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비평 릴레이]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허문영 영화평론가
2004-05-0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오래전, 붉은 다리 아래 죽음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을 마시고 그 물이 기른 곡물을 먹은 사람들은 온몸이 후벼 파듯 아파오고 뼈가 부서져 내리며 죽어갔다. 지독한 통증 외엔 그 병에 관해 알지 못하던 사람들은 그것을 일본어로 ‘아프다’는 뜻의 이따이이따이병이라 불렀다. 후에 그것은 카드뮴 중독이라는 공해병으로 밝혀진다.

실직한 중년 오스케(야쿠쇼 고지)가 도쿄를 떠나 그곳을 찾아왔을 때, 그는 40여년 전의 참화를 알지 못한다.(영화에서도 슬쩍 언급만 할 뿐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철학자로 불리던 부랑자 노인 타로에게 붉은 다리 곁의 집에 보물을 감춰뒀으니 찾으라는 유언을 들었을 뿐이다. 오스케는 붉은 다리 곁의 집에서 이상한 여인 사에코를 만난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이 두 남녀가 만나 잘산다는 얘기다. 매우 싱거운 줄거리다. 노장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 싱거운 이야기에다 외설적이고 괴이하며 코믹한 판타지를 가미한다. 오스케를 만난지 한 시간도 안돼 아랫도리를 벗고 달려드는 여인은 섹스를 시작하자마자 물을 분수처럼 뿜어낸다. 어처구니없게도 물이 방안을 넘쳐 강으로 흘러들자 물고기가 몰려든다. 물을 이렇게 빼지 않으면 여인은 도벽이 발동된다. 오스케는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여인의 문제를 해결해준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순진한 그러나 확신에 찬 여성예찬이요 성예찬이다

알고 보니 여인과 함께 사는 할머니는 부랑자 노인 타로의 옛 애인이었다. 할머니도 물의 여인이었으며, 떠나간 타로를 기다리며 평생을 살았다. 타로가 말한 보물이란 다름아닌 여인 혹은 여인의 물이었다. 불행은 남자들이 그곳을 모르거나 떠나면서 비롯됐다. 타로는 끝내 죽었지만 오스케는 그곳으로 와야 한다. 그곳이 생명의 근원이다. 오스케는 꿈에서 태아의 모습으로 양수 안에 잠들어있다.

이 영화는 매우 순진한 그러나 확신에 찬 여성 예찬이요, 성(性) 예찬이다. 이마무라 쇼헤이는 그것을 이미지로 먼저 말한다. 유난스럽게 붉은 다리와 그것에 이어진 짙은 넝쿨과 집의 형상은 벌거벗은 여성의 하체와 흡사하게 꾸며져 있다. 사에코가 죽은 어머니를 회상할 때, 어머니는 정체불명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남근석을 세워놓고 굿을 벌이다가 물에 휩쓸려간다. 남근이 군림하는 세상은 병든 세상이다. 또한 홀로 남겨진 질 또한 병든다. 둘은 만나야 한다. 남근이 질에 포근히, 그리고 의심 없이 안길 때, 비로소 세상이 정화된다. 여인의 물은 그 자체로 성적 엑스타시의 표현이며, 죽은 물을 정화해 물고기를 다시 불러들이는 생명수이자 또한 갈라진 세상을 흐르며 이어주는 다리다. 그래서 그것은 따뜻하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이마무라 쇼헤이의 초기작은 물론이고 최근작들에 비해서도 뛰어나진 않다. 주변 인물들의 생기가 부족하고 에피소드들도 그리 신랄한 편이 아니다. 그래도 웃기고 놀랍다. 내년이면 80살인 이 능청맞은 노인은 우아하게 세상을 관조하기는 커녕 빨리 뛰어가서 여인을 품으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그것이 너를 구원하며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황당무계하지만 잊기 힘들다. 자궁처럼 생긴 해안 바위틈에서 의심과 갈등에서 벗어난 두 남녀는 다시 서로의 몸을 탐한다. 여인의 몸에선 어느 때보다 힘차게 물이 솟아오르고, 새들이 몰려들어 그들의 결합을 축복한다. 전작 <간장 선생>의 마지막 장면에서 남근 모양의 흉측한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던 바닷가에는 이제 여인의 물이 햇빛과 만나 빚어낸 아름다운 무지개가 떠오른다.

일찍이 <일본곤충기>(1963)에서부터 창녀를 캐스팅해 일본 사회의 치부를 관찰한 이마무라 쇼헤이에게 남근이 유린한 여성들의 무서운 생명력은 평생의 주제였다. 한 인터뷰에서는 “창녀를 경멸하는 문화를 용납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짓밟히고 버림받지만 그의 여인들은 자기 연민에 빠지기는커녕 차라리 추악해지면서 더욱 강해진다. 이마무라는 그들의 ‘혐오스런 힘’을 미화하진 않았으되 사랑했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그의 여성예찬론의 대단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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