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받았지만 지난 3월2일 만난 김기덕 감독은 우울했다. 최근 한 스포츠신문이 ‘김기덕 감독이 이승연을 다음 영화에 캐스팅한다’고 보도한 사건 때문이다. “1시간 동안 <사마리아>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이승연이랑 영화 찍을 생각도 있느냐, 그렇게 묻기에 기회가 된다면 그럴 수 있다, 고 답했다. 그런데 다음날 이승연이랑 영화 찍는다는 기사가 나간 거다. <사마리아>에 대한 인터뷰는 거의 쓰지도 않았다.” 그는 법적 소송까지 생각해봤지만 그냥 참는다고 덧붙였다. <사마리아>가 전하는 메시지가 그런 것이므로. 아무튼 김기덕 감독과 <사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사마리아>는 일반적 리얼리즘의 잣대로는 잘 보이지 않는 맥락을 갖고 있다. 비현실적 캐릭터와 성긴 이야기 구조 때문에 아주 쉽게 독해가 되는 영화는 아닌 것이다. 둘째 김기덕 영화가 변하고 있는지에 관한 궁금증이다. 김기덕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상황이니 말이다. 셋째 매춘을 바라보는 김기덕 감독의 시선이 <사마리아>만큼 투명하게 드러난 영화도 없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을 각오하고 그는 원조교제와 매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베를린영화제 수상에 대한 솔직한 소감을 들어보고 싶었다.
<사마리아>는 단적으로 말하면 매춘하는 딸과 그 아버지의 이야기다. 하지만 전체 영화를 둘의 이야기로 끌고 가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1부 <바수밀다>는 딸의 친구 재영의 이야기다. 왜 바수밀다 이야기가 들어가야 했나.
일단 원조교제의 전형성은 피해가고 싶었다. 원조교제를 하는 이유가 경제적인 것 또는 반항심리 둘 중 하나라는 건데 그런 전형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원조교제는 그냥 물감이다. 재료로 치면 물감인데 그림을 그린다고 치면 사실 관객이 물감을 보는 건 아니지 않나. 바수밀다 이야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준비하면서 어떤 설화집에서 발견했다. 2쪽 정도 짧은 이야기였는데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섹스로 포교를 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나 자신도 질문이었다. 그걸 <바수밀다>의 재영을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걷어지는 게 있잖나. 범죄라는 것이. 행동은 범죄인데 그 안에 깔려 있는 정서는 범죄가 아닌 것이 필요했다. 재영은 여진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라고 생각했다.
바수밀다의 사상을 ‘시선’으로 제안한다
원조교제 하면 무조건 따라오게 되는 선악판단을 걷어내자는 의도란 말인가.
어떤 선입견을 희석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희석되는 건 아닐 거다. 어쨌든 관객은 원조교제에 대해 범죄라고 여길 거다. 그럼에도 <바수밀다>로 시작한 건 남들처럼 규정하지 않겠다는 내 의지다. 재영의 이야기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말이 안 된다고 하겠지만 이 영화는 그게 말이 된다고 봤을 때 이해할 수 있다. 어떤 관계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원조교제를 하는 친구를 보는 시각, 딸의 원조교제를 보는 아버지의 시각, 그런 것이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의 3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자세히 관계망을 보면 세 가지 이야기는 세 가지 관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세 이야기를 다 봤을 때 어떤 것도 범죄가 아닌 걸로 다가왔으면 싶다. 아버지의 살인까지도 말이다.
<바수밀다>에서 재영의 캐릭터는 특이하다. 언제나 웃는 표정을 짓는다는 점이 그렇다. 경찰관이 들이닥쳐 아래층으로 떨어질 때도, 병원에서 마지막에 죽었을 때도 웃는다. 재영은 왜 웃고 있는가? 재영은 판타지인가.
여기서 가장 주목한 것은 내가 읽었던 설화집의 내용이었다. 그 느낌을 재영에게 담아보자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속담에 웃는 얼굴에 침뱉지 못한다고 하지 않나. 수십명의 남자와 섹스를 했을 텐데 그건 어떤 식으로 가능했을까. 바수밀다는 아이들의 욕구를 풀어주는 모성이 아닐까, 싶었다. <바수밀다>의 재영은 충격적인 캐릭터다. 어떻게 저렇게 미화시키느냐는 말이 나오겠지만 바수밀다는 모성을 넘어서는 초월적 성이 아니었을까 싶다. 재영은 계속 더럽지 않다고 말한다. 현실에선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나로선 감독 입장에서 바수밀다의 사상을 공개적인 자리에 내놓은 거다. 인간을 이해하는 시선의 하나로.
