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쿨 오브 락>으로 할리우드를 뒤집어엎은 ‘루저’ 유머의 대가 잭 블랙 [1]
2004-02-27
글 : 박혜명
뻔뻔한 그 남자, 솔로연주를 시작하다

<스쿨 오브 락>은 잭 블랙의 영화다. <비포 선라이즈> <웨이킹 라이프>로 미국 인디영화계에서 이름을 떨친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있긴 해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잭 블랙에 의한 영화다. <스쿨 오브 락>의 주인공 듀이 핀은 아마추어 록밴드 멤버다. 무대에만 오르면 제 기분에 취해 바닥을 뒹굴고 무대 밖으로 몸을 던진다. 어이없는 오버 액션으로 일관하다 결국 자신이 결성한 밴드에서 퇴출당하는 듀이 핀의 모습엔 잭 블랙이 들어 있다. 고급 사립학교에 보결교사로 위장 취업해 아이들을 데리고 (아마도) 역사상 최연소 록밴드를 결성하고, 엄숙한 클래식만 알던 애들 앞에서 “짱에게 대드는 것이 록의 정신”이라고 부르짖는 괴짜 선생. 양미간에 주름 깊게 잡고 진지하게 록의 역사를 설명하는 이 캐릭터의 넘쳐나는 열정은 잭 블랙의 에너지가 아니면 표현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동료배우 카일 가스와 함께 11년 전에 코믹 록밴드 ‘터네이셔스 D’를 결성했고,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괴팍한 록 마니아를 연기해 할리우드 주류의 러브콜을 받게 된 독특한 코미디 배우다. ‘루저’를 자처하고 상대를 조롱하면서 통쾌한 유머를 발사하는 잭 블랙. 편의상 ‘코미디언’이라고 불러야겠지만, 그는 우리가 봐온 모습보다 훨씬 괴짜스러운 인간이다.

배우로 시작하고, 밴드로 떠오르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잭 블랙은 스티븐 프리어즈의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에서 단숨에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 남자의 연애실패사(史)를 유쾌하게 모은 이 영화에서 잭 블랙은 친구 롭(존 쿠색)이 운영하는 레코드 가게 점원 배리를 연기한다. 배리는 테크노나 힙합 앨범을 사러온 손님을 “록을 모르면 앨범 살 자격도 없어!”라며 무식하게 쫓아낸다. 있는 앨범도 옷 속에 숨기고선 그런 거 안 판다고 거짓말한다. 가게 주인 입장에선 골치 아픈 점원이지만 본인은 오히려 당당하다. “저 자식이 그 유명한 밴드도 모른다잖아!” 오늘 당장 해고당하면 딱히 갈 데도 없어 보이는데 절대 기죽지 않는다.

이 단순무식하고 뻔뻔한 루저형 인간이 잭 블랙의 캐릭터다. 한마디로 그는 쥐뿔도 없는데 강하다. 그런 자신을 누군가 무시하면 잭 블랙의 캐릭터는 잔꾀로 상대방을 골탕먹인 뒤 뒤에서 “메롱~” 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일단 정면으로 자기의 세계를 열변한다. “눈썹을 최대한 활용해” 사악하고 거만한 표정도 지어보인다. 그래도 그는 밉살스럽지 않고 그의 유머는 통쾌하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도 별로 내세울 게 없는 인생이다 보니 그 처지가 이해됨은 물론이다. 나 대신 쏟아내주는 독설을 듣다보면 거북할 때 탄산음료를 마신 것처럼 시원한 트림도 나온다.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로 주류 코미디언 반열에 들기 전까지, 사실 배우로서의 잭 블랙은 커리어가 변변찮았다. 데뷔는 그럴듯했다. UCLA에서 연극을 전공할 때 그는 팀 로빈스가 이끌던 소극단 ‘배우 패거리(Actors’ Gang)’에서 활동했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팀 로빈스의 감독 데뷔작 <밥 로버츠>를 통해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데몰리션 맨> <화성침공> <자칼> <나는 아직도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등에서 소소한 단역만 맴돌았다. “난 항상 두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뜨고 할 수 있는 한 표정을 짜냈다. 자연스러운 카리스마는커녕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피땀어린 발악이었다.”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알려진 대로 그는 록음악에 상당히 조예가 깊다. 연기로 해소되지 않은 에너지를 잭 블랙은 음악에 쏟았다. 그는 극단 ‘배우 패거리’에서 만난 카일 가스와 우스꽝스러운 2인조 록밴드 ‘터네이셔스 D’를 만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 역시 오랜 기간 대단하지 못했다. 터네이셔스는 정식 앨범 발매도 못한 채 주로 유명한 록음악만 패러디했고, 자신들의 괴상한 유머를 컬트적으로 이해해준 소수의 팬을 얻었다. 어쨌거나 이 듀오의 끈덕진(tenacious) 활동이 1999년 중요한 결실을 맺었다. 가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터네이셔스 D>라는 TV 코미디 시리즈를 제작했다. 시리즈는 성공했고 밴드는 유명해졌다.

