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아이라이너로 눈꼬리를 쑤욱 치켜올린 진한 화장, 메두사처럼 어지럽게 뒤엉킨 굵은 웨이브 머리의 최지우가 몸에 달라붙는 슈트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 있다. 삐딱하게 선 채로 상반신을 이리저리 틀어 포즈를 취하는 최지우의 눈매가 서늘하다. 본격적인 촬영에 접어들었을 때 스튜디오에 렉시의 <애송이>가 흐른다. 그러자 최지우의 표정이 노래 가사를 따라 점점 더 도발적으로 바뀌어간다. “자신있음 이리 와봐. 애송이들아.” 팜므파탈 버전의 최지우가 낯설긴 하지만, 의외로 썩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재밌어요. 나 아닌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보여준다는 게.” 카메라를 잡아먹을 듯했던 최지우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하게 풀어져 있다. 문득 의문이 생긴다. ‘나 아닌 나’로의 변신이 재밌다고 말하지만, 정작 최지우에게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다양하지 않다. <아름다운 날들> <겨울연가> <천국의 계단>으로 이어져온 ‘눈물의 여왕’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서일 것이다. 종방 1개월이 지났지만, 스토리와 배우에 홀딱 빠졌던 열혈팬에게도, 씹는 재미로 본다던 안티팬에게도 <천국의 계단>의 ‘여진’은 남아 있다. 뒤늦게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히트하면서, 최지우 다큐멘터리다, 최지우 관광상품이다, 해외로부터의 구애도 뜨거운 이즈음이다. “지난해 가을부터 하루도 못 쉬고 일했다”는 증언이 아니더라도, 최지우가 데뷔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음을 인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지고보면, 최지우가 최루성 멜로라는 한우물만 판 것은 아니다. 영화로는 주로 로맨틱코미디에 출연해온 최지우의 캐릭터는 강단도 있었고, 애환도 있었고, 푼수끼도 있었다. 하지만 사슴 같은 눈에서 또르르 떨어져내리는 최지우의 눈물을 대중은 더 많이 사랑했다. 그런 최지우가 다시 한번 조심스러운 ‘배신’을 기도하고 있다. “우는 신이 없어서”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차기작으로 선택했다는 최지우는 천하의 바람둥이에 꽂혀, 숙맥에서 선수로 돌변하는 자신의 캐릭터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전한다. 눈물없이, 그는 어떻게 우릴 설득하려 하는지, 기다리고 또 지켜봐야 할 것이다.
-대체 최지우 불패신화의 비결이 뭔가.
=영화에선 아니었다. (웃음) 내가 다작하는 편은 아니어서, 1년에 1편 정도 해왔는데, 작품 복, 파트너 복이 있었다. 연기한 지 올해로 9년째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는 사람 앞에선 연기하는 게 쑥스럽다. <천국의 계단>의 경우는 친분이 있는 이장수 감독님과의 작업이라 무척 편했다. 백지 상태로 나를 비워내고서 역할에 몰입하고 파트너와 호흡을 잘 맞춘 것이 좋은 결과로 나타난 것 같다.
-영화에선 왜 아니었다고 생각하나.
=그래도 망한 영화는 없다. 작품 고르는 기준이 드라마와 영화가 다르진 않다. 사람들 먼저, 시나리오는 그 다음이다. 다만 영화는 촬영이 끊어졌다 이어지는 식이기 때문에 순간 집중력이 좋은 나로서는 감정 연결이 쉽지 않을 때가 더러 있었다. 이번엔 병헌 오빠랑 이미 호흡도 맞춰봤고, 내 또래 배우들이 여럿 함께하기 때문에 재밌게 작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 중국, 대만에서 인기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인가.
=엄마랑 샌프란시스코에 놀러갔을 때, 맨 얼굴에 슬리퍼 끌고 돌아다니다가 “유진(<겨울연가>의 캐릭터) 아니냐?”며 알아보는 일본, 대만인들과 많이 마주쳤다. 아줌마팬이 많은데, 동생처럼 친구처럼 아껴준다. 힘들겠다고 안쓰러워하고, 촬영장에 보양식 싸들고오고 그런다. 일본에서 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는데, ‘날 뭘 찍나, 내가 그 정도 되나’ 싶고, 작품 고를 때도 더욱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티팬도 적지 않다. 그들의 독설에 위축될 때도 있나.
=그럴 때는 지났다. 나이가 몇인데. (웃음) 처음엔 상처받았지만, 이젠 편안해졌다. 연기 못한다는 얘기 많이 들었지만, 꿋꿋하게 할 일을 해왔다. 보기와는 다르게 내가 좀 낙천적이다. 죽을 둥 살 둥 목숨 걸고 하는 스타일도 못 된다. 큰 욕심 부리지 않는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변화되고 있는 내 모습에 만족한다.
-연기가 재밌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언제부터 연기를 즐기게 됐나.
=연기에 대해 알 것 같다고 느껴진 게 <아름다운 날들>을 할 때고, 연기가 부쩍 재밌어진 건 <겨울연가>부터다. 카메라 앞에서 편해진 건 <천국의 계단>에 와서다. 전과 똑같이 우는 연기를 해도, 가슴이 후련해지곤 했다.
-청순가련 이미지를 고수할 것인가. 아님 대안을 생각하고 있나.
=그러니까 이런 영화(<누구나 비밀은 있다>)도 하는 거 아니겠나. 이건 청순가련과는 거리가 멀다. 멀어도 한참 멀다. 영화에서 나는 단 한번도 청순가련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없었다. 드라마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 같다. 성급하게 변신을 말하긴 싫다. 준비됐을 때 하고 싶다. 아직은 한 역할보다 안 한 역할이 많다. 천천히 도전하고 싶다. 멜로 하면, 최지우가 떠오르는 거,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새 영화에 베드신이 있다고 들었다. 많이 예민해 있겠다.
=나 안 벗는다고 선언한 적 없다. (웃음) <올가미>에도 ‘나름대로’ 베드신이 있었으니, 처음은 아니다. 흐름상 필요하다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감독님과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은 없다. 끈적끈적하게는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영화 자체가 재밌고 귀엽고 사랑스러우니까.
-연기 9년째다. ‘여배우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MBC 공채 탤런트로 뽑혔을 때 내가 제일 어렸다. 사방에 언니, 오빠뿐이었는데, 이제 현장에 ‘선배님’이라 부르는 후배들이 많이 생겼다. 그런 환경에 익숙해졌고, 더러 군기도 잡는다. (웃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여배우를 볼 때 눈가의 주름을 보려들지 말고, 눈의 깊이를 봐달라고. 나도 연륜을 쌓아가면서 눈빛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