈출하지만 방송에서는 그들을 ‘무장공비’라고 부른다. 그들이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지워진 인간이고, ‘대한민국’은 그들이 누구인지를 전혀 다르게 말해준다. 그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적이 되고, 죽임을 당한다.
육체가 빚어내는 균형의 코미디
의외로 <실미도>는 코미디영화가 장기인 강우석과 꽤 어울리는 영화다. 강우석의 코미디는 단순한 말장난이나 슬랩스틱으로 웃기지 않는다. 세련된 화면이나 연출로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해주지도 않는다. 강우석은 정공법으로, 상황과 캐릭터로 관객을 웃기고 빨아들인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고, 육체와 육체가 충돌할 때 스파크가 일어난다. <공공의 적>을 생각해보자. 살인마와의 관계가 맺어지는 지점은, 철중의 얼굴에 칼이 스치는 순간이다. 철중은 그 찰나에, 그가 적임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그의 원한은 육체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원한은 자연스럽게 ‘공공의 적’으로 이어진다. 철중은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모르지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걸 느끼는 것은 순수하게 육체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실미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육체가 충돌하고 뒤엉키는 영화다. 몸이 뒤엉키는 영화들에서 강우석은 기막히게 균형을 잘 잡아낸다. 강우석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작품들에서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잘 배우고, 사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엘리트들을 조롱해왔던 강우석은 <실미도>에서도 명확하게 편을 가른다. 결정적인 순간에 훈련병들을 배신하는 것은, 악독하게 굴던 조 중사가 아니라 엘리트인 박 중사다. 지나치게 편파적이긴 하지만, 그런 태도는 <실미도>에 흐르는 근본적인 정서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강우석은 역사의 희생자들이 바로 그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에서 밀려난 이들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강우석은 정치적인 색채가 강한 주장들을 강하게 내뱉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우석은 상업영화 감독이다. 오래전부터 강우석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든다’고 공언해왔던 인물이다. 예술가와 흥행감독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강우석은 서슴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그는 늘 ‘관객’의 입장을 생각해왔다. 그가 코미디를 택한 것은 타고난 재능과 함께, 가장 관객이 즐거워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그가 늘 사회적 이슈를 영화의 줄기에 접붙여놓은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의 공감을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강우석은 늘 관객과의 소통을 기대하고, 실제로 그 소통에 성공했던 감독이다. 그런 이유로 강우석은 흥행감독의 정상에 올랐지만, 한편으로 단순한 ‘상업영화’ 감독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상업영화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을 단련하다
‘감독’으로서의 강우석은 <공공의 적> 이전과 이후로 확연하게 나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등의 흥행작을 내놓은 강우석은 코미디 감각이 탁월한 흥행감독이었다. 하지만 작품 자체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투캅스> 정도다.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투캅스>가 재미있었지만 커다란 감흥을 받지는 못했다. <투캅스>는 재치가 넘치면서도 뚝심있게 자신의 주제를 견지하는 작품이지만, 곳곳에서 이상한 타협이 엿보인다. 이 정도면 괜찮다, 이 정도면 웃을 거야, 라는 감독의 말이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공공의 적>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여기에는 적당히, 라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을 극한까지 몰고 간다. 코믹한 <공공의 적>은 기묘하게도 파트너의 비참한 죽음으로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짓을 저지른 이유로 책임을 지고 자살한다. 피와 오열로 시작한 <공공의 적>은 그러나, 능청맞게도 목욕탕에서 철중이 조폭과 벌이는 코믹한 시비로 바로 넘어간다. 강우석은 관객의 마음을 극과 극으로 끌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불편하거나, 시비를 걸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강우석은 액션영화와 코미디의 장르적 법칙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관객을 영화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강우석 스타일의 영웅을 탄생시킨다. 해리 칼라한 같은 70년대 이후의 진정한 영웅들이 그렇듯이, 철중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반영웅이다. <공공의 적>은 강우석의 최고 걸작인 동시에, 한국 장르영화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작품이다.
강우석은 연출과 제작을 하면서 점점 경지를 높여가는 스타일이다. <공공의 적>에서 강우석은 자신의 장기가 무엇인지, 자신의 연출 스타일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다. <공공의 적>을 만들기 전에, 그는 수년간 60여편의 영화편집에 관여하면서 관객과 호흡하는 리듬을 익혔다고 말한다. 애초의 시나리오로는 지극히 심각하고 어두운 누아르였다고 하는 <공공의 적>은 강우석의 손에서 유머 넘치는 액션영화의 걸작으로 태어난다. 강철중은 <투캅스>의 두 형사들보다 더욱 현실적인 인물이고, 정감어린 인물이다. 그들은 영화 속의 인물이었지만, 철중은 아니다. 철중은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아니 있어야만 할 인간이다. 그런 인간을 강우석은 솔직담백하게 그려낸다. <공공의 적>이 강우석의 대표작이 된 이유는 그것이다. 언제나 관객을 생각하고, 언제나 관객을 배려하며 즐거워 할 요소들을 이리저리 배치했던 과거와 달리 <공공의 적>은 자신만의 길을 달려간다. 솔직하게 철중의 길을 쫓아가며, 관객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도록 만든다. 더이상은 게임이 아니고, 대중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대중의 영화를 만드는 것뿐이다. 가장 솔직하게.
강우석의 코미디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채플린이나 이타미 주조를 이야기했던 강우석은, 자신의 영화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깨달았다. 이미 <투캅스>를 만들던 시절에 그것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감각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우석의 영화 <공공의 적>과 <실미도>에서는, 몸으로 느껴지는 현실이 보인다. 그건 아마도 세월이 안겨준 선물일 것이다. <실미도>는 몇몇 단점이 두드러지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힘이 느껴진다. 세련되게, 를 거부하는 강우석은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눈높이로 카메라를 가져간다. 그건 그가 믿는, 대중의 눈높이다. <실미도>는 대중영화로서 가져야 할 미덕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강우석의 힘이다. 언제나 강우석은 대중의 영화를 만든다. 그건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만들어질 강우석의 영화가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그것이다. 임권택처럼, 상업영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성장한 작가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