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어려운 아내 대신 쉬운 여자에게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2004-05-27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은 ‘여성 예찬’이 아니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다른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을 ‘여성예찬’으로 평했다. 나는 거기에 반대한다. 물이 차오르면 욕망이 차오르고, 섹스를 하면 물을 뿜는 그녀 몸은 ‘남자 몸’의 정확한 유비이다. 한마디로 영화는 “그녀(들)도 나(우리)와 같이 발기하고 사정하면 정말 좋겠네♬ 언제 하고 싶은지, 언제 만족했는지 모두 알 수 있잖아, 그녀(들)의 욕망은 알 수가 없어, 하자면 아니라 하고, 하고도 아니라 하네∼. 그녀는 내숭쟁이♬”의 영상 버전이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 숲’을 지나, 언제나 나를 언제나 나를, 기다리던 너의 ‘아파트’”가 여체를 상징한다는 건 오래된 농담이다. ‘붉은 다리(일본어, 橋하시-脚아시)를 지나 사철 꽃으로 덮인 집’이라… 거기에 ‘단지(꿀단지?) 속의 금불상’이라…. 음담패설의 ABC를 아는 사람이라면, 벌써 감잡았다. 거기에 물과 고기까지… 음… ‘바다 냄새 나는 여자’? 음담패설 연상되는 게 불쾌하냐고? 천만에! 불쾌한 건 따로 있다. 말 그대로 욕망하는 남성 주체의 환상적 현신인 그녀의 다른 한편에 도무지 요해 불가능한 현실의 아내가 있다는 점이다.

<붉은 다리…>는 정한석의 지적(<씨네21> 452호)처럼 <우나기>의 속편이다. 배우는 물론 내러티브까지 동일하다. 그러나 <우나기>에 있고, <붉은 다리…>에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실로의 환기-ego의 자각’이다. 두 영화는 모두 남자가 아내와 헤어져 다른 곳에서 새 여자와 사는 이야기다. <우나기>의 첫 시퀀스에서 남자는 아내를 죽인다. 아내는 부정을 저지른 현행범이고, 그는 아내를 죽인 확신범이다. 8년간 복역한 그는 마을에 정착하고, 여인을 만난다. 그는 피하지만, 그녀는 ‘도시락 싸가지고 다니면서’ 그를 따른다. 그런 ‘비범한 행운’은 감방동기를 통해 지적된다. “아내를 죽이고도 속죄하지 않는 이가 예쁜 여자랑 산다네… 아내를 죽인 것도 성적 무능에서 비롯된 망상 때문이었지?” 무서운 진실의 말은 그에게 끝내 거부되지 못하고, 마침내 “편지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에 이른다. 의심가는 아내를 죽여버리고, 살갑게 챙겨주는 여자와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그에게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동기의 말은 기실 감독이 관객에게 누설하는 방백(傍白)이다. 그뿐 아니다. 그녀는 ‘알뜰한 당신’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서, 누구 애인지도 모르는 애를 배고, 옛 애인의 습격에 그는 다시금 칼을 휘두른다. 칼부림 끝에 아내로 맞지만, 여전히 거리낌은 남고(누구 씨인지도 모르는 자식을 키우게 된 자신을 우나기에 비유하며, 그는 가볍게 한숨짓는다), 다만 수긍하게 된다. 그나마도 신접살림은 1년가량 유예된다. 새 아내를 얻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붉은 다리…>에서는 모든 것이 생략된다. 아내는 전화선 너머에서 돈이나 닦달하다 마침내 이혼을 선언한다. “돈 때문이냐, 다른 놈이 생겼냐?”는 말에 “아니다, 싸우기 싫다”고 매정하게 말하는 아내의 태도는, 사실 주인공의 무의식이 투사(投射)된 결과이다. 그는 아내를 이해해오지 않았다. 그에게 아내는 돈만 달라는 여자이고, 자신은 억울하게 이혼당했다 생각하면 되므로 미안한 마음을 품을 필요가 없다. 아내는 “사랑하기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며 비장하게 번민되는 대상이 아니라, 간단없이 마음속에서 제거되는 대상이다(유일한 통신선이었던 전화기도 박살난다). 그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내를 버리고, 더할 나위 없이 에로틱한 여자를 품는다. ‘물’이 장애가 아니었냐고? 장애는커녕 쾌락을 배증시킨다(“당신은 내 물만 좋아하죠?”). 물은 그녀의 성욕과 오르가슴의 확실한 물적 보증이다. 그는 아무런 의심이나 갈등없이 그녀와 섹스할 수 있다. 이 무슨 천복인가? 이토록 이기적인 그의 욕망을 환기시켜주는 장치는 일체 없다. <우나기>의 감방동기와 상동인물인 노숙자는 비단이나 챙겨가고, 그에게 “보물 찾으러왔다”는 자백을 이끌어내는 데 그친다. <우나기>의 옛 애인과 상동인물인 애인친구가 등장하지만, 그녀에 대한 권리주장은 직접성이 없으며, 억지싸움은 주먹다짐이 고작이다. 모든 것이 순탄하다. 게다가 <우나기>의 장모처럼 정신이 나간 할미도 그나마 곱게 미쳤으며, <우나기>의 스님처럼 그를 이끈 철학자는 할미와 연분까지 있었으니, 이 무슨 대를 이은 화목의 헹가래란 말인가?

<붉은 다리…>의 그녀는 오묘한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 바라는 대로 물적 파악이 가능한 여자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아내, 까다로운 욕망의 구조를 지닌 ‘나쁜 아내’를 버리고 ‘쉬운 여자’를 품고 싶다고 툴툴대는 남정네들에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선화는 말한다. “야∼ 너무 쉬운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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