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쳇, 미국용 다큐멘터리네, 뭐, <화씨9/11>
2004-09-01
글 : 황진미 (영화칼럼니스트)

내부고발자의 한계 드러낸 <화씨 9/11>, 세 가지 정치적 오류

칸에서 최고상을 받은 <화씨 9/11>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선동가적인 무어의 주장이 부시 일당을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게 풍자한다’(짐 호버먼, <씨네21> 462호) 정도이다. 즉 ‘미학적으로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지지된다’는 것이다. 국내의 평가 역시 호의적이며, 비판은 미학적 측면에 국한된다. 유운성은(<씨네21> 462호) ‘무어의 주장은 받아들일 만하나, 전개방식이 황색 저널리즘적’이라 비판했지만, 허문영은(<한겨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지지한다’ 밝혔고, 남재일은(<씨네21> 465호) ‘정치적 실천의 도구로 유용한 다큐멘터리의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며 미학적으로도 지지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비판’하고자 한다. 이는 ‘미국인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행해진다. 나는 남성주체의 ‘분열’(<사마리아>)과 ‘자기환멸’(<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을 보여주는 영화를 타자(여성)의 입장에서 비평한 바 있다. 이 글 역시 미국의 내부고발자의 목소리를 듣는 외부(제3세계인)의 시각을 견지한다.

첫 번째 오류, 무어의 미국 중심주의: 오사마 빈 라덴은 악의 축?

9·11 사태에 대한 무어의 입장은 단호하다. 그에 따르면 무고한 3천명의 미국 시민을 죽인 오사마는 범죄자이며, 사건 직후 검거되었어야 한다. 무어는 부시가 오사마와 여전히 접촉이 있는 빈 라덴 일가를 왜 도피시켰는지 반문하며, 사우디 대사관이 백악관의 특별 경호를 받고 있다고 밝힌다. 참수장면까지 곁들이며 사우디 왕정의 인권문제를 거론하는 무어는 ‘원수의 가문’ 빈 라덴 일가가 부시 집안과 연계되어 있고, 사우디는 미국 경제의 7%를 장악하고 있기에 알카에다의 본거지인 사우디가 응징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무어는 ‘테러리스트 오사마-빈 라덴 일가-사우디’를 새로운 악의 축으로 상정하는 것일까? 그는 9·11 이후 부시 정부가 무고한 아랍인들을 검문하고, 미국인을 죽인 일도 없는 이라크를 공격한다고 비판하지만, 그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총구를 이라크가 아닌 사우디’로 돌릴 것을 주창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어는 9·11 직후 오사마가 아프가니스탄의 지하 벙커에 은신하였는데, 부시 정부는 ‘사담’과 ‘이라크’에 초점이 맞춰지도록 수사방침을 내렸다고 밝힌다. 그러나 국민들이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기를 원하여, 부시는 ‘여론의 입막음용’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지만, 병력이 터무니없이 적었다고 한다. 무어는 제스처에 불과한 이 조치로 오사마에게 두달 동안의 도피시간이 주어졌으며, 부시가 탈레반과도 송유관 사업으로 연계되어 있다고 밝힌다. 무어의 ‘아프간전에 대한 입장’은 대체 무엇인가? 엔딩 자막엔 아프간전 희생자도 추모한다고 쓰여 있지만, 무어는 아프가니스탄을 더 확실히 공격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가? 무어는 또 부시의 테러예방조치가 미흡했다고 비난하면서, 이제 와 웬 ‘뒷북’이냐고 불평한다. 그는 FBI 테러방지기금 예산을 삭감한 것, 테러위험을 경고하는 보고를 무시한 것 등을 비판하면서 부시 정부가 사전에 좀더 미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그 보호조치가 어떤 것이어야 했는지는 안 나온다). 그는 ‘애국법’ 등의 조치가 얼마나 황당한지 비판하고 있지만, 그 비판의 논조는 (뻥 뚫린 해안선을 통해 보여주듯) ‘외부의 적은 막지 못하고, 왜 내부인을 쪼느냐?’는 불평에 다름 아니다(사실 그의 생생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애국법’과 ‘테러위협’을 이용한 공포정치의 끔찍함이, 아무려면 ‘국가보안법’과 ‘전쟁위협’하에서 수십년간 살아온 우리만 하겠냐 싶다). 무어의 논지에는 여전히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뚜렷하다. 미국인에게는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고, ‘외부의 적’에는 경계를 강화할 것을 요구하는 그가 돌려받기 바라는 ‘내 나라’(<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Dude, Where’s My Country?))는 ‘당신들에겐 천국’이지만, 우리에겐 접근 불가능한 철옹성이다. 그는 9·11 사태가 가증스런 테러행위였을 뿐 아니라, 정통성도 없고 지지율도 하락되던 부시 정부에 ‘애국법’을 승인해주고, 엉뚱한 이라크전의 빌미를 제공해주었다고 비판한다. 그는 오사마가 왜 “미국의 심장부”에 테러를 감행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9·11 사태 직후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대중동정책의 오류’가 지적되고 ‘보복하지 말자’ 다짐하던 목소리는 <화씨 9/11>에선 증발되고 없다. 그는 미국의 외교 노선을 반성하고 있지 않으며, ‘희생자 유족을 위해서라도 오사마와 알카에다는 반드시 응징되어야 한다’는 기조를 견지한다. 무어는 과연 부시 집안과도 유착된 대부호-빈 라덴 가문 출신의 지식인, 오사마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부시 좋은 일 시키려고!’란 의견은 너무도 미국 중심적이지 않은가?

