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서울판 섹스 앤 시티, <누구나 비밀은 있다>
2004-08-11
글 : 심영섭 (평론가)

장현수의 일탈 <누구나 비밀은 있다>

마초 감독으로 널리 알려진 장현수 감독이 세 자매를 데리고 나타났다. 영화 <라이방>에서 베트남으로 흔쾌한 방학을 보내러 간 세 남자를 대신한 채, 이번엔 세 여자를 대동하고서.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에서의 짧은 단편을 제외하고 장현수 감독에게 코미디, 그것도 여자 이야기는 당최 처음 있는 천지개벽이다. 그런 그가 한 남자와 세 자매의 연이은 정사를 다룬, <누구나 비밀은 있다>를 감독하겠다고 나섰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최근 <아는 여자>나 <인어공주>의 리뷰에서 영화 속의 히로인들이 한결같이 섹스리스 증후군에 빠져 있는 것을 한탄하는 평론가들에 대한 화답처럼 보인다. 한 예로 김소영 교수는 <아는 여자>의 리뷰에서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를 포함하는 이즈음의 로맨틱코미디는 육체적으로는 성인이며 사회적 관계에서는 유아인 남녀의 이른바 순수한 첫사랑을 보여주느라 영화 내내 키스 한번 제대로 하는 법이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는 여자>의 이나영이 허리 아래 일도 좀 알았으면 바란다는 분들에게 이 영화는 한 무더기의 또 다른 ‘알아가는 여자들’을 선사할 것이다. <바람난 가족>이 너무 무겁다고 느꼈던 분들, 이 영화를 보고 배꼽 잡으면 그만일 수도 있다. 세 친구가 아닌 세 자매가 섹스 액트와 섹트 토크를 곁들이는 이 ‘섹스 앤 시티 서울 버전’은 최근의 대한민국 영화 속들이 왜 집단적으로 감행하는 섹스, 그것도 가족들간의 비밀스런 바람이 화제가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안겨준다. 이 비밀스런 섹스에 대한 공모 의식, 제목처럼 ‘너도 있고 나도 있다’는 공모 의식이 바로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 깔린 집단적 무의식이자 흥행 코드의 비밀일 것이다. 남자는 세 자매를 차례로 꾀지만 거기에는 죄의식이나 허리 부러지는 도덕적 저울추의 무게가 존재하지 않는다. 화사한 화면, 근심없는 사람들. 불륜이라는 칙칙한 이름은 감추어지고 이혼도 없고 아이들도 상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풍자와 임상수의 도발을 버리고, <누구나 비밀은 있다>는 유쾌하고 편안하게 로맨틱코미디 장르에 안전 착지한다.

