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최소의 재료로 만든 기막힌 비빔밥, <화씨 9/11>
2004-08-18
글 : 남재일 (문화평론가)
다큐멘터리 <화씨 9/11>은 어떻게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았나?

<화씨 9/11>은 극영화가 아니다. 마이클 무어 역시 영화감독은 아니다. <화씨 9/11>은 부시 대통령의 가계와 아랍 석유자본의 유착관계를 폭로한 다큐멘터리다. 마이클 무어의 직업도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사회적 표현을 업으로 하는 직업군에서 극영화 감독과 고전적인 저널리스트의 중간에 위치한다. 사실을 전달하는 점에서는 기자에 가깝지만 사실을 내러티브로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영화감독에 가깝다. 이 중간자적 위치는 얼핏 ‘사실로 이어지는 내러티브’라는 이상적인 표현양식을 다큐멘터리에 기대해도 좋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행히도 다큐멘터리는 한번도 지배적인 표현양식으로 등극한 적이 없다. 편집증적 숙련을 겨루는 현대분업사회에서 두 가지 상이한 미덕을 절충한 것은 시장경쟁에서 열성 결합으로 판정나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의 부담 때문에 극영화처럼 화끈한 상상력을 펼치기 힘들며, 구성의 부담 때문에 파편적 사실을 다루는 고전적인 저널리즘에 비해서는 사실 전달의 효율이 떨어진다. 그러니 어쩌면 다큐멘터리가 표현의 자유 시장에서 배척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가능하다. 다큐멘터리가 시장에서 배척받는다는 것은 영리한 자본이 계산해본 결과 ‘영양가 없음’으로 판정났다는 것을 말한다. 대중적 소구의 결여라는 경제적 절망은 한편으로 자본의 영향에서 가장 자유롭다는 정치적 희망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요즘처럼 소수의 이익을 반영하는 자본의 힘으로 서사의 논리가 규정되는 시대에 다큐멘터리의 표현양식은 정치적 실천의 수단으로 그 중요성이 부각될 수 있다. 문제는 생산비용은 높고 소비의 소구력은 낮은 이 표현양식을 갖고 어떻게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정치의 재현’이라는 마케팅 혹은 선전의 방법론이 문제의 핵심이다.

<화씨 9/11>,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실천과 상업적 소구에 대한 역할 모델

<화씨 9/11>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작품은 논픽션 다큐멘터리이지만 칸영화제에서 대상을 받고, 세계적으로 엄청난 흥행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러한 성과는 마이클 무어라는 인물의 탁월한 재능과 전략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저널리즘의 논리학에 영화의 수사학을 포개놓음으로써 사실의 재료 맛과 내러티브의 요리 솜씨를 잘 절충해놓는 것이다. 이 글은 <화씨 9/11>을 통해 영화와 고전적 언론이 양분하고 있는 지형에서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까닭과 그 실천의 방법에 관한 것이다.

마이클 무어는 저널리스트이다. 그중에서도 20세기 초 미국 언론에서 두드러졌던 추문 폭로가(muckraker)와 비슷하다. 추문 폭로가는 언론이 기업화되면서 정착된 일상적 뉴스 생산 공정에서는 진실 보도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독립적으로 취재를 하던 일종의 프리랜서이다. 이들 대부분은 미국의 대자본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시기에 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이 보도해야 할 사회적 진실을 자본의 악행에 대한 폭로로 생각했다. 하지만, 기업화된 언론 조직 안에서는 진실보도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 까닭은, 첫째는 언론자본이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폭로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고, 둘째는 날마다 안정되게 뉴스를 생산하기 위해 관공서 중심의 출입처를 주요 취재원으로 삼는 시스템에서는 진실의 폭로에 소요되는 시간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이 생각한 것이 조직에서 독립해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기고하는 작업 방식이었다. 하지만 한때 맹활약을 했던 추문 폭로가는 언론 조직에 흡수되거나 개인의 사생활을 공격하는 스캔들 폭로가로 변질됐다. 이들이 실패한 가장 큰 요인은 사회구조적 비리에 대한 폭로가 기회비용이 크기 때문에 생계의 수단이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 언론의 뉴스 생산 시스템은 더욱 숨가쁘게 일상화됐다. 기자가 고정된 일상적 취재 업무에서 추문의 폭로를 위해 시간을 따로 할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회의 매개 과정은 더 복잡해졌으며 자본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은밀하고 정교해졌다. 언론이 전하는 파편적 사실로는 복잡하게 매개되는 요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추문 폭로가가 진정으로 필요한 시점은 요즘이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이 일을 독자적으로 한단 말인가? 무수한 노력과 기술과 열정을 요구하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가난과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협박일 게 분명한데.

이 위험부담을 영화라는 미디어는 덜 수 있다. 픽션으로 방어벽을 쌓으면서 어떠한 사회적 폭로도 할 수 있는 것이 영화다. 하지만, 영화는 픽션이라는 성격이 방어벽이 되는 대가로 폭로의 메시지조차 픽션으로 수용될 소지가 있다. ‘달라스’라는 드라마의 수용 과정을 연구한 이안 앵은 논픽션을 수용하는 관객은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수용 기제를 동원해 선택적으로 받아들임을 밝혔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현실 폭로는 그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아도 사실이 아니라는 전제 자체로 절반은 줄어들 공산이 크다.

