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현수 감독이 로맨틱코미디를? <어바웃 아담>의 리메이크라고? 주연이 이병헌이랑 최지우야? 모두가 의아해했다. 사실 <걸어서 하늘까지> <게임의 법칙> 그리고 <본투킬> <남자의 향기>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 속에서 처절한 액션과 비극적 로맨스를 아우르던 장현수 감독의 ‘일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택시 기사 삼총사의 투박하고 비루한 일상을 그린 훈훈하고 튼실한 독립영화 <라이방>이 있었다. 당시 장현수 감독은 개인 투자자를 모으고 영진위의 지원을 받아 어렵사리 제작비를 마련했고, 세 배우들과 1년 넘게 동고동락하면서 연극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는 실험적 시도를 했더랬다. 그 다음 영화를 <누구나 비밀은 있다>로 낙점하면서, 장현수 감독은 다시 한번 ‘극과 극’ 체험에 도전했다. 제작사에서 기획했고, 내로라 하는 스타들로 진용을 짠, 시스템 안의 영화, 게다가 그에게 미개척 분야나 다름없는 로맨틱코미디였다. 그는 어떻게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걸까. ‘액션감독’이라는 타이틀이 답답하고 지루했다는 그는 <라이방>을 통해 그리고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통해 이렇게 외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장현수는 잊어달라고.
시사회 무대 인사 자리에 불참해서 놀랐다.
프로듀서랑 나랑 극장으로 오는 중에 꽉 막힌 길로 잘못 들어서 늦은 거다. 아무래도 시간 맞춰 가기 힘들 것 같아서, (이)병헌이한테 전화 해서 대신 말 좀 잘해달라고 부탁했다. 뭐라고 얘기했는지 아직도 말 안 해준다.
영화가 성에 안 찼거나 무슨 불화가 있어서인 줄 오해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런 오해에 대해서 나는 정태원 사장을 변호하고 싶다. 정 사장은 영화에 대한 열정도 많고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상업영화, 오락영화에 대해선 아이디어가 많고, 감각도 있어서, 현장에서 이런저런 제안들을 하는 편인데 그게 감독에 따라선 받아넘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나도 한때 현장에서 발칵했던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말이 와전된 거였다. 지금은 아주 잘 지낸다.
이 영화 만들고 나서 기자들 만나기가 두렵다고 했다던데.
그전까지는 의미나 메시지를 챙기려고 많이 노력한 편이었지만, 이번엔 그런 부분을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최지우 파트에서 두드러지는데, 재미를 주려는 목적이 가장 컸다.
애초의 의도대로,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나.
79% 정도는 만족한다. 나머지 21%는 의례적인 아쉬움 같은 거다. 한국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10을 갖고 시작해서 그중 몇개를 남기느냐, 지키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여건좋은 외국에서야 10을 갖고 시작해도 20으로 만들 수 있지만, 한국에선 현장에서 어쩔 수 없이 깨지고 잃는 부분이 생긴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가장 아쉽게 느껴지나.
촬영을 40회 정도 했다. 장소가 국한돼 있기 때문에 찍을 만큼 찍었다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10번쯤 더 찍겠다는 생각으로, 더 공을 들였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라이방> 때는 배우들과 1년 반을 함께 지내면서 연극도 하고, 미리 호흡을 많이 맞췄다. 상업적인 배우들과 일하려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모여서 리딩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했던 점이 아쉽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어떻게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됐나. ‘의외의 선택’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 같다.
<나비>를 연출하려고 준비하던 때가 있었다. 그맘때 정태원 사장이 <어바웃 아담>의 테이프를 건네주면서 리메이크 생각 있으면 같이 해보자 그랬다. 그게 벌써 3년 전인가. 그런데 <나비>에서 손떼고 나오고 나서, 문득 <어바웃 아담> 생각이 났다. 이번 기회에 확 바꿔볼까, 재밌는 영화 한번 만들어볼까, 하는 욕심이 생겼다. <라이방> 뒤끝이 답답했던 것도 사실이고. 다시 영화를 봤는데, 전보다 훨씬 재밌었다. 도덕적 문제를 넘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도덕이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사람이 혼자 있으면 어질러보고도 싶고 그렇지 않나. 잘하면 그런 점이 승부처가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진행하다 보니 관객이 도덕에 예민하다는 걸 의식하게 되고, 그래서 피해가되, 유쾌하게 달려가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됐다.
그래서 수현이란 인물에 어느 정도의 비현실성을 가미하느냐를 많이 고민했을 것 같다.
그게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다. 수현을 약간은 비현실적인 인물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는 것이 부도덕한 영화라는 지탄을 피할 수 있는 길이겠다 싶었다. 가령 수현은 사람 마음을 너무 잘 읽고, 느닷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그러지 않나. 너무 비현실적인 인물로 몰고가면, 들키니까 재미없을 것 같아서 그런 비현실적인 느낌이 은근히 묻어나게 했다. 병헌이가 세심하게 연기를 잘해줬다.
