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호의 영화적 코멘터리
<효자동 이발사>임찬상 감독이 저한테 처음 시나리오를 준 건 사실인데 저를 염두에 두고 쓴 건 아니고, 제가 안 한다 그러면 어떡하겠어요. 근데 다행히 내가 그 기간에 작품이 계획된 게 없었고 그래서 아주 운이 좋았죠. 서로서로 운이 좋았어요. 청어람쪽에서도 그 작품이 아 이런이런 작품이 있습니다, 언제쯤 나옵니다, 그래왔던 게 아니라 느닷없이 온 거고 나도 전혀 모르고 있다가 느닷없이 받게 된 거고. 그렇다고 시간이 남아서 이 작품을 한 건 아니고. (웃음)
외형적으로 보면, 60년대 초반부터 70년대까지의 정치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드는데,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이건 주인공의 어떤 캐릭터가 대변이 돼 가지고 영화가 설명이 되고 작품을 이끌어가는 그런 영화라기보다는 또 정치적인 사건이 중요시되고 그 바탕이 굉장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그런 작품이 아니구요, 그건 일종의 배경 그 자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따뜻한 한 인간을 이야기하는 거 같아요. 그게 성한모라는 개인의 인간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를 관통해왔던, 어떻게 보면 우리 시대의 아버지죠. 아버지로 대변되는 전 국민의 얘기를 하는 것 같고, 그런 점이 중요하게 생각이 되더라고요. 암울했던 시대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든지 흑백논리로 그 시대를 재단한다든지 그런 시선으로 작품을 만들어나가고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시대에 대한 정의 이런 게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왔던 아버지의 모습들, 사람들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마루구스 병(‘마르크스’에서 따온 이름. 극 중 등장하는 허구의 설사병이다)이든 낙안이의 다리가 낫는 결말이든 그런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게 <효자동 이발사>의 영화적인 문법이라고 생각해요. 현실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거지만 그걸 우화로 과감하게 표현하는 데 <효자동 이발사>의 영화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만약에 그 결말이 아주 현실적으로, 낙안이가 영원히 병신이 돼서 그럼에도 행복하게 산다는 자조적인 결말로 갔다면 리얼리티는 있을지 몰라도 영화적인 힘이라는 건 더 떨어질 거라고 생각이 드네요. 초반부터 어떤 분위기로 갈 거라는 게 설명이 됐기 때문에 그런 판타지 같은 결말이 현실적인 리얼리티보다 오히려 더 세지 않을까….
성한모 성한모가 소신있는 인물이냐…. 소신이라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닌 것 같아요. 소신있는 인물은 아니구요. 그 시대는 소신을 가지고 살았던 시대는 아닌 것 같아요. 그저 나라에서 시킨 대로 아 이게 맞는 거구나 그러면서 따라가는 것이 가장 편안하고 그랬던 시대지. 그 시대에 소신있게 산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극소수에 불과할걸요? 그냥 착하게 사는 거죠. 착하게. 가족 위하고.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 가족들을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게 해줄까 하는 보편적인 정서를 가지고 착하게 살았던 인물이지 소신있게 주장한다든지 자기 인생을 개척하고 이런 인물은 아닌 것 같다는 거죠. 단지 그런 사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거는, 누구나 다 그랬으니까.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에서는 소심하고 또 무능하다기보다 무식하고 바보스러운 인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대에는 가장 보편적인 인물 중 한명이 아닌가. 근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안타까운 인물인 거지.
이발소 밖을 나오는 장면에서 유리를 박살낸 것은…,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깨진 거고요, 일부러 깨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사실은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성한모가 울분이랄까 그걸 표출하는 장면인데, 리허설 때는 자연스럽게 깨졌는데 느낌이 나쁘지 않아서 슛 들어갈 땐 의식하고 한 점은 있죠. 근데 그렇게 유리창이 깨져봐야 성한모란 사람은 얼마나 작고 그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별볼일 없는 목소리인가가 오히려 그 다음 장면에서 보여져요. 그래서 이상하지는 않더라구요. 그렇게 보면 그건 전혀 과격한 표현이 아니죠. 그 부분에서 “감히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들어놔! 니네들 내가 누군지 알아! 내가 청와대 이발사다, 이 새끼들아!” 라는 대사는 실제로는 다른 식으로 표현이 돼요. 대사도 없고. 시나리오상으로는 그게 강렬하게 와 있는데 영화적으로는 그렇게 직설적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장면은 참 좋은데….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한모의 울부짖음은 누구에게 할 수도 없는 거 같아요. 그 사람이 나름대로 아들의 비극을 아버지로서 막아주지 못하고 그걸 해결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자학이죠. 자학 같은 외침이라고 생각이 들고. 소시민이 가지고 있는 안쓰러움이랄까 그런 거죠.
