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적이고 유연하고 합리적인 키위들
피터 잭슨이 아무리 걸출한 인재라 해도, 불과 5년 사이 영화제작의 인프라를 홀로 만들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의문이 남는 이 대목에서 뉴질랜드인들은 그들의 고유한 성향과 재능을 언급한다. 나머지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남쪽의 작은 섬나라 뉴질랜드는 외부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없는 곳. “창의적이고 사고가 유연하며 상황 대처능력이 뛰어나다”는 강점이 그런 고립과 결핍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이다. 해외 진출을 지향하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향도 한몫했다. “미국인은 인구의 10% 정도만이 여권을 갖고 있다. 나라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뉴질랜드인들은 해외 교류의 필요성을 절감해왔고, 기질적으로도 여행을 즐긴다. 이런 진취적 기상이 창조성의 근간을 이룬다. 펀딩부터 세일즈까지 자국영화의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뉴질랜드필름커미션의 대표 루스 할리의 분석이다. 할리우드에서 뉴질랜드로 역이주한 케이스로, 시각효과 등의 후반작업 전문회사 옥토버에서 일하는 딘 라이언은 뉴질랜드 사람들의 “가족 중심주의”를 중요한 미덕으로 꼽는다. 영화 인력 사이에 네트워크가 잘 형성돼 있어 마치 “하나의 대가족”처럼 공조하는 풍토가 그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피터 잭슨이 소유주인 필름 유니트에는 첨단시설 확충은 물론 작업 중인 영화인들을 위한 극장과 식당, 그리고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2500만NZ달러 프로젝트로 알려진 이 증축 계획은 뉴질랜드 안팎의 재능있는 젊은 영화인들을 불러모으게 될 것이다.
이런 성향은 합리적인 인력 시스템으로 이어진다. 필름 뉴질랜드와 필름 유니트에 몸담고 있는 마이클 스티븐스는 ‘한국통’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실미도>의 뉴질랜드 로케이션 현장을 지켜보며 그 엄청난 스탭 수에 놀랐다고 전한다. 도제 시스템의 전통도 없고, 적은 인원의 스탭이 여러 분야를 겸임하는 뉴질랜드의 촬영현장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 “비용의 효율성은 노동력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단순히 뉴질랜드 영화인들의 인건비가 저렴하다는 뜻이 아니라 더 적은 인원으로 현장 운용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들 그렇게 훈련을 받아왔다.” 대부대와 고비용을 영화의 완성도와 직결시키는 풍토가 만연한 충무로에서 한번쯤 되새겨볼 만한 충고다.
정부의 적극지원과 피터 잭슨의 재투자
이런 물적 인적 인프라 형성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 차원에서 자국영화에 매년 1억NZ달러를 지원해주는 것은 이제 전통이 됐고, 해외 프로덕션 유치를 위한 경쟁력 있는 제도를 제정하고 또 시행하는 중이다. 호주나 캐나다보다 환율이 낮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공산품 수입에 관세를 붙이지 않아 소품이나 장비 출입이 자유롭다는 이점도 크게 작용하지만, 이보다 파격적인 것이 뉴질랜드 정부의 국내외 영화지원 정책이다. 뉴질랜드 정부는 자국영화에 한해서는 세금 면제를(<반지의 제왕>은 자국영화로 간주,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은 경우다), 외국영화에 대해서는 할인을 해준 바 있으며, 올 여름부터는 뉴질랜드에서 5천만NZ달러 이상을 소비하거나, 1500만NZ달러 이상의 제작 규모에서 70% 이상의 제작비를 소비하는 경우 해당 지출액의 12.5%를 되돌려주는 ‘현금 양도 계획’(cash grant scheme)을 시행하고 있다. 영화인 스스로 보험과 세금을 책임지는 자영 계약 시스템이 정착돼 있고, 필름 커미션과 필름 뉴질랜드 등의 영화기관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현지 인력의 운용을 수월하게 만드는 요인.
