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비평 3인 3색 [3] -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
2004-03-11
글 : 권은선 (영화평론가)

한국영화가 꿈꾸는 두 가지 ‘세계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려내는 새롭고도 선명한 좌표 위에 김기덕 감독의 베를린영화제 수상 소식이 겹쳐지면서, 다시금 ‘한국영화 신르네상스’라는 진단들이 지면을 장식한다. 한국영화공간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는 트라우마적인 방식으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경험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 이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세계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화공간 내부에서 전개된 지배적 욕망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영화에 대한 지역적 승리, 다시 말해 ‘대박 신화’와 국제영화제 ‘제패’였음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축제 무드 역시 이해할 만하다. 지금 남한의 국민들은 한국영화라는 장에서 다름 아닌 ‘태극기 휘날리는’ 자긍심을 발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김기덕 감독의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은 그 이전의 임권택 감독의 칸영화제 수상, 그리고 이창동 감독의 베니스영화제 수상과 패키지로 묶여 소환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들의 시장 독과점이 제기할 수 있는 한국 영화산업의 불균형 성장의 문제를 가려버리고 상상적인 방식으로 단숨에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한국형 블록버스터 기획의 첫 번째 국면이었다면,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서로 일종의 거울 반사 효과를 발휘하면서, 그리고 한국 영화관객 1천만명 시대를 이끌면서 매우 극적으로 그 두 번째 국면을 열고 있다. 이미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한국형 블록버스터와 민족주의 담론의 절합을 통해서 ‘민족적인 것’이 블록버스터가 요구하는 대단위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동력임을 입증했던 것처럼, 이들 영화들은 그 절합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안정된 노선을 취하고 있다.

역사 후퇴하고 여성 사라지다

“동시에 야만의 역사이지 않은 문명의 역사는 없다”는 발터 벤야민의 지적은 한국 근현대사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에 동시적이고 필연적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던 ‘야만의 역사’를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서사구조의 외양적 현혹과는 달리 이 두 영화들은 궁극적으로 그 어떤 깊이있는 역사인식이나 비판적 성찰의 통로를 열어내지 못하고 있다. 북파공작원 부대인 684부대를 소재로 한 <실미도>는 60∼70년대 한국정치의 황폐한 풍경화, 즉 ‘그’ 야만의 역사를 구조화하고 있는 국제질서와 분단국가 남한의 갈등 관계를 비켜간다. 신식민시대와 냉전체제라는 국제질서 속에서 남한은 구조적으로 과도한 대미 의존성의 덫에 갇혀 있었는데, 영화는 바로 이 국제/국내정치의 중층적이고 복잡한 맥락에 대한 사유를 철저히 괄호치고 서사적 공간을 ‘실미도’라는 특정 지역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철저하게 한국 내 지리적 공간인 실미도에 갇혀 있으며 심리적 공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훈련병들의 전우애와 비애에 포박되어 있다. 군부독재의 거대 권력망은 정보원 부장과 한 공군 상사로 축소되며 역사적 야만성은 훈련병들의 몸으로 치환되고 집중되면서 그것의 스펙터클을 통해 오히려 매혹적으로 전시된다.

<태극기 휘날리며>에 이르면 이러한 탈이념화 혹은 탈역사화의 정도는 한층 더 심해진다. 그 규모나 스펙터클에 대한 의존도 등을 고려할 때 <실미도>보다 훨씬 더 자의식적으로 블록버스터를 욕망하는 <태극기 휘날리며>는 영화 <친구>의 길을 따라간다.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표기하면서 연대기적으로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지만 그것은 전투장면의 전경화를 반복하기 위한 표지판일 뿐이다. 영화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지리·정치적 역사적 맥락의 복잡성을 피하려고 전투장면을 반복하며 우리에게 형제애로 덧칠된 상황의 표피만을 보여준다. 블록버스터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국전쟁을 그 소재로 취한 것은 전통적으로 전쟁영화가 영화 테크놀로지의 시험무대이기 때문이다. 이제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 시험무대를 통과해 할리우드 전쟁블록버스터와의 한바탕 전쟁을 벌이고자 한다.

이렇게 볼 때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로부터 명백히 퇴행하고 있다. <쉬리>나 <공동경비구역 JSA>는 적어도 탈냉전 세계체제의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동시에 냉전체제를 살아야 하는 남한의 지리·정치학적인 맥락에서 영화적 상상력을 구성함으로써 탈냉전과 냉전의 ‘비동시적 동시성’의 구조를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동경비구역 JSA>의 경우 다양한 민족 내부의 경계들을 가시화하면서 민족과 국가의 의미를 분리시키고 민족 내부의 이질적 힘들을 드러내보이지 않았는가.

