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반지의 제왕>으로 전환점 맞은 뉴질랜드 영화산업 [1]
2003-12-26
글 : 박은영
키위들, 할리우드를 넘어서다

<반지의 제왕>은 도박과도 같은 프로젝트였다. 성경 다음으로 많은 독자를 거느린 판타지의 고전을 실사영화로 만들어내겠다는 시도 자체도, 3부작을 한꺼번에 촬영해 1년에 한편씩 개봉하겠다는 전략도 무모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의아했던 것은 촬영은 물론 후반작업까지도 뉴질랜드에서, 현지 인력과 함께하리라는 결단이었다. 이런 규모의 영화를 감당할 수 있고, 그런 인프라와 노하우를 갖춘 것은 ‘오직’ 할리우드뿐이라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을 뉴질랜드로 가져왔고, 결국 뜻대로 만들어냈다. 이 반전은 경이로웠다. 중간계의 웅대하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뉴질랜드의 자연 풍경은 그렇다쳐도 소품과 의상, 세트와 컴퓨터그래픽까지 아우른 솜씨는 선발주자인 할리우드 부럽지 않았다. 이제 뉴질랜드 영화인들은 “할리우드에서라면 <반지의 제왕>을 절대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쯤 되니 자연스럽게 의문을 품게 된다. 뉴질랜드가 <반지의 제왕> 같은 규모의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반은 대체 언제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400만 인구 중 영상산업 종사자 3만명

뉴질랜드는 인구 400만명의 작은 나라다. <전사의 후예>에서 <웨일 라이더>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화제작을 내기도 했지만, 한해 평균 5편 정도의 영화가 만들어지며, 자국영화의 시장점유율은 5%에 불과하다. <반지의 제왕>이 만들어진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반지의 제왕>은 물론 어떤 영화도 너끈히 만들어낼 수 있는 인프라가 형성됐다는 사실. 뉴질랜드 프로덕션 전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필름 뉴질랜드의 대표 루이스 베이커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까지는 영화 인력보다는 광고나 공연예술 인력이 더 많았고 활동도 더 왕성한 편이었다. “피터 잭슨, 제인 캠피온, 리 타마호리 등이 나라 안팎에서 명성을 쌓아가던 90년대 초반, <헤라클레스> <제나> 등의 TV시리즈가 뉴질랜드로 원정 촬영을 오고 미국·뉴질랜드 합작 형태로 진행되면서, 뉴질랜드 영화산업에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해줬다.” 애초 주요 스탭진이 미국인이었지만, 필요에 의해 수혈된 뉴질랜드 현지인들의 비중과 역할이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늘어나게 됐다. 그러나 뉴질랜드의 영화시장은 양산된 전문 인력들을 품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꿈이 클수록 호주나 할리우드로 떠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좀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이 있었다. “뉴질랜드는 천장이 유리로 막힌 것처럼 답답한 나라로 인식돼왔다. 좀더 예산이 큰 영화, 야심적인 영화를 만들려면 뉴질랜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인식이 잘못됐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었다. 할리우드가 주목하는 영화인이라면 고국에서 영화를 만든다고 해서 관객을 만족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한 인터뷰에서 피터 잭슨은 이렇게 말했고, 이를 곧 실천으로 옮겼다. 할리우드의 자본으로 뉴질랜드에서 찍은 <프라이트너>로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반지의 제왕>을 ‘집으로’ 가져오는 모험을 감행한다. 원하는 모든 시설을 곁에 두고 활용하기 위해 그는 시각효과 하우스 웨타 디지털과 웨타 워크숍, 그리고 후반작업 회사 필름 유니트의 소유주 겸 운영자가 됐고, 최신 설비와 젊은 인력들로 업그레이드해 나갔다. 조지 루카스처럼 자기만의 ‘영화 공작소’를 갖게 된 것이지만, 결과는 달랐다. <반지의 제왕> 3부작을 통해 그는 현지인 2만3천명을 고용했고, 이를 통해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 이 무렵 뉴질랜드의 영화산업은 164%의 성장을 거뒀고, 영상산업 종사자만 3만명에 이르게 됐다.

최강 종목은 로케이션과 후반작업

최근 뉴질랜드로 날아가는 영화인들이 부쩍 늘고 있다. <반지의 제왕> 이후로 뉴질랜드가 분주해졌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가 상당 부분을 뉴질랜드에서 촬영한 데 이어, <부기맨> <위다웃 더 패들> 등 할리우드 장르영화들도 뉴질랜드에서 줄줄이 촬영되고 있다. 한국영화도 예외는 아니어서, 겨울 아닌 계절에 설원을 촬영해야 했던 <실미도>와 <올드보이> 팀이 뉴질랜드를 찾은 바 있다. 로케이션 장소로 뉴질랜드가 인기를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원시적이고 이국적인 자연경관, 그리고 북반구과 반대되는 계절의 이점은 무척 크다.

실제로 뉴질랜드는 어느 곳이든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림’이 된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노스아일랜드의 중심지인 오클랜드나 웰링턴처럼 큰 도시에서도 한 시간 거리에서 녹색 평야와 원시림과 기암괴석과 검은 해변을 모두 만날 수 있다. 일례로 웰링턴 도심에 우뚝 선 산을 비롯, 근교의 국립공원과 개인 캠핑장 등은 특별한 장식이나 포장을 하지 않고도 <반지의 제왕>에 신화적 풍광을 제공했다. 번지점프, 래프팅 등의 레저가 발달한 사우스아일랜드는 냉대 평야와 만년설과 빙벽 등을 껴안고 있어, 국내외적으로 재난액션이나 서사액션 촬영지로 인기가 높다.

촬영장 물색보다 복잡한 이유로 뉴질랜드를 찾는 프로덕션도 늘어나고 있다. 톨킨과 함께 판타지 문학의 양대 산맥을 이룬 C. S. 루이스의 대표작 <나니아 연대기>의 첫 번째 이야기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준비 중인 앤드루 애덤슨(<슈렉>)과 그의 팀은 헌팅을 위해 오클랜드 지역을 들렀을 뿐 아니라, <반지의 제왕>의 시각효과 전반을 담당한 웨타 디지털과 워크숍을 답사했다. <반지의 제왕>으로 판타지영화의 생산 가능성이 검증된 뉴질랜드에서 이들은 조만간 여장을 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피터 잭슨이 차기작 <킹콩>을 뉴질랜드에서 제작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웨타에서 <킹콩>의 사전시각화(previsualization) 작업에 착수한 지 벌써 여러 달이다. 2명에서 시작해 이제 400여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는 웨타는 현재 할리우드의 영화 <아이, 로봇>의 시각효과에도 참여하고 있다. 웨타와 옥토버 등의 시각효과 하우스가 바빠진 것은 물론, 후반작업 회사 필름 유니트의 “원 스톱 프로세스”도 연간 12 내지 15편의 작품의 ‘뒤처리’를 책임지며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 중이다.

취재 지원 뉴질랜드 대사관, 뉴질랜드 무역산업진흥청, 뉴질랜드 관광청, 이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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