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로 시작하고, 밴드로 떠오르다
잭 블랙은 스티븐 프리어즈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단숨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 남자의 연애실패사(史)를 유쾌하게 모은 이 영화에서 잭 블랙은 친구 롭(존 쿠색)이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 점원 배리를 연기한다. 배리는 테크노나 힙합 앨범을 사러온 손님을 “록을 모르면 앨범 살 자격도 없어!”라며 무식하게 쫓아낸다. 있는 앨범도 옷 속에 숨기고선 그런 거 안 판다고 거짓말한다. 가게 주인 입장에선 골치 아픈 점원이지만 본인은 오히려 당당하다. “저 자식이 그 유명한 밴드도 모른다잖아!” 오늘 당장 해고당하면 딱히 갈 데도 없어 보이는데 절대 기죽지 않는다.
이 단순무식하고 뻔뻔한 루저형 인간이 잭 블랙의 캐릭터다. 한마디로 그는 쥐뿔도 없는데 강하다. 그런 자신을 누군가 무시하면 잭 블랙의 캐릭터는 잔꾀로 상대방을 골탕먹인 뒤 뒤에서 “메롱~”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일단 정면으로 자기의 세계를 열변한다. “눈썹을 최대한 활용해” 사악하고 거만한 표정도 지어보인다. 그래도 그는 밉살스럽지 않고 그의 유머는 통쾌하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도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인생이다 보니 그 처지가 이해됨은 물론이다. 나 대신 쏟아내주는 독설을 듣다보면 거북할 때 탄산음료를 마신 것처럼 시원한 트림도 나온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알려진 대로 그는 록음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다. 연기로 해소되지 않은 에너지를 잭 블랙은 음악에 쏟았다. 그는 극단 ‘배우 패거리’에서 만난 카일 가스와 우스꽝스러운 2인조 록밴드 ‘터네이셔스 D’를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 역시 오랜 기간 대단하지 못했다. 터네이셔스는 정식 앨범 발매도 못한 채 주로 유명한 록음악만 패러디했고, 자신들의 괴상한 유머를 컬트적으로 이해해준 소수의 팬을 얻었다. 어쨌거나 이 듀오의 끈덕진(tenacious) 활동이 1999년 중요한 결실을 맺었다. 가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터네이셔스 D>라는 TV 코미디 시리즈를 제작했다. 시리즈는 성공했고 밴드는 유명해졌다.
잭 블랙의 유머는 대체불가
이래서 성공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후 잭 블랙은 좀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 그는 MTV가 제작하는 TV용 패러디영화에 출연했다. <반지의 제왕>을 패러디한 <피어싱의 제왕>과 <스파이더 맨>을 패러디한 <잭 블랙: 스파이더 맨>을 찍었다. 5분 내외의 단편이었지만 그의 엉뚱하고 유치한 유머 감각을 발휘하기엔 부족함없는 프로젝트였다. <피어싱의 제왕>은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해 요정족, 인간, 난쟁이족 등이 모두 모인 회의장면을 따오고 있다. 영화 클립과 재촬영분을 그럴듯하게 섞어 편집한 이 패러디물에서, 레골라스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잭 블랙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누가 절대반지를 없앨 것인지 때문에 분위기가 제법 심각하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잭이 그 반지를 ‘거시기’에 피어싱했다는 사실이다. 아르웬으로 분한 사라 미셸 겔러가 우아하게 다가가 한번만 보여달라고 청한다. 그녀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잭이 바지를 벗어내리고, ‘짝퉁’ 아르웬은 피어싱에 감탄한다. 그러다 느닷없이 반지를 잡아채는 아르웬. 사우론의 힘을 느끼며 잭이 혼절 직전에 빠지고 이 기운에 함께 휩싸인 프로도의 얼굴이 인서트컷으로 들어간다. 어이없는 저질 유머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적인 반응은 좋았다. 사라 미셸 겔러는 <잭 블랙: 스파이더 맨>에서도 메리 제인으로 열연해줬다.
잭 블랙의 이런 코미디 감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가 마이크 화이트다. 그는 <스쿨 오브 락>의 작가이자 영화에서 듀이의 친구로 출연했다. “잭의 유치한 감성과 열정에는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솔직히 난 잭의 캐릭터가 사랑스럽다. 광적이고 사람을 겁주고 과장된 면도 있지만, 아이들하고 섞여 있을 땐 테디 베어 같다.”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이 대체불가능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이크 화이트는 철저히 잭 블랙에 맞춰 듀이 핀의 캐릭터를 세공했다. 다시 말해 듀이 핀은, 인터뷰 때도 농담을 쉬지 않는 잭 블랙의 말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분석해보건대 92%가량” 본인을 담고 있다. 나머지 8%는 이렇게 설명된다. “나는 장난 같은 밴드를 만들어서 록음악으로 장난도 치는데 듀이 핀은 장난을 치진 않는다.”
마이크 화이트처럼 잭 블랙의 코미디 감각을 제대로 이해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와 <악마같은 여자>가 대표적인 경우다. <내겐 너무…>에서 잭 블랙은 죽도 밥도 못 됐다. 주인공 할 라슨은 배리만큼 순수한 마니아적 감성을 갖고 있지 않다. 터네이셔스 듀오처럼 과감하고 무식한 패러디도 하지 않는다. 예쁜 여자만 쫓다가 혼쭐난 외모지상주의자로서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선 지난날을 반성하고 현실을 기쁘게 수긍한다. 잭 블랙의 기발한 유머 감각이나 반골 기질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악마같은 여자>는 더했다. 스티브 잔, 제이슨 빅스, 아만다 피트가 함께한 이 영화는 독재자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여자에게서 순진한 친구를 구해내려는 두 무뇌아의 소동극이다. 귀여운 유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울 것 없는 코미디 설정에 잭 블랙이 시종 끌려다니는 모습은 큰 매력이 없다. 그가 제법 똑똑한 줄 알았던 관객에게는 만족보단 실망이 컸을 영화다.
<스쿨 오브 락>, 그의 행운 그리고 우리의 행운
어쨌든 철사 일화와 통하는 데가 있어 보이는 잭 블랙의 비주류적 감성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앨범 발매의 염원을 이룬 터네이셔스 듀오는 지난해, 99년 코미디 시리즈 에피소드 3개와 콘서트 장면을 모아서 <터네이셔스 D: 완벽한 걸작들 vol.1>을 DVD로 냈고 자전적인 영화 <터네이셔스 D: 운명의 제비뽑기>를 곧 만들 계획이다. 누군가 잭 블랙에게, 주류에 편입하면서 컬트 스타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된 것 같지 않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고통스럽긴 해도 럭셔리한 작업도 할 만하다. 터네이셔스의 영화를 만들 돈을 벌게 됐기 때문이다.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본래 모습과 거리가 먼 것들을 도전으로 받아들이지만 나는 좀더 진짜 내 모습에 다가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 진짜 모습의 개성은 뚜렷하다. 잭 블랙은 로빈 윌리엄스보다 가볍지만 스티브 마틴보다 바보 같지 않고, 로완 앳킨슨이나 빌 머레이보다 덜 지적일지 몰라도 짐 캐리에게 없는 똑똑한 비아냥의 유머를 갖고 있다. 여기에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훌륭히 조화시킨 <스쿨 오브 락>을 만난 건 잭 블랙에게 분명 행운이었다. 그러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을 만난 건 우리에게도 행운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