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정이현의 해석남녀] <누구나 비밀은 있다> 의 ‘수현’
2004-08-13
글 : 정이현 (소설가)

어디나 고수(高手)는 있다. 쭉정이를 가려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기판 앞에서 제 전적을 떠벌리며 허풍 떨기 바쁜 인간은 미안하지만 진짜가 아니다. 어떤 분야든 절대강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고요히, 다만 나비처럼 날아와 벌처럼 쏠 뿐이다. <누구나 비밀은 있다> 의 수현은 로맨스계의 초 고수다. 서글서글한 미소와 사려 깊은 눈빛으로 무장한 그 남자는 목표물을 향해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방아쇠를 당기는 냉철한 사수다. 물론 은색 벤츠와 아담한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매력의 강도를 가일층 상승시킨다. 참고로, 그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연애 분야’ 로 말할 것 같으면, 바둑이나 포커, 리니지 게임이나 클레이 사격처럼 일부 특정한 계층이 ‘그들만의 리그’ 를 만들어 ‘지들’ 끼리 노는 동네가 아니다. 일곱 살 유치원생부터 일흔 살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호시탐탐 참여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생활체육 한마당인 것이다. 속세에는 이미 로맨스 테크닉 연마를 위한 오만 가지 실용서가 난무하는 바, 수현은 가히 걸어 다니는 연애실용전서라 할 만 하다. 여자의 몸과 마음이 ‘준비 될 때’까지 ‘강요하지 않고’ 기다려주기, 각종 이벤트 마련하기, 가려운 곳 정확하게 긁어주기, 윤리와 욕망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만끽하게 하기 등등 그 남자의 연애술은 보통의 경지를 훌쩍 넘어선다.

바람처럼 다가 왔다가 평화로운 파국 이끄는 햐~이남자 ‘신의 아들’아냐

그리고 결정적 한방은 마지막에 등장한다. 바람둥이의 초강력 필살기! 그것은 바로 ‘내 손에 피 한 방울 안 묻히고 깨끗하게 헤어지기’ 전법이다. 고수는 절대로 먼저 이별을 말하지 않는다. 그저 환경을 조성할 뿐이다. 하이 레벨의 선수일수록 이별의 상황을 더욱 정교하게 설정한다. 악역은 슬쩍 파트너에게 떠넘겨진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나비처럼 날아와 벌처럼 쏜 다음 모기처럼 도망간 뒤에도 상대방은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랑의 가해자’ 가 되었다는 양심의 가책과 달곰쌉쌀한 추억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프로가 아마추어에게 베푸는 마지막 선물인 셈이다. 수현은 결국 결혼식장에서 버림받은 신랑의 역할을 쿨하게 연기함으로써 아무도 다치지 않는 평화로운 파국을 주관한다. 절대지존의 솜씨다.

기이하게도 영화를 보면서 나는 스스로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깜빡하고 말았다. 세 자매가 아니라 수현에게 감정이입하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뿔싸, 이 영화 꽤 위험한 세계관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한 남자가 자매들을 차례로 정복해 간다는 구도는 낡디 낡은 남근적 판타지의 변형이고, 세 자매의 캐릭터는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작위적이다. 근데 왜 재밌었던 거지? 나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럴싸한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수현은 어차피 범속한 인간 세계의 인물이 아니었던 거다. “아니, 누가 감히 신(神)의 가호를 거부할 수 있겠어요? 불경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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