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비평 3인 3색 [2] - 달콤쌉사름한 그녀들의 ‘욕망’, <8명의 여인들>
2004-03-11
글 : 유지나 (평론가)

〈8명의 여인들〉, 진부한 남성 헤게모니를 향해 유쾌하게 도발하다

“수화기 저편 당신의 목소리. 내가 말하지 못한 게 있죠.

(…) 난 가고 싶었는데, 여기 있죠. 이런 내가 싫죠.

결국 못 갈 테죠. 욕망하죠. 그런데 못하죠.

당신에게 말했어야 했죠, 갔어야 했죠.

차라리 잠들기라도 했어야겠죠.

당신이 귀머거리일까 겁나죠. 당신이 겁쟁이일까 겁나죠.

비밀이 폭로될까 겁나죠.

아마도 당신을 사랑한단 말 차마 못하죠.”

-프랑수아즈 아르디, <르 메싸주 페르소넬>(le message personnel) 이자벨 위페르의 노래 〈8명의 여인들〉 중-

8개의 욕망에 접속하다

여성심리 전문가쯤으로 정평이 난 프랑수아 오종은 마침내 프랑스 영화사를 횡단하는 여배우 파노라마 버전을 〈8명의 여인들〉로 펼쳐내는 듯하다. 이름만 들어도 깊은 매혹을 느끼게 하는 여배우들-여인들이 오종의 스크린에서 화사하고 수다스럽고 미묘한 심리전을 벌인다. 분절된 숏들로 구성된 스크린이라기보다 오히려 제한된 단막극 무대처럼 펼쳐진 이 단조로운 공간에서 살인사건과 음모, 거짓진실의 폭로가 이어진다. 마르셀이란 한 남자-말뚝에 기대 자신의 삶을 꾸려왔거나 꾸리려한 여자들은 이 과정에서 고삐를 풀고, 각자 게임판을 다시 짜나간다. 각자 자신이 주도한다고 믿은 이 게임판은 시간이 가면서 인물들의 고백과 거짓말, 은닉된 욕망에 의해 해체되고 재구축된다. 이제 여성들의 욕망은 뒤집힌 파워게임판을 만들고 관객의 욕망에 접속하기 시작한다.

첫 이미지는 눈쌓인 아늑한 자연풍경.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정겨운 이 이미지는 옆으로 이동하는 카메라를 통해 부르주아 저택으로 연결된다. 사슴이 이 그림 같은 집 근처를 서성이고 카메라는 저택의 거실로 들어간다. 창밖으로 스존이 도착하면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은 부잣집의 떠들썩한 가족모임이 펼쳐지려는 중이다.

이 집의 유일한 남자, 이 부르주아 저택과 안락한 삶, 가족관계를 제공하는 가부장 마르셀만 보이지 않는다. 밤새 일한 그는 침실에서 늦잠을 자는 게 아니라 등에 칼이 꽂힌 시체가 돼버렸다. 이후 그는 살았든 죽었든 뒷모습으로만 등장한다. 관객에게 사건의 핵심인 이 남자 인물의 앞모습을 절대 안 보여주기로 한 오종의 전략은 호기심 유발과 여성들만의 무대 만들기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한다.

문제는 누가 범인인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해결을 위해 여자들은 알리바이를 대며 무죄함을 밝히거나 서로를 돌아가면서 의심하고 추리하는 탐정이 된다. 일단은 충격과 슬픔, 곧 이어지는 자기변호와 의혹… 이 삼중의 감정을 동시적으로 처리하는 여인들은 마르셀과의 감추어진 관계를 숨기고 드러내면서 자신의 고유한 욕구를 얼룩처럼 드러내곤 한다. 때론 아주 슬쩍 실수인 양 때론 아주 당당하게 자기 욕망실현에 충실한 솔직함으로….

욕망의 분열성, 혹은 내면과 외면의 불일치가 인간 존재의 모순이자 신비이듯이 이 인물들의 개인적, 가족적 삶을 통과하는 욕망의 층위들이 하나씩 벗겨져나간다. 사소한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까지 번지는 두 자매의 얽힌 애증관계, 어머니와 딸 사이의 비밀과 거짓말, 탄생의 비밀, 오빠와 여동생의 아슬아슬한 감정, 하녀들과 고모, 주인마님을 통과하는 동성애, 충격적 사실은 아니지만 프랑스 부르주아 가부장적 생활문화의 하나인 쿠르티잔(courtisane: 주인남자의 침실 시중까지 들면서 같이 자기도 하는 섹스파트너)의 존재도 밝혀진다. 아무리 비밀과 거짓말이 없는 가족관계가 없다지만, 살인사건 풀기로 드러나는 이 부르주아 가족의 비밀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너무 다양하고 썩은 내음이 풍긴다. 음습하고 지저분할 수도 있는 이 사연들을 오종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불쑥 들이밀면서 각 캐릭터에 맞는 노래와 춤으로 한 단위씩 유쾌하게 정리해내며 다음 인물의 내면과 욕망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식으로 밀고 나간다. 그리하여 엄청난 가족간의 비밀과 거짓말 폭로가 주도하는 서스펜스드라마는 순간순간 유쾌한 뮤지컬 양식으로 분위기를 개선하면서 8인8색 심리코미디란 텍스트가 짜여지면서 오종식 영화세상은 우리 속에 도사린 욕망과 접속한다.