F i l m
o g r a p h y
1996년 <악어>
1997년 <야생동물 보호구역>
1998년 <파란 대문>
2000년 <섬>
2000년 <실제상황>
20001년 <수취인불명>
2001년 <나쁜 남자>
2002년 <해안선>
2003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2004년 <사마리아>
그렇다면 이 영화를 구상한 출발점이 바수밀다 설화인가.그렇진 않다. 원래 발상은 간단하다. 시나리오는 2년 전쯤 썼다. 그 사건을 들어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9살된 아이를 가족이 합의해서 생매장한 사건이 있었다. 대체 이 아이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으면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동의하에 산에 파묻었을까. 이게 사실인지 내가 꿈속에서 본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웃음) 내가 물어보니까 아무도 이런 사건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 그럼 내 꿈인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드는데 나는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아무튼 그게 굉장히 매력적인 소재여서 그 아이가 어떤 아이였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워낙 난폭한 이야기라 조금씩 다듬어갔는데 그러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가 됐다. 아버지가 딸을 죽이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딸의 도덕성에 심각한 결점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처음 쓴 시나리오는 굉장히 셌다. 딸이 아버지 친구를 좋아하게 되고 그러다 미쳐서 동네에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딸을 죽여서 묻는. 그때는 제목도 달랐다. 그것이 이 영화의 후반부에 판타지 장면으로 들어갔다. 바수밀다 이야기는 나중에 발견하고 끌어들인 거다.
재영과 여진의 관계도 특이하다. 재영이 섹스를 하고 나면 함께 목욕을 하고 성적인 교감도 나눈다. 그러다 여진은 재영이 다른 남자와 섹스 이상의 관계를 맺자 화를 낸다. 둘의 관계를 동성애로 설정한 것은 재영과 여진, 여진과 아버지의 사랑을 같은 차원에서 다루려는 의지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딸이 몸을 팔 때 아버지가 느끼는 감정은 친구가 몸을 팔 때 여진이 느끼는 감정과 겹쳐진다.
의지라기보다 당연한 거다. 사마리아(여진)가 바수밀다(재영)를 보는 관점과 소나타(아버지)가 사마리아를 보는 관점은 중복돼 있다. 하나는 친구고 다른 하나는 부녀지만 똑같은 애증관계가 이미 드라마 안에 존재하는 거다.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다. 사실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볼 때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캐릭터가 등장하니까. 여진과 재영은 같은 인물일 수도 있다. 여진과 아버지도 같은 인물일 수 있다. 가면을 벗고 본다면 셋이 전부 같을 수 있다.
실제, 증상 혹은 판타지
확실히 재영과 여진은 다른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여진이 원조교제를 하면서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재영을 판타지로 보게 된다.
내가 재영이 여진에게 던져진 질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점이다. 바수밀다라는 인물이 실제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인물이 있었기를 바라는 어떤 증상을 갖고 있다. 재영은 여진의 내성 안에 있는 어떤 판타지일 수도 있다. 여진은 섹스를 더럽게 보는 보편적 관념을 갖고 있지만 재영은 더럽지 않다고 말한다.
그 점이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공격받을 지점이다. 마치 모든 여자에겐 창녀의 기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주 직접적으로 해석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수밀다라는 설화 자체가 굉장히 남성적인 판타지다.
비판은 당연하다. 여성운동가라면 자신의 논리가 있을 것이고 <사마리아>가 거기 위배된다면 정당하게 비판할 수 있다고 본다. 논쟁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내가 과연 페미니즘의 관점을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한국의 여자는 모두 매춘심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냐, 고 묻는다면 내 관점에선 한국의 결혼제도에 매춘심리가 없지 않다고 본다. 대부분 결혼이 심리적인 이유에 기반한 서정적인 결혼이 아니라 물리적인 가치에 기반한 결혼이 아닌가. 한평생 한 남자에게 성을 제공하는 걸로 부를 얻는다면 그것도 매춘심리 아니냐고 질문하는 거다. 물론 이 시대를 살자면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야 된다. 결혼은 순수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야겠지. 하지만 눈에 보이는 현찰이 오가느냐 마느냐, 성을 제공하는 시간이 짧으냐 기냐는 달라도 비슷한 점이 있다. 그렇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