잭 블랙의 유머는 대체불가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이래서 성공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후 잭 블랙은 좀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됐다. 그는 MTV가 제작하는 TV용 패러디영화에 출연했다. <반지의 제왕>을 패러디한 <피어싱의 제왕>과 <스파이더 맨>을 패러디한 <잭 블랙: 스파이더 맨>을 찍었다. 5분 내외의 단편이었지만 그의 엉뚱하고 유치한 유머 감각을 발휘하기엔 부족함없는 프로젝트였다. <피어싱의 제왕>은 절대반지를 없애기 위해 요정족, 인간, 난쟁이족 등이 모두 모인 회의장면을 따오고 있다. 영화 클립과 재촬영분을 그럴듯하게 섞어 편집한 이 패러디물에서, 레골라스의 헤어스타일을 따라한 잭 블랙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다. 누가 절대반지를 없앨 것인지 때문에 분위기가 제법 심각하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잭이 그 반지를 ‘거시기’에 피어싱했다는 사실이다. 아르웬으로 분한 사라 미셸 겔러가 우아하게 다가가 한번만 보여달라고 청한다. 그녀의 유혹에 못 이기는 척 잭이 바지를 벗어내리고, ‘짝퉁’ 아르웬은 피어싱에 감탄한다. 그러다 느닷없이 반지를 잡아채는 아르웬. 사우론의 힘을 느끼며 잭이 혼절 직전에 빠지고 이 기운에 함께 휩싸인 프로도의 얼굴이 인서트컷으로 들어간다. 어이없는 저질 유머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체적인 반응은 좋았다. 사라 미셸 겔러는 <잭 블랙: 스파이더 맨>에서도 메리 제인으로 열연해줬다.

잭 블랙의 이런 코미디 감각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하나가 마이크 화이트다. 그는 <스쿨 오브 락>의 작가이자 영화에서 듀이의 친구로 출연했다. “잭의 유치한 감성과 열정에는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솔직히 난 잭의 캐릭터가 사랑스럽다. 광적이고 사람을 겁주고 과장된 면도 있지만, 아이들하고 섞여 있을 땐 테디 베어 같다.”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이 대체불가능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이크 화이트는 철저히 잭 블랙에 맞춰 듀이 핀의 캐릭터를 세공했다. 다시 말해 듀이 핀은, 인터뷰 때도 농담을 쉬지 않는 잭 블랙의 말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분석해보건대 92%가량” 본인을 담고 있다. 나머지 8%는 이렇게 설명된다. “나는 장난 같은 밴드를 만들어서 록음악으로 장난도 치는데 듀이 핀은 장난을 치진 않는다.”

<악마같은 그녀>

마이크 화이트처럼 잭 블랙의 코미디 감각을 제대로 이해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와 <악마같은 여자>가 대표적인 경우다. <내겐 너무…>에서 잭 블랙은 죽도 밥도 못 됐다. 주인공 할 라슨은 배리만큼 순수한 마니아적 감성을 갖고 있지 않다. 터네이셔스 듀오처럼 과감하고 무식한 패러디도 하지 않는다. 예쁜 여자만 쫓다가 혼쭐난 외모지상주의자로서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선 지난날을 반성하고 현실을 기쁘게 수긍한다. 잭 블랙의 기발한 유머 감각이나 반골 기질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악마같은 여자>는 더했다. 스티브 잔, 제이슨 빅스, 아만다 피트가 함께한 이 영화는 독재자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여자에게서 순진한 친구를 구해내려는 두 무뇌아의 소동극이다. 귀여운 유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울 것 없는 코미디 설정에 잭 블랙이 시종 끌려다니는 모습은 큰 매력이 없다. 그가 제법 똑똑한 줄 알았던 관객에게는 만족보단 실망이 컸을 영화다.

<스쿨 오브 락>, 그의 행운 그리고 우리의 행운

조금 서운하게도 잭 블랙은, 자신의 과거를 잘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인터뷰에서도 마찬가지다.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 허모사 비치에서 출생했고 UCLA를 중퇴했으며 열세살에 TV광고에 출연한 것이 첫 번째 커리어라는 것 정도다. 미완성의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기 위해 샌타모니카에서 대안학교를 다닌 적도 있다는 잭 블랙은 학창 시절 이야기를 꽤나 꺼린다. “어릴 때 나는 별로 웃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말하는 걸 보면 그닥 외향적이진 않았을 거란 추측은 가능하다. 혼자서만 별난 행동을 하고 다녔을지는 모르겠다. 어릴 때 잭 블랙은 옷 속에 철사를 숨기고 다녔었다. 그게 우연히 흘러내리면 사람들이 자기를 로봇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서.

어쨌든 철사 일화와 통하는 데가 있어 보이는 잭 블랙의 비주류적 감성은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앨범 발매의 염원을 이룬 터네이셔스 듀오는 지난해, 99년 코미디 시리즈 에피소드 3개와 콘서트 장면을 모아서 <터네이셔스 D: 완벽한 걸작들 vol.1>을 DVD로 냈고 자전적인 영화 <터네이셔스 D: 운명의 제비뽑기>를 곧 만들 계획이다. 누군가 잭 블랙에게, 주류에 편입하면서 컬트 스타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된 것 같지 않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고통스럽긴 해도 럭셔리한 작업도 할 만하다. 터네이셔스의 영화를 만들 돈을 벌게 됐기 때문이다. 많은 배우들이 자신의 본래 모습과 거리가 먼 것들을 도전으로 받아들이지만 나는 좀더 진짜 내 모습에 다가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 진짜 모습의 개성은 뚜렷하다. 잭 블랙은 로빈 윌리엄스보다 가볍지만 스티브 마틴보다 바보 같지 않고, 로완 앳킨슨이나 빌 머레이보다 덜 지적일지 몰라도 짐 캐리에게 없는 똑똑한 비아냥의 유머를 갖고 있다. 여기에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훌륭히 조화시킨 <스쿨 오브 락>을 만난 건 잭 블랙에게 분명 행운이었다. 그러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을 만난 건 우리에게도 행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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