유쾌하고 편안한 로맨틱코미디

던킨도너츠의 미소를 가진 이 사나이, 수현은 만나자마자 세 여자를 흐물흐물 녹여버린다. 이병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 자매를 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세 여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층위 안에서 ‘여성’이란 위치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정된 공식처럼 세 여자는 자유주의자, 독신주의자, 권태로운 유부녀의 세 계층을 표상화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숨겨진 장치인 ‘담배’에 대한 이들의 태도다. 당당하고 발랄한 신세대 미영(막내·김효진)은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게 담배 한대 우아하게 물 것 같지만 오히려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지식으로 중무장한 숫처녀 선영(둘째·최지우)은 서툰 입담배를 뻐끔거리는 정도다. 늘 목티를 입고 다니며 가장 정숙해 보이는 유부녀 진영(셋째·추상미)은 남들 몰래 능숙하게 담배를 피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가장 억압적인 여자가 가장 일탈의 욕구가 큰 법. 사내는 섹스를 통해 여자들에게 각기 다른 선물을 준다. 자유분방한 연애는 있지만 로맨스는 없었던 미영에게는 진지한 연애담이 주는 로맨틱한 추억을, 선영에게는 지식이란 방패 뒤에 쌓여왔던 고삐 풀린 성을, 진영에게는 남들 앞에서도 목을 드러낼 수 있는 과감함을 선사한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의 가장 아슬아슬하고 매력적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돈 많고 다정하고 유하고 자신에게 오는 누구도 마다지 않는 데다 여자들의 일희일비에 담담하고 관대한 이 남자 이병헌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위험하고 가장 신선한 남성 캐릭터에 속한다. 그는 모든 여성들의 모든 소망이 투사된 지구상에 없을 것 같은, 그러나 한번쯤은 꼭 만나보고 싶은 남자다. 그는 솔직히 ‘애기야 가자’라고 부르짖는 또 다른 ‘왕자-마초’ 캐릭터보다 백배 낫다. 이병헌이 연기한 수현이란 캐릭터는 오리지널인 <어바웃 아담>과 비교해도 휴 그랜트가 하지 않을 바에야 아담 역할의 배우 스튜어트 타운젠드를 거뜬히 추월한다(아무리 그가 샤를리즈 테론의 애인일지라도!). 오리지널에서 아담은 루시 집을 방문했을 때, 굴비 대신 평범한 꽃을 갖다바치고 테킬라 대신 하우스 와인을 마신다. 사실 ‘아담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오리지널의 아담은 오히려 모든 남성들이 부러워하지 않은 악마적인 바람둥이의 느낌쪽으로 저울추가 기운다면, <누구나…>의 수현은 오히려 모든 여성들이 한번쯤은 구애를 받았으면 하고 원하는 자상한 천사 같은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놈은 정말 멋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누구나…>든 <어바웃 아담>이든 그 이데올로기는 미심쩍다. 대체 이 여성들의 집단적 억압과 집단적 엑소더스는 꼭 남성들의 성수 같은 섹스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가? 이 여성들을 옭아매는 저 그물처럼 단단한 대타자들, 시스템이라 불리는 저주받을 억압의 기원은 그리하여 정말 황홀한 섹스 한방에 다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웃자고 행복하자고 만든 영화에 뭘 더 바라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영화는 <게임의 규칙>과 <라이방>을 만든 장현수의 것이라는 점이 계속 발목을 잡는다. 아니 거꾸로 장현수 감독도 웃기는 영화를 만들 수 있구나 하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에서 장현수의 카메라는 시종일관 움직인다. 같은 상황이 반복돼도 숨겨진 숏 하나만 붙이면 완전히 다른 맥락이 되어버리는 편집의 포인트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자 상큼함이고 그의 연출 포인트는 이러한 점에서 옳다고 본다. 미영이 수현에게 과감하게 프로포즈하는 장면에서 자매들은 울고 웃는 상반된 행동을 보내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후반부에 가서야 밝혀진다. 누군가 한 남자와 정사를 나눈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매들의 숨겨진 마음과 설렘이 숨겨진 하나의 숏 사이에서 숨은 그림 찾기처럼 떠오를 때, 영화의 너무 밝기만한 채도도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이 영화에는 여백을 주는 숏이나 숨을 고르는 정지 숏이 거의 없었다. 시사회장에서 장 감독을 만나 크레인 숏이 유달리 많다고 하자, ‘이번에는 움직이고 싶었다’고 짧게 대답한다. 아마 가볍게 놀고 짧게 끊어치고 싶었다는 말 같다. 그러나 <라이방>의 첫 장면이 선풍기의 시점 숏이었던 것처럼, <게임의 규칙>의 엔딩신에도 360도 트래킹 뒤 한순간 정지하던 그 적막과 박중훈의 피눈물이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장현수 감독의 연출이 좀 덤덤하다 싶다가도 치고 올라가는 한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체 이 영화에서 뭘 원하고 있는 것일까?

