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다. 변덕이 죽 끓듯한 뉴질랜드 날씨에 대해 전해 듣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오후가 되자 햇살은 ‘쌩’ 하고 도망가고 없었다. 대신 으슬으슬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밝게 빛나던 고봉은 삽시간에 자욱한 안개에 포위됐다. 취재진 대부분이 크루즈 타러, 번지점프 하러, 스키 즐기러 자리를 비운 8월8일 오전. 퀸스타운 일대를 2시간 동안 차로 돌며 헌팅을 한 끝에 포커스를 떨굴 자리를 찾아냈던 사진기자는 얼굴을 찌뿌린 낙담한 표정이었다.
“아이고, 반갑습니다.” 환한 얼굴로 손을 내밀며 송강호가 나타난 것도 날씨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무렵. 과묵함을 잃지 않는 표정으로 목례하는 유지태와 함께였다. “이건 좀 자세가 엉거주춤 아닌가?” 촬영이 시작되자 송강호는 빗속에서 셔터를 눌러대는 사진기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내가 잘 알지. 사진은 이 포즈 쓸 거죠?”라며 시종일관 여유어린 넉살로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줬고, 유지태는 큰형의 재담에 박수치는 막내처럼 고개를 끄덕거리며 도왔다.
“배우들이 잘 보이는 영화였으면 좋겠어요.” 뉴질랜드에서 두달 가까이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 임필성 감독의 말. 촬영 내내 오히려 힘을 북돋워줬던 송강호와 유지태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인터뷰를 시작하자 웃음기는 거두고 대신 하얀 사막의 시각적 지루함을 덜어줘야 할 부담까지 짊어진 최도형과 김민재에 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송강호는 앞서 걷는 탐험대장 최도형의 외로움에 대해, 유지태는 뒤따르는 막내 김민재의 두려움에 대해.
"제가 21번 NG를 냈어요"
맥주 한잔 마실 수 없는 곳에서 송강호가 보내는 편지
남극일기를 같이 쓰기로 임필성 감독과 손가락을 건 게 2년 전. 이제야 뉴질랜드에 왔습니다. 5년을 기다린 임 감독에 견줄 바는 아니지만 저, 사실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남극을 주인공으로 하는 상업영화라니! <남극일기>를 처음 받아들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제겐 굉장한 도전처럼 여겨졌지요. 배우가 감당해야 할 정신적, 육체적 부담은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이상한 건 제작이 난항을 겪을수록 <남극일기>에 대한 매력은 더 커져만 갔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을 떠나온 지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갑니다. 지금은 도전에 합류했고, 그에 대한 제 몫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첫 장면 촬영 때 제가 22번 만에 오케이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했었나요? 다 제 탓입니다만. 협찬 의상이 한국에서 오지 않아 먼저 텐트 안 장면부터 찍기로 됐는데, 창고 안에서 뉴질랜드 스탭까지 40, 50명이 와글와글하니 몰두가 안 되더군요. 스노 팜 촬영 또한 어렵긴 매한가집니다. 촬영장엔 눈과 태양밖에 없습니다. 확 트였고, 그래서 2배의 집중력을 요하는 곳입니다. 게다가 강풍기까지 틀어댄다고 생각해보세요.
진짜 인사가 늦었군요. 제가 맡고 있는 인물은 최도형입니다. 남극의 도달불능점을 향한 탐험대의 리더. 그를 말로 설명하기란 좀 어렵습니다. 저 또한 아직 그의 욕망이 무엇인지,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고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극중 앞만 보고 전진하는 최도형의 욕망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다른 대원들처럼 말이죠. 다만 이렇게 추측해봅니다. 세상 어느 곳도 자신의 공포를 받아줄 수 없다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극지로 끌고가 자신을 던져버리고 싶은 인간이 아닐까. 그는 남극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전투를 치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에 비하면 송강호는 세상에 대한 연민이 너무 강하죠. 하하.
오기 전에 치렀던 훈련 덕에 썰매 끌기, 스키타고 걷기 등은 제법 자세가 나옵니다. 영화에서 전문가처럼 해내지 못하면 누가 신뢰하겠어요? 그거야말로 기본이죠. 이등병처럼 어수룩하게 경례할 순 없잖아요. 촬영이 끝나면 적적한 건 사실입니다. 스노 팜 근처의 숙소에서 읍이라 부르는 시내까지는 걸어서 1시간. 그것마저도 밤 10시가 지나면 문을 닫으니 맥주 한잔 제대로 마시지 못하죠. 잠자기 전까지는 숙소 근처를 뱅뱅 도는 수밖에 없습니다. 10km 정도는 안 되고 한 7, 8km쯤 되려나. 저뿐만 아니라 스탭들과 배우들 모두 촬영 끝나면 운동하느라 정신없습니다.
휴일에는 주로 밀린 빨래를 합니다. 앞으로 한두번만 하면 한국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한국영화 요즘 안 된다면서요? 아닌가요? 인터넷으로 한국 소식을 접하긴 하는데 궁금증을 풀기엔 역부족입니다. 금연구역 천지인 이곳을 어서 떠야 할 텐데. 물론 돌아가서 휴식이 주어지는 건 아닙니다.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남았습니다. 국내에서 찍을 후반부야말로 극중 감정이 증폭되는 부분이거든요. 남극에 닿기 위해 뉴질랜드에서 몸을 풀었다면, 그 느낌을 놓치지 않고 이제 밀도있는 연기를 한국에서 토해내야 합니다. 걱정이 되죠. 그래도 지금은 먼저 한국에 돌아간 동료들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