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
김기덕은 변화하는가? [2] - 우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2004-03-30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사마리아>에서 흥미로운 점이 그것인데 원조교제이건 매춘이건 특수한 한두명의 잘못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그렇다는 식이다. 매춘과 결혼에 대해 지금 말한 것도 연결되는 지점 같다.

그건 일종의 공범의식이다. 9시 뉴스를 볼 때 얼굴에 모자이크된 인물이 가해자고 시청자는 다 피해자냐?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하늘에서 인간을 내려다보면 인간 키가 3미터를 넘는 사람은 없지 않나. 아무리 커도 몇십센티미터 크다. 하늘에서 보면 다 똑같다. 과연 우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의 데이터가 있는가? 이 사회에. 사회가 어떤 그물망을 던져서 그물에 걸리는 사람은 악이고 빠져나가는 사람은 선으로 정리될 뿐이다. 그물코에 따라서 다 걸린다. 이 사회의 법과 제도는 그물코다. 그물코가 좁으면 걸리고 넓으면 빠져나오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이렇게 살지 말아야 된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영화는 한번도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이게 우리 모습이 아니냐. 극장에서 우리 모습을 한번 확인하고 살아가자는 거다. 내가 보기엔 <나쁜 남자>도 <사마리아>랑 다르지 않다. 보는 분들이 지루함 때문에 다르다고 말할 뿐이지. 내가 보기에 <사마리아>는 <나쁜 남자>와 <봄 여름…> 사이에 있다.

하지만 김기덕 영화가 변하고 있다고 말할 만한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가장 큰 것은 <사마리아>에서 아버지가 취하는 태도다. 아버지는 여진이 원조교제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장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지켜보고 여진을 만나러 온 남자들을 가로막는다. 이건 지금까지 김기덕 영화의 남자들이 취한 행동과 다르다. <섬>이나 <봄 여름…>에서는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를 안게 되면 그 여자를 죽인다. <사마리아>에서 딸을 죽이느냐 안 죽이느냐에 대해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딸을 죽이면 굉장히 자극적이고 충격적일 거다. 논쟁적인 영화가 될 것이고. 딸을 죽이는 결말로 갔다면 화두가 달랐을 거다. 딸과 함께 도덕성도 파묻어버리는 식으로. 어느 평론가가 <사마리아>가 영리하고 영악하다고 말했는데 나는 여러 가지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에 대한 이해라는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고, 도덕에 대한 관점에서 말할 수도 있고. 보편적인 잣대에서 아버지의 양보는 공범의식 때문이다. 이 사회의 성문화가 대부분 아버지의 시각이 만들어낸 것 아닌가. 매춘이 뭔가? 거래의 의미를 떠나서는 성을 영유할 수 없다는 것 아닌가? 더이상 소통으로 성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매춘을 한다. 아주 비참한 입장이다. 스스로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응징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살인이 왜 일어나는가? 딸의 성관계를 직접 봤기 때문이다.

처음 시나리오는 딸을 죽이는 결말이라고 했다. 결국 그렇지 않은 결말을 택했고 그것이 김기덕이 달라졌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전의 김기덕 영화라면 당연히 딸을 죽였을 텐데….

나로선 내 영화를 그렇게 이해하는 게 오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지금까지 내 영화가 증오와 복수로 이뤄진 것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 영화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 육질의 생사가 아니라 영혼의 생사를 말한다면 꾸준히 영혼을 살리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죽였느냐 안 죽였느냐가 아니라 아버지의 캐릭터에서 변화가 느껴진다. 굉장한 분노가 있지만 계속 억누르고 서서히 폭발한다. <봄 여름…> 이후에 만든 영화여서 그런지 어느 정도 수양이 이뤄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오해가 하나 있다. 처음 발견하자마자 경찰서에 끌고가거나 죽여버리거나 하지 않은 건 김기덕이 다양하게 잔인한 복수를 보여주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인간의 분노가 서서히 끓어오르는 걸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있는 거다. 그건 더 잔인한 것일 수 있다. 그래서 5가지 응징의 방식을 보여준다. 한 아버지가 아니라 5가지 응징을 통해 이 시대 아버지들을 두루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시대 60만 창녀의 아버지 입장에서, 가해자의 입장에서

딸을 죽이는 판타지 장면은 아버지의 욕망을 보여주는 것인데 여진이 꾸는 꿈으로 표현했다. 그러니까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버지의 살의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라 딸의 죄의식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바꾼 것인가.

아버지와 딸이 동시에 꾸는 꿈으로 봤다. 여진을 이렇게 봤으면 좋겠다. 여진은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를 관통하는 인물이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로서 죄책감이 있는 인물이다. 원조교제를 도덕성의 결여로 보는 거니까 아버지가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불안이 있는 거다. 결국 판타지로 처리했는데,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 나쁜 일을 겪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죽어선 안 된다. 생명의 소멸은 모든 것을 정지시킨다.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고 아수라장 같은 세상을 살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영화에서 특이한 점으로 아버지의 시점을 도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 영화는 어떤 여고생을 그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아버지를 그릴 것인가, 라는 고민에서 나온 산물이다.

맞다. 이 영화를 구상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만 했다. 나도 아버지니까. 연출의 변에서 “이 시대 60만 창녀의 아버지 입장에서, 나도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린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전작들에서 아버지는 굉장히 권위적인 인물이거나 아주 무력한 존재였는데 <사마리아>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이전까진 아버지를 올려다보면서 찍은 듯한데 <사마리아>에선 감독 자신이 아버지라는 느낌이 든다.