솔직히 크레인과 팬으로 철저히 인물과 사건의 뒤를 쫓는 이번 영화에서의 연출은 상업적이고 유려하지만, 막상 감독이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여성영화를 만든 이 마초 감독이 오리지널을 모사하고 상업감독으로서 위치를 다지는 것 외에 여성들의 경쟁 심리와 억압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어바웃 아담>이란 일링 스튜디오 코미디를 리메이크한 이 영화에서 장현수 감독은 다리는 있지만 혀는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남성영화를 만들 때의 <게임의 규칙>과 <라이방> 때의 장현수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영화에는 늘 어둡고 비정한 사회의 저변을 훑는 살아남으려는 사내들에 대한 깊은 연민과 그에 대한 묘사가 돋보이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다. <게임의 규칙>에서 초라한 도박꾼 이경영은 도박판에서 크게 한탕을 한 뒤, 뜨내기 건달 박중훈에게 공중전화로 사이판에 가자고 얘기하고, <라이방>의 남자들은 베트남에 가자고 한다. 그러니 그의 데뷔작이 <걸어서 하늘까지>임에는 말해 무엇하랴. 남성 공동체에 대한 매혹과 늘 이 처연한 사회 밑바닥의 탈출을 꿈꾼다는 점에서 장 감독은 김성수와 유사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투박하고 겉멋 부리지 않는 뚝배기의 정직함이 있었다. 나는 장현수 감독 면전에서는 “감독님, 코미디 잘 만드시네요. 하나 더 만드시죠”라고 말하면서도 슬금슬금 그의 마초 정신이 일렬종대한 남성영화가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마초 감독의 한계는 있지만

사실 한창 잘 나가는 미국 여배우인 케이트 허드슨을 데려다가 영국 코미디를 완성하는 일링 스튜디오의 전략안에 있기는 하지만, 오리지널 <어바웃 아담>에서 간과할 수 없는 숨은 배경은 이 영화가 아일랜드 더블린산이라는 점일 것이다. 가톨릭에 대한 숭배가 사회적 지배력과 함께하는 아일랜드에서 세 자매와 한 남자의 정사라는 이데올로기는 2000년 개봉 당시에도 상당히 발칙하고도 흥미로운 도발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점이 개봉 당시 평론가들의 환심을 산 것 같다. 아일랜드의 유명한 평론가인 하비 오브라이언은 <어바웃 아담>을 여성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더이상 ‘아일랜드적이지 않다’는 점을 반기고 있다. 만들었다 하면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나오고 아일랜드 역사와 사회 비판, 피임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줄줄이 대가족이 나오는 아일랜드 영화 풍토에서, <어바웃 아담>은 똑같은 아일랜드 로맨틱코미디인 <브랜단 앤 트루디>와 달리 아일랜드 위스키 냄새를 풀풀 풍기지 않는다. 오히려 케이트 허드슨(리메이크판에서는 막내인 미영 역할)이 노래를 부르는 술집은 이 지구상 어디에도 존재하는 코스모폴리탄적인 곳이다. 결론적으로 장현수의 리메이크판이 오리지널보다 더 못 만들었다고 할 만한 구석은 없다고 본다. 심각하지 않은 호기심과 상업적인 안전판 위에서 도발을 감행하는 이들 코미디의 비교우위에서, 오히려 리메이크판의 최지우·김효진·추상미의 강렬한 섹시 무드 터치는 판타지의 수위를 높이며, 영화의 최면과 웃음의 수위를 올라가게 만든다.

끝으로 오리지널을 보아도 리메이크를 보아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하나. 세 자매의 이름을 딴 진선미와 에로스의 결합이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비밀의 규칙은 알겠는데, 왜 젊디젊은 자매들에게만 이병헌의 선물이 돌아가야 하는가? 이건 오리지널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고 이왕 주장할 바에야 비밀의 공평성도 지켜달라고. 진심으로 섹스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세 자매의 어머니, 선우용녀에게도 이병헌의 미소와 리비도의 미덕은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고, 이 연사 불볕더위에 글품을 팔며, 이것만은 목놓아 주장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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