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요, 아직 성장중이죠"
선배들과 앙상블 연기에 목마른 유지태가 보내는 편지
언제였더라. 돌풍에 맞서 강호 선배가 카메라쪽으로 다가서는 장면 촬영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날이었어요. 순간적으로 입술을 약간 삐죽이시던데. 야. 저거구나. 시나리오상에서 날 받아줄 곳은 이곳밖에 없다는 최도형 대장의 표정이 그대로 전해져왔어요. 나중에 강호 선배는 강풍기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일 뿐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했지만요. <남극일기>를 품에 넣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 때문이었을 거예요. 선배 배우들에게 자극받고 또 그들과 앙상블 연기를 해보고 싶어서 말이죠. 이번엔 강호 선배 말고도 박희순, 김경익, 윤제문, 최덕문 등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쟁쟁한 이력을 다진 선배들까지 모셔야 할 분들이 한두분이 아닙니다.
제 역할은 김민재. 실제 나이로도 그렇고, 극중 여섯대원 중에서도 막내입니다. <남극일기>에서야 원래 제 나이를 찾게 됐죠. 그래서 기뻐요. <올드보이>에서 저, 최민식 선배와 동갑이었잖아요. 올백한 머리의 40대 남자.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에서는 또 어떻구요. 퉁퉁한 유부남이었으니까. 민재는 탐험대원 중 가장 영혼이 맑고 희망의 메시지를 갖고 있는 인물이에요. 시나리오를 본 누군가는 다소 전형적인 인물 아니냐고 하는데, 거기에 동의하더라도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그건 배우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서 탈피할 수 있는 문제라고 봐요.
대개 블록버스터라 하면 배우들은 온데간데없고 CG만 난무하는 영화를 연상하는데, <남극일기>는 아니에요. 민재만 하더라도 후반부의 극심한 변화를 겪죠. 배우들이 가려지는 영화는 아니에요. 제 역할만 놓고보면 성장영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정도니까. 첫 촬영 때요? 음… 물론 힘들었죠. 발동이 걸리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고. 탐험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민재가 크레바스에 빠지는 장면이었는데 첫 장면부터 액션이라 애먹었거든요. 후반부 촬영을 위해 헬기로 일부 스탭만 이동해서 찍는 마운트 가비 촬영분량이 남아 있는데 이게 저로선 숙제죠.
맏형인 강호 선배가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왜 자기 커리어가 생기고 스타덤에 오르면 어느 지점에서 다른 이들이 더이상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거부하거나 다가서지 못하도록 벽을 만들게 마련인데 그런 게 없어요. 오히려 선배가 편하게 다가서는 편이죠. 동료나 후배들에게 친근하다는 뜻만은 아니고. 선배님 하시는 거 유심히 보고 있으면 다른 배우들까지 이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어요. 최도형처럼. 일종의 바운더리를 만들어주고 그 안으로 인도하는 거죠. 돌려서 말하지 않고 직설화법을 쓰는 것도 시원해서 좋고. 이 팀워크를 그대로 한국에 갖고서 돌아가야죠.
뉴질랜드는 몇번 드른 적이 있는 곳이라 낯설진 않아요. 공기가 맑으니까 숨쉬기도 편하고 한국도 이러면 좋겠다 싶죠. 사람들도 친절하고, 또 여러 인종이 섞여 살지만 차별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죠. 호주와 달리. 아, 누군가 저보고 지나치게 진지해서 문제라고 했다면서요. 감독인가요. 아니면 프로듀서인가요? 근데 아시잖아요. 저 원래 그런 부류인 거. 찌운 살을 빼기 위해서 촬영 시작하고 나서 술과 담배는 전혀 입에 안 대고 있어요. 헬스요? 여기 그런 데가 어딨어요. 저도 줄곧 걷고, 달리고 이래요. 도달불능점을 향한 민재의 여정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남극일기 다 쓰는 날까지 쭉 그래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