따라서 이 영화보기의 재미는 3세대에 걸친 프랑스 영화사를 여배우 이미지 아우라 속에 파노라마식으로 따라잡는 즐거움을 누리는 데 있기도 하다. 고다르의 말처럼 세계영화사란 오직 하나일 뿐이며 거기 주요 메뉴가 여배우의 얼굴에 대한 매혹이라면, 바로 그 점을 이 영화가 증명해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남성 공장장이 물신화한 남성주체적 시선에서 성적 매력의 대상으로서의 여배우 훔쳐보기로만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젊고 예쁜 여자만 성적대상으로 교환가치화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속에서 나이든 여배우, 흑인 여배우의 개성미를 살린 화면을 대하는 건 예외적인 일이 아닌가.

여배우들의 광휘

카트린 드뇌브는 60대에도 ‘프랑스인형’다운 차가움과 우아함을 간직한 부르주아 부인-어머니-딸 역을 카트린 식으로 해낸다. 언밸런스로 빗어올린 굵은 웨이브 금발, 표범무늬 코트란 물신성이 여기서도 그대로 발휘된다. 폭로된 그녀의 비밀, 즉 남편 아닌 옛 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그 애인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간직한 그녀는 <셸부르의 우산>의 비운의 여주인공이 간직한 트라우마까지도 얼룩으로 드러낸다.

연기파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주체적이며 강렬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계승하면서 카니발적인 캐릭터로 변모한다. <피아니스트>의 억압된 독신녀 이미지에, 안경 낀 기숙사 사감 같은 무성적이고 신경질적인 이미지는 삼류 로맨스소설 클럽에 가입해 비밀리에 형부를 유혹하는 속내를 드러내는 극단적 분열성의 폭로로 치닫는다. 심지어 후반부에선 리타 헤이워스처럼 원통형 드레스에 요부 이미지로 등장해서 억압해온 욕망을 폭발적 균열성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자유분방한 여동생-고모 역의 화니 아르당은 중년에도 여전히 눈부시다. 심지어 야하게 노래하는 모습은 과잉효과의 코믹성을 발휘한다. <이웃집 여인>의 관능적 매력을 물씬 풍기며 한 템포 늦게 그녀가 등장하자 화면에 불이 붙는 듯 달아오른다. 오빠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정이 혐의(?), 그러나 빗나간 사랑의 트라우마, 남자들과의 연애와 좌절, 혼자 자유롭게 사는 삶을 찬양하면서도 내면의 외로움을 토로하는 그녀는 심지어 양성애자이기도 하다. 간간이 이자벨 위페르의 위선적 욕망을 건드리는 로맨스 소설 <라 곤돌르 데 자망>(연인들의 곤돌라)을 발음하는 그녀의 억양과 표정를 담은 클로즈 숏, 거기에 폭발적 반응을 보이는 이자벨 위페르의 역숏은 냉소적 위트의 묘미를 보여준다.

주름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귀여운 여인의 매력을 간직한 할머니 역 다니엘 다리외,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미 영화사이다. 아무리 나이들어도 자기 잇속에 충실한 여성의 현실적 욕망 그 자체가 이 인물 속에서 재현된다.

에마뉘엘 베아르는 <마농의 샘>이나 <금지된 사랑>에서 보여준 가냘프면서 관능적인 자태와 유혹적으로 내리깐 시선을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마르셀의 정부로 하녀-쿠르티잔으로 위장취업한 그녀 또한 카니발적 캐릭터의 돌발성을 보여준다. 하녀여도 자기 주장과 입장을 불현듯 드러내 처음부터 가족들의 의심을 받지만, 자기 욕망에 충실한 면모를 때론 무심하게 때론 돌발적으로 밀고 나가는 복합, 분열적 인물의 신비함이 묻어나온다. 피르민 리샤르는 백인 부르주아 가정의 흑인 하녀란 상투성을 계승하면서 충직한 하녀란 전통적 관습을 보여주는 걸로 설정된다. 그러나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독자적인 계획과 레스비언 커밍아웃, 사랑하는 고모를 지키려는 관계에의 충실성은 오히려 그녀가 가장 믿을 만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도록 유도한다.

두 하녀를 다루는 오종의 시선에서 부르주아 가족의 부패함을 유쾌하게 풍자한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법칙>의 자기 계략에 속아넘어가는 주인님들과 꾀바른 하인 이미지가 겹쳐지기도 한다.

딸로 나오는 비르지니 르도양, 뤼드빈 사니에르의 깜찍한 용의주도함은 다채로운 여성들간의 차이와 개성, 주체적 욕망을 수행하는 화려한 꽃밭을 만드는 데 손색이 없다.

결국 추리소설 탐독가인 막내딸과 어버지가 공모한 계략은 8명의 여자들에게 시달리고 농락당한 마르셀의 주체적 결단으로 끝난다. 이 점이 오종의 최대 장점이다. 만일 이게 애초의 드라마적 설정처럼 가부장의 엿보기로 가닥을 잡아 마르셀이 시체연기로 여자들의 비밀과 아킬레스건을 파악한 데 힘을 얻어 헤게모니 복원으로 나간다면, 그건 맥빠지는 뻔한 드라마에 그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종은 이 여자들의 부의 근거, 사회적 신분의 말뚝이지만 욕망의 대상이자 억압을 표상하는 그를 결국 제거함으로써 이제 이 여자들에게 비밀과 위선을 한 꺼풀 벗고 좀더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선사한다. 그래서 오종영화를 보는 건 기이하게도 남자가 여성관객의 욕망 해소를 꼬인 방식으로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다는 소통의 쾌락을 나누어준다. 혹 세상이 왜 형제애로만 굴러가는지 낙심했다면, 그걸 확대 재생산하는 영화세상이 그들만의 역사성을 내걸어 <실미도><태극기 휘날리며>류의 남자-민족담론 대박 영화판으로 돌리는 다양성 없는 진부함에 지루해졌다면 이제 8명의 실속있고 매력적인 인간-여자들을 만나보는 것도 신선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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