모르겠다. 내가 그렇게 늙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난 영화를 하면 매번 캐릭터가 이동하는 편이다. 그리고 한 인물을 멀리서 줌으로 당겨서 영화로 만드는 식이다. 유일하게 <봄 여름…>이 와이드로 좀 밀어본 영화라면 대부분 한 인물을 클로즈업으로 당긴 영화다. 그게 아버지가 됐을 뿐 앞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

영화에서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가 집에 들어와 잠든 딸을 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에서 딸에 대한 아버지의 성욕을 느낄 수 있었다. 카메라가 여진을 훑고가는 시선은 딸이 여자라는 점을 강조한다.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어디까지 도덕적인 것이고 어디서부터 부도덕한 것인가, 그 사이에 아주 작은 차이만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나쁜 남자>에서 한기가 선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런 시각에서 연출한 건 아니다. 얘가 섹스를 하다니, 섹스의 구조가 얘한테 있다니, 그런 시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사회의 아버지를 대변하는 인물로서 본다면 자기 딸에 국한된 게 아니라 여러 여성과 중첩된 것이니까 성욕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거다.

시나리오를 보니까 자동차 바퀴에 돌이 끼어 있는 장면이 없다. 그 장면은 현장에서 구상한 것인가.

내 경우엔 시나리오에 얽매이는 편이 아니다. 영화 찍으면서 중요한 게 내가 그 감정에 편입되는 거다. 난 대부분 영화를 순서대로 찍는데 감정이 영화의 진행과 똑같이 흘러간다. 순서대로 찍으면 내 감정이 바뀌는 것에 따라 장면에 대한 구상이 바뀔 수 있다. 아마 장면의 미숙함도 내가 순서대로 찍기 때문에 생기는 건지도 모른다.

부감숏, 신의 시점

연출의 변에서 “어쨌든 첫 단추를 잘못 낀 것이다”라고 표현했는데 <사마리아>는 결국 인간은 왜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영화 같다. 인간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신에 대한 항의와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신에 대한 복종이 동시에 드러난다. <나쁜 남자>와 <사마리아>의 마지막에 나오는 신의 시점을 의미하는 부감숏이 의미하는 바는 그런 느낌이다.

신에 대한 내 관점이 그렇다. 종교와 삶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부감숏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신의 시선이기도 하지만 살면서 가끔 전체를 보는 관점을 갖지 않으면 살기 힘겹다는 얘기다. 인간이 커봐야 다른 사람보다 2배 이상 큰 사람 없다. 멀리 위에서 보면 객관적으로 볼 기회를 갖게 되는 거다. 객관화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신의 이름을 빌리는 거다. <나쁜 남자>나 <봄 여름…>이나 <사마리아>에서 부감숏이나 롱테이크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빠져나오는 카메라 움직임이다. 회화를 예로 들면 루브르에 가면 살육장면을 그린 그림이 있다. 그건 잔인한 그림이지만 잘 그렸다고 말한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다른 게 보이는 거다. 우리 삶도 그렇다. 여기저기 문제가 있다고, 힘들다고 말하지만 그게 삶이다. 인정하자는 거지. 인정이라는 말도 무례한 표현이다. 그냥 삶이 그런 거다. 인류 역사가 수많은 독재자가 칼총을 들었지만 해결된 건 하나도 없다. 우린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 아닌가. 여진도, 재영도, 아버지도.

지난번 시사회에서 본인이 언급한 사실이지만 명백한 NG장면(촬영장면을 구경하는 행인이 그대로 노출된 장면이 들어 있다)이 있는 영화로 베를린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아까 순서대로 찍기 때문에 장면의 미숙함이 발생할 수 있다는 말도 했지만 김기덕 영화를 볼 때마다 다음 장면으로 빨리 넘어가야 한다는 감독의 다급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영화를 찍을 때 중요한 것은 어떤 리듬이다. 설명하기 힘들지만 영화를 찍는 건 제시간에 가야 탈 수 있는 기차시간 같은 면이 있다. 행인이 보는 장면도 찍을 당시엔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안 보였다. 내가 빨리 찍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그 순간엔 내가 찍는 장면의 의미만 보인다. 아주 위험한 결론이 될 수도 있지만, 남들 보고 이해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는 결론이지만, 그렇게 된다.

당신들의 시선이 궁금하다

그런 다급함이 느껴지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여진이 처음 섹스를 하는 장면이다. 타이밍이 너무 빠르고 뉘앙스가 없는 연기 때문에 실소를 터트리게 된다. 고백하자면 난 아마추어 같은 면이 있다. 촬영만 봐도 대부분 신인들과 작업한다. 게다가 촬영기사한테 권한을 주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충무로에서 잘 찍는다고 소문난 김형구나 홍경표 기사랑 일하지 않는다. 제작비 문제도 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느낌은 둘로 나눠질 수 없다. 앵글과 렌즈 밀리수도 내 느낌이기 때문에 내가 결정하는 거다. 나에겐 렌즈 밀리수까지 정해놓는 철저하게 자로 잰 듯한 관념이 있고 그건 좋은 촬영감독이 있다고 나눠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끝으로 아마 수십번 같은 질문을 들었을 텐데, 베를린영화제 감독상 수상이 개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다소 정리된 답변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질문은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다. 그동안 김기덕 영화에 대해 이래저래 말했던 사람들에게 이번 수상으로 당신의 태도가 바뀌었느냐, 물어보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김기덕 영화를 오해하는 누적된 어떤 것들이 20%쯤 걷어지길 기대한다. 영화라는 총체성에서 진정으로 이해되지 못한 김기덕에 대한 시선들, 해석들에 대해서 새로운 데이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그분들이 다시 한번 고민해줬으면 싶다. 소감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지나치게 의식한 말이 됐지만, 상을 받았어도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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