두 번째 오류, 제국주의적 차원의 ‘지배 - 피지배’ 관계를 미국 1국 차원으로 축소

무어의 이라크전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이라크와 후세인은 9·11 사태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나 이라크에는 세계 제2의 유전이 있고, 전쟁은 미국의 군수산업에 큰 이익을 남긴다. 9·11 사태 직후 “사담에게 덮어씌우자” 결심한 부시는, 집권 초기엔 전혀 위협이 못 된다던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며 대국민 선동작업에 나선다. 미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을 현혹하여 입대시키고,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러 간다”는 거짓 믿음으로 참전시켜, 성추행이나 민간인 학살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자행케 한다. 그들은 결국 불구가 되거나 영혼이 파괴되거나 죽지만, ‘그들의 고통’은 철저히 외면된다(영화는 참전자들과 유가족의 고통에 후반 대부분을 할애한다). 따라서 이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은 부시와 군수산업체이고 희생을 당하는 것은 미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이라는 것이 무어의 요지이다.

영화는 이라크전이 “세계 지배의 음모나 정치적 이해가 아니라 오로지 돈의 문제”라 분명히 밝히고, 마지막엔 조지 오웰의 말을 인용하여 “전쟁의 목적은 외부와 싸워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계급과 빈곤을 계속 유지하여 지배-피지배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이라 말한다. 즉 무어는 이라크전의 목적이 다른 국제 정세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사회 내부의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라 말한다. 무어가 이라크전을 ‘문명의 충돌’이라는 식의 애매한 수사로 낭만화하지 않고, ‘자본과 계급의 역동’으로 파악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러나 무어는 자본과 계급의 문제를 ‘미국’이라는 일국 차원으로 축소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레닌이 1차 세계대전을 분석하며 제시한 ‘제국주의론’은 이후 20세기 국제사회를 설명하는 틀로 사용된다. 제국주의란 독점화된 자본이 은행자본과 결탁하여 금융자본이 되면, 초과이윤을 찾아 국경을 넘는데, 이 ‘수출된 자본’이 국가권력(제국)의 형태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다른 제국과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것을 뜻한다. 무어가 주목하는 ‘칼라일 그룹’이나 사우디 석유자본은 이미 국경을 넘나드는 금융자본이며, 부시 정부와 유착되어 초과이윤을 위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으니, ‘제국주의’로 볼 수 있다.