낙안이가 붙잡혀갔다 온 뒤에 생기는 성한모의 변화라는 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성한모의 캐릭터가 중요한 건 아닌 것 같구요, 영화적인 문법을 부각시키기 위해 비약시킨 캐릭터라는 느낌은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성한모의 변화가 입체적으로 보이는 영화는 아닌 것 같구요. 당시 그 시대를 관통했던 시민의 대변상일 뿐이죠. 그러니까 큰 변화는 없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연기했구요. 성한모에 초점이 맞춰지면 오히려 이 영화는 안 좋은 영화가 될 수 있고 작아보일 수 있죠. 성한모는 어디까지나 작품 전체의 공기를 전달해주는 인물이에요. 가교 역할을 하는 건데, 그 가교가 오히려 돋보이고 앞에 나서보이면 분위기를 전달하는 기능이 가로막히는 것이죠.
송강호의 정치적 코멘터리
새마을 운동 일요일 아침마다 동네에서 새마을운동 노래 틀어주면 다 나와가지고 풀 뽑고, 잡초 뽑고, 그랬죠. 일요일 아침마다. 그땐 시골인데도 사람이 많이 살았어요. 지금은 애들, 젊은 사람들 다 도시로 가서 노인들밖에 안 살잖아요. 가구 수도 별로 없고. 그땐 굉장히 많았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우글우글 모이면 공터에 학생들이 꽉 찼었어요. 그 풍경이 어떻게 보면 그립기도 해. 왜냐하면 요즘 시골에 가면 그런 풍경이 없으니까. 워낙 인구가 없으니까 있던 학교도 폐교하고 그러잖아요. 근데 그땐 그거 하난 좋았어요. 온 동네 어른부터 애들까지 다 나와가지고. 참 살 만했던 시골이었죠, 그땐.
* 박정희10·26 때 기억 중에 아주 생생했던 게, 집에 TV가 없었고 라디오밖에 없었는데 아침에 라디오방송을 듣고 있는데, “서거하셨다” 이런 말이 나오는데, 저는 그때 서거라는 말을 몰랐어요.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서거? 어디 아픈가? 어디 휴가를 갔나? 멀리 갔나? 되게 헷갈리는 거야. 근데 자꾸 서거라는 말을 하고 이래가지고, 할머니한테 물어볼까 해도 할머닌 더더욱 모를 테고, 근데 언뜻 좋은 소린 아닌 거 같아. 아무튼. 어딘가 심하게 좀 아픈 모양이다. 그래서 국가 수행을 못할 정도로 아파서 쉬어야 되나보다, 이 정도로 해석을 하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는데, 나보다 한두살 많은 중학생 누나가 막 울면서 학교를 뛰어가는 거야. 그때 알았죠. 아 대통령이 뒤진 모양이구나. 이게 서거라는 말이구나. 그러면서도…? 왜 울고 갈까. 대통령이 죽은 게 그렇게 슬픈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나는데…, 하여튼 그 여학생 누군진 잘 모르겠는데 막 울면서 가더라구요.
* 영화인 260여명 민노당 지지선언저는 뭐 정치적으로 그분들이…, 대부분 제일 앞에 선 분들이 다 저하고 가장 친했던 분들이 또 가장 잘 알고 있는 분들이던데, (웃음)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근데 저는 뭐 특정하게 개인적으로 어떤 정당을 지지하지는…. 근데 투표할 때는 어떤 정당을 지지를 하죠. 근데 그렇게 대외적으로 발표를 하면서까지 지지할 정도로 그만큼 제가 정치에 관심이 있나… 그런 생각도 들고. 가짜로 할 순 없잖아요. 그죠? 근데 심정이 가더래도 내가 의지나 신념이 나름대로 조금이라도 있어야 되는 건데 그런 건 아직까지 깊이 생각을 안 해봤기 때문에, 그렇게 뭐 참여를 하고 그럴 수는 없죠. 가짜로 할 수는 없죠. 사실 좀 놀랬죠. 민노당의 정책이나 사상에 대해서 이렇게 많이, 어떻게 보면 영화인들이 좀 주류라면 주류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적으로, 예술하는 분들이래서 그런지, 그게 정책적인 것 때문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근데 예술을 하는 분들이고, 예술이라는 건 사상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워야 되고 가장 양심적이고 민주적이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게까지 많은 분들이 공개적으로 할 줄은…. 저는 깜짝 놀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