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무라 쇼헤이의 새로운 화두
이마무라 쇼헤이는 오즈 야스지로가 지은 천상의 정신세계를 등지고 떠나와, 마다할 수 없는 육신의 늪에 뛰어들면서 거장이 된 감독이다. 그의 날인이 되어 장애와 억압을 거침없이 뚫어버리는 리비도의 분출은 그 욕망의 태동을 피와 살의 섞임으로 갈파하면서 또는 성교와 살인과 복수로 점철하면서 좌충우돌 한 세기를 건너왔다. 하지만, 요상한 것은 오즈를 떠나온 이마무라 역시 세계가 웅크리고 있는 집이 다를 뿐, 오즈만큼이나 강박적으로 같은 이야기에 집착해왔다는 사실이다. 2001년 제작되었으나, 국내에서는 최근 개봉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도 그 반복의 연장선상에서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그의 영화세계를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여성 욕망을 유쾌하게 그려낸 작품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이다(이 점에 국한된 내용은 450호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프리뷰에 썼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지나가는 것은 이 영화를 지나치게 평범한 시선으로 보도록 유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우려는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이 전대미문의 역작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나기> 이전까지 곧잘 불쾌와 혐오의 미학으로 표현되었던 어떤 ‘화두’가 <우나기> 이후 형식적 전환의 모색로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여기서 말하고 싶은 그 화두란, 혹은 지금까지 정작 말해지지 않은 그 화두란, 이마무라가 꾸려가고 있는 ‘커뮤니티의 모습과 그에 대한 태도’이다.
<우나기> 이전:인간 커뮤니티에 대한 불신
먼저 간략하게 말해야 할 것은 <우나기> 이전까지 커뮤니티를 둘러싼 불쾌의 미학이 어떤 경로를 거쳐 완성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도둑맞은 욕정> <끝없는 욕망> <니시 긴자역 앞에서> <작은 형>과 같은 초기영화를 보면 처음부터 그의 영화가 불쾌의 환상에 매달렸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돼지와 군함> <일본 곤충기> <붉은 살의>를 거쳐 이마무라 쇼헤이의 영화를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도록 한 <인류학 입문>에 이르면, 이제부터 이끄는 것은 피하지 못하고 부딪치는 사방팔방 욕망의 줄다리기이다. 그리고 그것의 상대적 주인은 여성이다. 이마무라는 여성을 둘러싸고, 씻을 수 없는 업보를 씌우면서, 가족 커뮤니티 안으로 욕망의 씨를 산포시켜 근친상간의 망을 형성하거나(<인류학 입문> <복수는 나의 것> 등), 강간으로 조여오는 죄악의 사회 커뮤니티(<돼지와 군함> <일본 곤충기> 등)와 끊임없이 대면시킨다. 이때 여성주인공은 그 깨진 가족과 짓밟힌 사회 속에서 어떻게든 돌파를 시도해내는 강인한 인물로 변모한다. 이 순간 성애의 욕망은 치욕의 과정을 딛고 역설적으로 해방의 지점에 이르지만, 그 ‘인간’ 커뮤니티 자체- 또는 일본열도- 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미지수로 남는다. 혹은 전적으로 곤충과 동물로 비유되는 자연체계의 논리를 통해서만 이 둘 모두를 설명하고, 해방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여성과 가족과 마을과 규율로 이어지는 커뮤니티망’의 관계를 보여주는 정점이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70살이 넘으면 나라야마에 버려져야 한다는 마을 공동체의 규율에 오히려 복종함으로써 발휘되는 할머니의 비저항적 의지는 인간의 세계를 자연의 순리 안에서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이것이 바로 짐승의 커뮤니티 안에서 본능과 조응하며 살아나가는 방식에 대한 이마무라식 은유였다.
<우나기> 이후:과거를 등지고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다
전환은 <검은 비> 이후 8년 만에 돌아온 <우나기>에서 확실히 나타난다. 그리고 <간장선생> 이후 만들어진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우나기>의 속편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간장선생>은 부분적으로 이 두 영화를 연계한다(<간장선생>의 아카키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달린다.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요스케는 사에코를 치료하기 위해 역시 달린다. 또는 요스케가 직업을 얻을 수 있었던 건 그전에 일하던 어부가 “간이 부어서 입원했기 때문”이다. 간염에 걸리면 간이 붓는다). 따라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과 <우나기>를 오고가며, 때때로 <간장선생>을 기억하며 그 형식을 들춰내야만 한다. 거기에 지금의 이마무라가 꿈꾸는 새로운 커뮤니티가 자리잡고 있으며, 동시에 일본에 보내는 그의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나기>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플롯 순서에 먼저 집중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이런 식이다. 1.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주인공은 사건을 맞이한다. 2. 주인공은 어디론가 떠나가, 거기에서 직업을 얻고 자리를 잡고, 우연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3. 어느 날 그들 앞에 외지인이 나타나고 한바탕 소동에 휘말린다. 4. 그 소동이 끝나고 나면 두 사람은 사랑을 재확인하고 그 마을에서 삶의 터전을 꾸린다.