제국주의는 제국 내부의 지배-피지배 관계를 지속시키지만, 그보다 심각한 국가간 지배-피지배 관계를 만들어내며, 이로써 제국 내부의 계급관계를 은폐/무마시킨다. 따라서 무어처럼 제국의 내부에 여전히 존재하는 계급 관계를 폭로하고, 이를 무마시키는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것은 제국의 피지배 계급과 좌파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무어는 이 전쟁의 목적인 ‘지배-피지배 관계의 지속’이 미국 내에 한정되어 있는 양 호도한다. 무어는 군대도 무기도 없는 팔라우 공화국, 코스타리카, 아이슬란드와 드라큘라의 나라 루마니아, 원숭이의 나라 모로코, 마약의 나라 네덜란드, 미군이 가 있는 아프가니스탄 등 ‘자발적 동맹국’들을 차례로 조롱하며, 결국 “미국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일”이라 개탄한다.

그러나 자본은 이미 국경을 넘었고, 계급 관계 역시 국경을 넘었다. 전쟁은 미국의 피지배 계급만 동원하는 게 아니며, ‘자발적 동맹국’들의 피지배 계급이야말로 ‘자발’을 강요당하고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그는 희화화한다. 무어는 ‘내국인 선동용’으로 만든 이 영화가 칸을 거쳐 한국과 같은 나라에까지 상영되리라 꿈에도 생각지 못한 걸까? 이 전쟁 훨씬 이전에 미국의 자본수출로 건설되었고, 미군이 ‘해방하러’ 파병나왔으며, 전 국민이 전쟁 위협을 느껴가며,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자발적으로’ 파병할 것을 강요당하는 한국과 같은 제3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는 깡그리 무시한다. ‘미국이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부득불 파병이 강행되는 이 마당에, 양심적 병역거부도 용인되지 않는 징병제하에서, 마찬가지로 청년실업에 시달리는 빈한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혹시나 화면에서 6·25 때의 비참한 화면과 더불어 “코리아!”가 연호되진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영화를 봐야 한다. 이것이 ‘부시를 낙선시키기 위한 내국인용 선동영화’를 투표권도 없는 주제에(!) 감히 엿보고 있던 우리의 불찰이란 말인가?

세번째 오류, 체제와 정권을 착각하는 ‘민주당 비판적 지지론’의 한계

영화는 2000년 대선의 개표방송으로 시작하여, 번복과 부정선거 의혹, 그리고 국회이의제기와 취임식 해프닝 등을 상세히 다룬다. <화씨 9/11>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9·11 사태 이전의 국제정세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대선 공방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 영화가 9·11 사태나 이라크전의 본질을 밝히는 ‘해외판’이 아니라, 오로지 ‘대통령 부시’를 정통성에서부터 흔들어 낙선시키고자 하는 ‘국내판’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민주당에 대한 무어의 태도는 양가적이다. 대선 결과에 승복한 것과 이라크 공습을 지지한 것에 실망하면서도, “민주당을 찍겠다”는 병사의 말 등을 통해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 입장을 표명한다. 양당제하에서 ‘안티-부시’는 ‘민주당 지지’와 현실적 동의어이다. 그러나 ‘안티-부시’의 명분이 ‘민주당 지지’로 논리상 전화되는가? 부시가 자본과 유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애국법’과 ‘공포정치’로 국민을 협박하고, 가난한 이들을 사지로 내몬다지만, 그것이 다만 부시의 악행인가? 무어는 정권의 작동방식은 자본의 운동법칙을 따른다고 분석하면서도, 오로지 ‘부시’라는 개인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국가독점자본주의체제가 어디로 가겠으며, 민주당인들 기업과 유착이 없겠는가?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미국사회 전반에 관한 자성과 통찰을 보여주던 무어가 <화씨 9/11>에서는 체제와 정권을 혼동하는 듯 오류를 보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전술상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는 중요하지만, 누가 되더라도 체제의 모순이 해소되진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안 우리에게, 무어의 선동술은 너무 얄팍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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