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영화제가 끝난 직후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화씨 9/11〉에 대해 “이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한 것은 어떻게 변명하든 간에 정치적 제스처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썼다. 올해 칸의 경향이 얼마간 미심쩍었던 나는 시원한 비판이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를 비로소 본 지금, 이 영화에 관한 칸의 선택을 지지한다. 그것은 칸의 선택이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정치적 제스처이기 때문이다.
〈화씨 9/11〉은 미국의 문제아 마이클 무어가 부시의 재선을 막기 위해 만든 다큐멘터리다. 목적이 명료하고, 내용 또한 명료하다. 부시가 얼마나 무식하고 게으르고 탐욕스러운지, 또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그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폭로한다. 그는 전작 〈볼링 포 콜럼바인〉의 디브이디판에서 “나는 일반적인 디브이디에서처럼 코멘터리를 하지 않겠다. 이 영화는 그것 자체로 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는데, 〈화씨 9/11〉보다 모든 코멘터리를 더 무색하게 만드는 작품을 상상하기 힘들다. 여기엔 깊이도 새로움도 없다.
마이클 무어는 기록화면 수집의 대가다. 어디서 찾아냈는지 탄복할 만한 자료화면을 모아놓고 그것들을 교묘하게 짜깁기하는 것만으로 부시와 그 일당을 엿먹인다. 나의 언어를 논리화하지 않고, 그의 언어가 제 스스로 결함을 드러내도록 전시하는 건 고단수의 정치공세다. “세계의 모든 나라를 동원해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할 것입니다. 자, 이제 나의 샷을 보시지요”라며 부시가 골프채를 휘두를 때, 그를 혐오하지 않기란 힘들다. 추하고 맹하고 일그러진 부시의 얼굴은 갖가지 방식으로 전시되며, 그의 나쁜 정책으로 고통받는 미국인의 슬픈 얼굴이 대비된다.
〈화씨 9/11〉은 선전이 아니라 선동이다. 그것도 위험한 선동이다. 이 다큐멘터리에 새로운 것은 없다. 대통령 선거 때 부시 진영의 조작 의혹을 폭로하는 초반 장면들은 〈BBC〉가 보도했으며 무어가 자신의 선동적인 저서 〈멍청한 백인들〉에서 재론한 주장을 몇 가지 자료화면으로 축약한 것일 뿐이며,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오랜 유착 관계, 그리고 군산복합체의 정치 로비는 아주 오래된 구문이다. 후반부에 길게 등장하는 이라크 주둔 미국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고통스런 육성은 저널리즘의 극히 상식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다큐멘터리가 “황색 저널리즘의 좌파적 전유”(유운성, 〈씨네21〉 462호)라는 말에 동의한다. 동시에 이 센세이셔널리즘이 성공하기를 빈다. 김선일씨의 절규에 사로잡히기 오래 전부터, 2003년 3월20일 오전 5시30분 첫 미사일이 바그다드에 떨어졌을 때부터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첫 공격이 이뤄진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우리의 젊고 진취적인 대통령이 “전쟁을 지지한다”고 부시에게 전화했을 때, 그리고 얼마 뒤에 “파병은 본질적인 문제여서, 여론에 좌우되지 않겠다”고 말하며 흔들림 없이 실행했을 때, 그가 말한 본질이 결국 우리의 견해가 아니라 미국과 부시가 쥐고 있는 우리의 밥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우리의 무기력과 굴욕은 씻을 수 없는 것이 됐다. 이 위험한 선동에 그냥 선동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으며, 의사당 앞에서 의원들을 붙들고 자식 파병에 서명하라고 종용하는 마이클 무어 특유의 치기어린 맹동주의를 비웃을 낯짝을 못 찾겠다.
소위 최고의 영화제에서 최고의 영화로 지목된 〈화씨 9/11〉은 최선의 영화가 아니라, 차악의 저널리즘이다. 그리고 영화 비평을 쓰는 자리에서 나는 그런 저널리즘을 지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