또 한 가지 영화의 현실 폭로가 갖는 의미작용 과정의 문제는 배우의 육체성이 드리우는 기호학적 과잉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든 궁극적으로 배우라는 인물의 연기를 거친다. 그런데 배우는 단순한 연기자가 아니라 인물 자체가 패티쉬의 대상이다. 배우는 이쁘거나 몸매가 좋거나 분위기가 있거나 차분하거나 그도 아니면 개성이 있거나, 하여간 뭔가 한가락한다. 말하자면, 강한 육체성의 기표들이다. 이들의 육체성을 매개로 어떤 역할을 맡기면 그 역할은 이들의 육체성과 연관되어서 관객에게 각인된다. 시인 열명을 모아놓고 보면 시인처럼 생긴 사람 별로 없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정말 시인처럼 안 생겼다”는 말이 흔히 쓰인다. 미디어가 제시한 시인의 상투적인 아우라를 관객이 꾸준히 받아들여서 시인의 판단 준거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미디어의 상투형이 쉽사리 현실 판단의 준거로 적용되는 것은, 배우라는 우월한 육체성과 시인이라는 우수한 감수성을 하나로 상상하는 것이 욕망의 보편적 행태이기 때문이다. 곧, 사실은 별도로 존재하는 두 가지 탐나는 추구 대상을 한 대상에 존재했으면 하는 인간 욕망의 효율 추구 심리를 미디어가 시선을 잡기 위해 이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은 조화가 아니라 욕망의 M&A, 즉 탐욕이다. 조화는 이질적인 것들은 이질적인 대로 공존하는 상태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합병을 통해 도드라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수한 자질이 아니라 화면 가득 전시되는 배우의 강한 육체성이다. 그래서 미디어 이미지가 궁극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강한 육체성을 갈망하는 결여이다. 이 결여는 욕망의 대상을 강한 육체성으로 고착시키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육체성에 널리 퍼져 있는 인간정신에 대한 통찰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한다. 하나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영화미디어의 표현양식은 무수한 소통의 장애물을 대팻밥으로 남긴다.

이 기호학적 과잉의 성격을 규정하는 ‘강한 육체성’은 그 자체가 남루한 육체성에 대한 계급적 차별을 강화하는 일종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 상업영화에서 배우의 사용은 재현의 방법론이 정치적으로 타당한가라는 문제, ‘재현의 정치’와 늘 맞닥뜨린다. 이런 점에서 추문 폭로가가 추구한 사회고발을 매끈한 상업영화가 감행했다면, ‘정치의 재현’은 충실하지만 ‘재현의 정치’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최소의 재료로 극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무어식 다큐멘터리

마이클 무어는 이 모든 문제를 적당히 피하고 섞어서 최소한의 재료로 기막힌 비빔밥을 만들어냈다. <화씨 9.11>은 부시 대통령과 중동 석유자본의 유착 관계를 그리면서 애꿎게 희생되는 미국의 가난하고 못배운 젊은이들을 희생자로 내세우면서 그 인과관계를 강조한다. 이 점은 추문 폭로가들이 추구한 ‘자본의 구조적 악행에 대한 고발’에 충실한 설정이다. 그는 이 험난한 폭로를 극영화로 꾸미지 않고 직설적인 사실로 말한다. 그가 과거의 추문 폭로가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영상의 가능성을 백프로 활용했다는 것.

그는 영상의 시장 잠재력과 관객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 다큐멘터리가 요구하는 사항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시장에서 다큐멘터리가 극영화처럼 유통될 만한 흥미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부시에 대한 공격처럼 센세이셔널한 소재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소재는 취재가 어렵다. 그는 부시 관련 대목의 상당 부분을 기존의 다양한 미디어가 취재한 영상 자료를 기발한 풍자적 해설로 재구성하는 식으로 취재의 부담을 던다. 영상매체가 화면과 내레이션의 결합으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점에 착안해 묵은 자료로 아주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한마디로 <화씨 9.11>은 추문 폭로가의 이상을 저널리즘의 상업뉴스 감각과 영상의 수사학을 통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실현했다.

이런 스타일의 다큐멘터리에 대해서는 두 가지 비판을 할 수 있다. 첫째는 부시라는 저명한 인물을 가지고 독자의 시선을 잡으려는 환유의 전략, 혹은 선정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또 하나는 영상 자료의 재편집과 나레이션의 결합 관계에 나타나는 과도한 주관성에 대한 비판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비판은 저널리즘 행위가 객관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엘리트적 믿음에 근거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모든 저널리즘 행위는 궁극적으로는 사실 확인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점을 인정한다면 무어의 수사학은 자신의 의견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무구한 효율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나는 고전적인 언론의 객관주의와 다큐멘터리의 미학을 근거로 무어의 수사학을 비판하는 그 지점에 역설적으로 다큐멘터리가 정치적 실천의 전략으로 삼을 만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본다. 무어는 취재의 노고를 줄이면서 영상의 요구를 최소한으로 충족시키는,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유용한 다큐멘터리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의 사회고발 다큐멘터리는 가해자에 대한 폭로보다 피해자에 대한 휴머니즘적 접근을 선호한다. 이건 한국인이 무어보다 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 훨씬 명징한 논리적 근거를 필요로 하고, 그러려면 취재가 몇 배나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적 실천의 효과는 가해자에 대한 공격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 무어적 수사학을 구사하는 공격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이 진정으로 많이 나와야 할 나라는 미국이 아니라 한국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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