문제는 <반지의 제왕> 그 이후다. 로케이션의 유행은 가고 또 오는 것이며, 환율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지의 제왕>의 ‘특수’는 오래가지 않을 수도 있다. 피터 잭슨 등이 벌여놓은 영화제작의 인프라는 자국 시장 규모에 비해선 턱없이 크기 때문에 일거리가 충분치 않으면 고급 인력들이 호주나 할리우드로 빠져나갈 공산도 크다. 그러나 뉴질랜드는 좀체 조바심을 내지 않는다. “뉴질랜드 영화산업은 업그레이드됐고, 이런 성과는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자긍심 때문. 현재 뉴질랜드 영화계와 정계의 공통된 자각과 노력은 “자국영화를 키워 밸런스를 맞추자”는 것이다. 정부가 내년부터 자국영화 지원 규모를 2배 정도로 늘릴 것이라 발표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투자액을 늘리고 일자리를 늘리고 더 나아가 자국영화를 키워보리라는 계획인 것이다. 피터 잭슨에게도 자국 영화산업 육성과 관련한 장기적인 플랜이 있다. 믹싱 스튜디오, 데이터시네, 텔레시네 등을 구비한 피터 잭슨 소유의 후반작업 회사 필름 유니트에는 첨단 설비는 물론 극장, 식당, 아파트까지 들어서게 된다. “뉴질랜드 영화인, 저예산 독립영화 작가들이 이용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계획.
이처럼 정부의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지원과 피터 잭슨이라는 거물의 재투자 및 환원 노력은 외부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다. 매우 특별한 케이스 스터디. ‘호기’를 맞은 뉴질랜드 영화산업이 국제 무대에서 진정한 도약을 이룰 것인지, 주시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하겠다.
<반지의 제왕>의 경제효과
절대반지는 뉴질랜드 사상 "최대 고용주"
<반지의 제왕>의 1부와 2부, 두편의 영화가 전세계적으로 벌어들인 수익은 29억 달러. 이제 막 개봉한 3부의 수익까지 보태면 40억달러는 너끈히 넘을 것이다. 극장 매표수익과 DVD 판매수익 등 영화 자체가 벌어들이는 수익도 막대하지만, 뉴질랜드에서 이 영화를 계기로 벌어들이는 간접수익도 만만치 않다. 뉴질랜드의 지역신문 <도미니온 포스트>에 따르면, 이 영화의 제작 근거지였던 도시 웰링턴은 <반지의 제왕>을 통해 향후 10년간 2억5천만NZ달러를 벌어들일 전망이라고 한다. 사소한(?) 예로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월드 프리미어 행사만으로도 이미 700만NZ달러의 수익을 올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영화를 통해 웰링턴이 얻은 홍보 효과는 2500만NZ달러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반지의 제왕>의 제작진은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제작비의 3/4 정도를 뉴질랜드에서 소비했고, 뉴질랜드 전역에서 2만3천명의 인력을 고용해 뉴질랜드 사상 “최대 고용주”로 기록된 바 있다. 이후 뉴질랜드 영화산업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2001년 뉴질랜드에서 제작 또는 촬영된 영화의 가치가 3억5200만달러였던 데 반해, 2002년엔 6억5천만달러로 2배 가까이 늘어나 있다. <반지의 제왕>은 관광산업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뉴질랜드 내 주요 로케이션을 둘러보는 그룹 투어가 크게 유행하고 있는데, 호비튼 세트가 지어진 마타마타의 농장 주인은 뉴라인을 설득, (최소한의) 세트의 흔적을 남긴 덕으로 이제까지 60만NZ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2002년 출간된 <반지의 제왕 로케이션 가이드북>은 뉴질랜드 내에서만 9만부 이상 팔려나갔고, 최근 그 개정판이 전세계적으로 시판됐다. 뉴질랜드를 찾는 관광객 사이에 이 책은 ‘바이블’로 통한다. 또한 웰링턴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반지의 제왕> 소품 및 미니어처 전시회에는 모두 24만명이 다녀갔고, 현재 해외로 투어 중이다. 뉴질랜드는 향후 연간 1만명의 해외 관광객이 방문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