원작이 있는 영화를 리메이크하는 부담은 없었나. 우리 식으로 각색하는 과정에 생각한 포인트는.
원작보다 낫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람이 보기에 원작보다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시작한 거다.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이라면 결말일 텐데, 나는 수현이 자매들 곁에 남는 게 이상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더라. 서부영화에서 악당을 평정하고 나면 주인공은 떠나야 한다.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면 퇴장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여성의 성과 사랑을 그렸다는 점에서 <처녀들의 저녁식사> <싱글즈>의 연장선상에 두는 견해도 있다. 그런 비교항이 성립할 수 있을까.
그런 영화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는 그런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게 아니다. 담 옆을 걸어가는 사람한테 자꾸 담을 넘어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웃음) <바람난 가족>에서 가정주부가 독립적인 삶을 결정하는 결론은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메시지를 주려던 게 아니다. 이렇게 사는 게 잘사는 거다, 라는 걸 보여주려던 게 아니다. 굳이 하고자 한 이야기가 있었다면, 곁에 있는 사람을 돌아보라는 것 정도다.
이번 작업을 통해 <게임의 법칙>의 박중훈이나 <남자의 향기>의 김승우의 예처럼 기존 이미지와 무관하게 새로운 면모를 이끌어냈다 싶은 배우가 있나.
이병헌이 그렇다. 처음에 시나리오 주니까 하고 싶어하면서도 선뜻 결정을 못하더라. 그래서 ‘나도 하는데 네가 왜 못 하냐’, ’그렇게 계속 무겁게 가다가 최민수 될래’ 그랬다. 그렇게 꼬박 한달을 설득했다. 워낙 리얼리티를 따지는 친구지만, 한번쯤 가벼워져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권했고, 결과적으로 잘해낸 것 같다. 여배우 셋이 다 열심히 했지만, 이번 기회에 최지우를 다시 보게 됐다. 닫혀 있는 친구인 줄 알았는데,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더라. 그래서 같이 작업하는 게 즐거웠다. 처음 60%는 같이 만들어갔다면, 나머지는 혼자 다 했다. (웃음) 여러 테이크 가다보면, 어느 순간 딱 맞는 지점을 찾아주더라.
<누구나…> 이전에 <왕조의 눈>과 <나비>의 연출자로 내정돼 있었다.
<왕조의 눈>은 7개월 정도 작업했는데, 제작자랑 방향이 많이 달랐다. <예스터데이> <아 유 레디?> 같은 영화들이 줄줄이 깨진 뒤라 나는 속을 먼저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대표는 70억원짜리 영화인 만큼 외양을 많이 생각했다. <나비>는 ‘감동과 눈물’을 주는 영화가 우르르 기획되던 때인데, 나로서는 삼청교육대라는 사회적 이슈와 남녀의 멜로를 만나게 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만뒀다.
<남자의 향기> <라이방> <누구나…>로 이어지는 최근 행보를 보면, 전작과 아주 다른 영화들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내가 너무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가벼워지고 싶었다. <남자의 향기>가 잘 안 되고 나니까, 결과 좋을 것 같은 상업영화만 기획하게 되더라. 허무했다. 그래서 아예 망하러 가보자, 지금 아니면 못 만들 영화를 만들어보자 했던 게 <라이방>이다. 그러고나니 떳떳해졌다. 그렇게 힘든 영화 했으니 다시 상업영화를 해도 되겠다 싶었다. 나는 늘 장선우 감독의 자유스러움이 부러웠다. 여러 장르 왔다갔다 하는 것도 보기 좋았고. 그런데 나를 보는 시선이 내가 가야 할 길을 정해주고 있었다. 나는 완성된 감독도 아니고 한 장르만 고집할 생각도 없는데.
액션영화 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싫었던가 보다.
지루했다. 그렇게 한 카테고리에 갇히는 게 싫더라.
로맨틱코미디는 해보니 어떻던가.
하는 동안 재밌었는데, 두번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웃음) 성에 안 차더라. 그 안의 감정이 나한테 충분한 즐거움을 못 주는 것 같다. 같이 영화를 보다 사람들이 웃는 걸 봐도 별로 쾌감이 없다. 가슴을 치는 느낌이 부족하달까.
다음 고지는 어디인가.
남자들끼리의 사랑을 그리고 싶다. 동성애 영화와도 다르고, 버디 영화와도 다른 느낌의 영화. 여배우들과의 작업이 즐겁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여자를 모르고 이상하게 표현하는 감독으로 찍혀 있는 만큼(웃음) 나를 많이 열었고, 최대한 교감하고 대화하려 했다. 나름대로 즐거웠지만, 남자배우들과의 작업이 즐겁고 또 그리운 게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