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을 잡아라! <올인>이 히트하던 무렵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충무로의 시나리오 대부분이 이병헌에게로 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부르는 곳이 많아서였을까. 이병헌은 차기작을 결정하는 데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거의 동시에 두편의 영화를 선택했다. 하나는 로맨틱코미디 <누구나 비밀은 있다>였고, 또 하나는 옴니버스호러 <쓰리, 몬스터>였다. 두 영화가 개봉을 앞둔 시점에 그는 차기작으로 액션누아르 <달콤한 인생>을 점찍었다. “하고 싶은 영화를 고를 수 있는 특권을 지금 내가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행복하죠.” 그런데 그 행복의 정점에서 그는 의외의 고백을 했다. 배우로서 이병헌은 여전히 “목이 마르다”고 했다.
이 남자, 멋있다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기 힘들잖아요. <중독> 끝난 뒤에 제 이미지가 어둡고 이중적이고 사이코 같다는 말을 들었어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진 말아야겠다, 생각했죠.” 처음 시도한 로맨틱코미디 <누구나…>에서 이병헌은 세 자매를 동시에 유혹하는 ‘선수 중의 선수’로 나온다. 하는 짓이 뻔뻔하긴 해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그 인물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것은 이병헌의 몫이었다. “나쁜 놈이죠. 그런데 <정사>나 <해피엔드> 같은 영화가 아니잖아요. 장르가 코미디라는 점이 면죄부가 될 것 같았어요. 세 자매를 모두 해피하게 만들어주잖아요. 바람둥이긴 하지만, ‘테이크(take)’만 하는 게 아니라 ‘기브(give)’도 한다는 점에서, 유쾌하게 보여지길 바랐고요.” 그런데 연기의 톤을 잡아가는 과정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로맨틱코미디라서 워밍업하는 느낌으로 선택했는데,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줄 거냐, 다소 오버하는 듯한 느낌으로 갈 거냐, 그 선을 정하는 게 많이 힘들더라고요.”
상반된 두편의 영화에서, 이병헌은 똑같이 ‘완벽한 남자’의 캐릭터를 맡았다. <누구나…>가 그 남자를 둘러싼 여자들의 반응과 변화에 기댄 코미디라면, <쓰리, 몬스터>는 극한 상황에 맞닥뜨린 그 남자의 섬뜩한 변화를 그린 “코믹잔혹극”이다. 8월에 크랭크인하는 <달콤한 인생>에서도 그는 ‘멋있는 배우’를 찾던 김지운 감독의 레이더에 걸려들었다. 영화와는 관계없는 얘기지만, 그는 아우디 자동차와 오메가 시계의 홍보 대사이기도 하다. 이 마당에 ‘이병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라는 설문조사를 한다면, ‘멋있다’로 중론이 모아지는 건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이런 세간의 평가를 이병헌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저 멋있다고 생각 안 해요?”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려서,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데, 금세 입꼬리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린다. “쓸 거예요? 그럼 안 되지. 리와인드! 리와인드!”
이 남자, 웃긴다
이병헌은 재밌다. 스스로 유머 감각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즐기는 편이다. <누구나…>의 촬영현장에서 한 기자가 그에게 상대 세 여배우와의 러브신 농도를 집요하게 물었더랬다. 셋 모두와 베드신이 있나요? 키스신은 물론 있겠죠? 이병헌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혹시 북에서 오셨어요?” 폭소가 터졌고, 그뒤로 러브신 얘긴 쑥 들어갔다. 무표정하게 농담을 던지는 품새, 기막힌 순발력과 박자 감각을 지닌 이병헌의 ‘생활 유머’는 비유하자면, 장진식 코미디다.
그렇게 웃기는 그가 그간 코미디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아이러니처럼 느껴진다. “코미디를 싫어해서라기보다는 가깝게 느껴지지 않아서였을 거예요. 내가 해야 할 연기라면, 스스로 납득이 되고 설득이 돼야 하는데, 코미디는 사실성이 결여된 느낌이 있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코미디는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쓰리, 몬스터>에서 완벽한 남자가 결국엔 무너지거든요. 연기는 사실적으로 가지만, 극한상황에 부딪혀서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거예요. <공동경비구역 JSA> 초반에 지뢰 밟고, 살려주세요, 눈물 흘리면서 애원하는데, 관객은 박장대소를 하거든요. 그건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코미디뿐 아니라 판타지나 SF도 그 장르적 상상의 베이스 위에서 사실적으로 연기해야 하거든요. 그래야 그 장르의 느낌이 배가된다고 생각해요.”
이 남자, 진지하다
5년도 더 된 일이다. <내 마음의 풍금>의 개봉 즈음에 만난 이병헌은 “두렵다”고 했다. “다시 영화배우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기쁘다”고도 했다. 영화에서 부진했던 그는 한동안 TV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돌아와 ‘재기작’격인 작품을 내놓는 참이었다. 눈과 어깨에 힘을 뺀 그는 달라져 있었다. 이어진 <공동경비구역 JSA> <번지점프를 하다> 등에서도 그의 눈빛과 음성은 참 풍부했다. 어떤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내가 철이 든 게 중학교 3학년 2학기부터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거잖아요. 주변에서 하는 얘기로 아는 거죠. 솔직히 옛날 작품들은 내 눈으로 못 보겠어요. 그런데 사람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 세상과 사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고, 감정의 기억 안에 저장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고 발전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배우의 재산이 아닌가 싶어요.”
그렇다면, <내 마음의 풍금> 이후, 그리고 <올인> 이후를 제2, 제3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할까. “지금이 전성기구나 싶다가, 이런 게 슬럼프고 딜레마인가보다 싶다가, 저한텐 그 주기가 반복돼왔어요. 그래서 휩쓸리지 않아요.” 얼마 전 일본에서 출시할 DVD 영상집 촬영차 하와이에 다녀온 그는 요즘 영화 두편의 홍보 활동을 다니는 동시에 <달콤한 인생>의 “쎈 액션”에 대비해 액션스쿨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 “아무것도 결정해두지 않고, 나를 비워두는 편이에요. 흥행영화 했다가 초저예산 실험영화 했다가, 하는 식으로 왔다갔다 하고픈 욕심도 있고요. 그러려면 자기 계발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무대에 서고 싶은 생각도 있어요.”
시작부터 끝까지 사천만의 시선에 노출됐던 연애에 대한 남은 궁금증은 접어두기로 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선 누구나 비밀이 필요하다”는 영화 속 그의 대사처럼, 사생활까지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 드러내야 하는 공인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을 가질 권리, 그래서 행복해질 권리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해서다. “<달콤한 인생>을 12월까지 촬영할 텐데 그거 끝나면 당분간 쉬고 싶어요. 올해는 일이 너∼무 많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