역사 인식에서의 척박함과 더불어 내가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에 제기하고 싶은 문제점은 바로 젠더 정치학적 함의이다. 이 영화들에 등장하는 남성 주인공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군사영웅, 즉 민족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구해내는 군사영웅들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근대적 국가체제와 역사현실에 의해서 희생된 반영웅들이다. 그러나 블록버스터라는 형식의 전유는 반영웅적인 이 남성 주인공들을 또 다른 군사영웅으로 구현하면서 단호함, 용기, 인내, 형제애 및 전우애 등 이른바 남성적 미덕을 하나의 지표로 제시한다. 군사영웅들은 민족의 집단적 자아로 상상되고 이 (반)영웅의 형상은 심미화되며 그들의 거룩하고 비장한 매혹이 액션과 테크놀로지를 통해 강화된다.

이렇듯 이들 영화가 남성중심적 요소들을 특권화하고 ‘국민’ 혹은 ‘민족’을 남성성으로 규정할 때, 여성은 그 ‘민족’ 구성에서 어떤 방식으로 의미화되는가.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여성의 재현 자체를 봉쇄하면서 대단히 비성철적이고 단순논리적인 차원에서 여성을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은유화한다. 물론 이것은 특히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좀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가족주의와 관련되지만 <실미도>의 안찬이 그리워하는 어머니나 <태극기 휘날리며>의 형제가 호명하는 어머니는 모두 그러한 은유에 지나지 않는다. 이 남성중심적 서사에서 여성들은 온전히 고향인 어머니를 가리키기 위해 그 구체적인 몸을 상실한 채 사진 속의 이미지로 박제(<실미도>)되거나 육체에서 언어를 박탈(<태극기 휘날리며>)당한다. 또는 시대의 야만성을 재현하기 위해 처참하게 강간당하거나(<실미도>의 여교사) 매춘을 의심받는다(<태극기 휘날리며>의 약혼녀). 영화의 서사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어머니 대 창녀’라는 이분법적 남성 판타지의 양극단을 널뛰기할 뿐, 그 야만의 역사를 또한 견뎌내고 살아내고 통과해왔을 구체적인 여성들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야만의 시대를 표현하기 위해 도구화되고 타자화된 이 강간당하고 매춘을 의심받는 여성들은, 바로 그 시대적 야만성의 폭력의 구조 혹은 회로 속에서 여성들이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 그리고 동시에 남성적인 전쟁 메커니즘과 그것을 다루고 있는 전쟁 서사가 얼마나 젠더화되어 있는지, 얼마나 성화된 폭력과 은유에 의지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애도가 아닌 이벤트적 제의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목적론적일 정도로 예정된 비극적 결말을 향해 간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들은 어떤 ‘민족적 비애감’ 혹은 그와 관련된 ‘남성적 무력감, 무기력’에 그토록 몰두하는 것일까. 어떤 면에서 이 ‘김치 블록버스터’가 진정으로 폭파시키고자 하는 것은 관객의 누선 그 자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한국사회에서 발견되는 더 큰 해체적 맥락과 조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는 역사와 이데올로기 희생자들의 ‘희생됨’, 그리고 ‘무력함’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통해 글로벌 신자유주의 질서 및 현실 정치에 기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무기력을 대리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그러나 연민의 시선은 동시에 관객에게 편안하고 우월한 위치를 제공하는데 ‘과거’ 역사 속의 그들과 ‘현재’의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거리감을 확인시켜줌으로써 상대적인 안정감과 권력감을 제공한다. 이때 이 영화들은 국민 1천만명을 극장이라는 공간에 소환해서 벌이는 한판의 굿판과 같은 제의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진혼의식이 부재한,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애도작업이 결여된 민족 이벤트적인 제의다. 이 민족 이벤트 속에는 이 영화들이 표면적으로 그토록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군사주의와 연동된 전체주의가 내재화된 흔적이 어른거린다.

다른 담론들을 흡수통합하는 모순적 담론인 민족담론이 손쉽게 지배적 헤게모니로 작용하기 쉽듯이, 민족주의와 과도하게 결합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영토화는 다양한 소재와 제작체계 및 규모를 가진, 특히 소수 집단의 이해를 대변하는 한국영화들의 생장과 존립의 공간을 억압하는 헤게모니로 작용할 수 있다. 할리우드영화에 대한 ‘모방을 통한 저항’이라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기획은 블록버스터 체계에 내재해 있는 제국주의적 혹은 패권주의적 욕망 또한 국지적으로 관철시킴으로써 한국 내의 그리고 지구촌의 다른 지역들에서 생산된 마이너리티영화들을 억압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생산적인 효과를 지속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민족주의의 억압적인 안정성에 안주하지 말고 오히려 억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민족주의 개념 자체를 새로이 반성하면서 다양한 담론 및 내용적, 시각적 요소들과 부단히 절합함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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