먼저 <우나기> 1. 주인공 야마시타는 아내의 외도를 알리는 ‘편지’(중요한 모티브!)를 받는다. 장면을 목격한 야마시타는 살인을 저지른다. 2. 가석방으로 출감한 야마시타는 어느 마을에 정착하여 이발사를 하던 중에 하토리를 만나고, 그녀는 이발소에서 일하게 된다. 3. 갑작스레 이 마을에 들어온 야마시타의 감옥동기는 그를 협박한다. 또 하토리의 전남편이 쳐들어와 이발소를 엉망으로 만든다. 야마시타는 또다시 살인을 저지를 뻔한다. 4. 다시 야마시타는 감옥으로 들어가지만, 1년 뒤 그와 하토리는 가족이 될 것이다.
주인공들이 영화의 시작에 놓여 있었던 그 커뮤니티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야마시타처럼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건, 요스케처럼 실직으로 인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건, 이마무라는 영화가 시작하면 곧장 주인공을 그곳에서 떠나게 만든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가족 구성원은 미련없이 버려진다. 그들은 과거이기 때문에 버려진다. 그래서 야마시타는 아내를 살해하도록 되어 있고, 요스케는 한번도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을 가질 수 없게 되어 있다. 물론, <우나기> 이전의 영화에서도 가족은 찢어지기 위해 있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새로운 가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차이다. 과거를 등지고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 그 점이 이 두 영화에서는 중요하다.
‘물’- 스스로 치료하는 이마무라
여기에는 항상 위기가 찾아든다. 또 다른 외지인의 출현이 그것이다. 이 외지인의 역할은 주인공의 업보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며, 그로 인해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위함이다. 또, 영화자체의 형식이 메타포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이 순간에 알게 된다. 야마시타를 찾은 감옥동기는 ‘살인행각’의 광기를 반성하지 않고 있다며 그를 꾸짖는다. 아내를 살해하도록 만든 그 편지는 처음부터 없던 것이며, 그것은 야마시타의 성적무능이 불러온 환상이었을 뿐이라고 질책한다. 정말 그럴까, 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그 편지가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이 점에서 그 편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그러니까 실체를 알수 없는, 하지만 그것이 진짜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광적인 살인을 저지르게 한 그 편지는 <간장선생>의 아카키 선생이 환자에게 매번 확신하며 진단해주던 ‘간염’이라는 병균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간장선생>에서 그 간염의 정체는 무엇이었던가? 국수주의의 시기에 창궐하던 대동아 해방의 정체없는 의무감이 바로 아카키 선생이 치료하고 싶어했던 일본의 간염 아니었던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타로가 ‘전시’에 숨겨놓았다는 금불상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생각하자. 동시에 우리 가족은 그때 모두 미쳐 있었다는 타로의 대사도 기억하자. 요스케는 타로와 동일한 상황에 처하지만, 결코 답습하지 않는다. 이마무라는 일본의 근대사에 대고 살인의 광기로 얼룩진 전쟁의 행적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일깨우고 있다. 전쟁 세대 타로가 하지 못한 치료를 요스케가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에야 생명이 살아난다고 믿는다.
그들의 업보와 광기는 이제 ‘미수’에 그치면서 새 터전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터전의 생명력은 ‘물’- 이마무라 영화의 상징적 터전- 과 관련을 맺으며 보장된다. <우나기>, 즉 뱀장어가 외지로 떠나는 서사를 대변할 때, <간장선생>의 소노코가 마치 인어처럼 벌거벗은 채 물속에서 튀어오를 때, 그리고 물고기 귀고리를 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의 사에코가 섹스를 하면서 물을 방사할 때, 그 터전은 치유되면서 아름다워진다. 때문에 이마무라 쇼헤이는 이제 강간당하는 여성을 설정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생명력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화술을 갖게 된다. 동시에 이마무라가 새로워지라고, 욕망하라고 주문을 거는 것은 여성만이 아니라, 마을이며, 사회이며, 국가이며, 그것들의 형성이다. 과잉의 독기를 부려가며 불쾌의 환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시절 작품들에 대해, 이 두편의 (혹은 세편의) 영화는 일종의 자기반영적 치료제로서 기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