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뉴스]
[인터뷰] <거미숲>의 송일곤 감독
2004-09-03
글 : 김은형 (한겨레 esc 팀장)
“고통의 기억 떠도는 숲 가기 싫지만 꼭 가야할”

영화 <거미숲>을 보고 나면 거미줄로 빽빽한 숲 한 가운데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현재와 과거, 그보다 먼 과거, 현실과 기억, 왜곡된 기억이 여러 겹의 거미줄처럼 짜여져 있는 <거미숲>의 줄거리를 설명하기란 간단치 않다. 어두운 숲 속을 한 사내(감우성)가 헤매며 걷는다. 그가 찾아간 별장에는 난자 당한 중년의 남자와 죽기 직전의 젊은 여자가 누워 있다. 정신없이 뛰쳐나오던 남자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고 쓰러진다.

영화의 첫 장면은 긴 이야기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고 중간 기착지다. 필름이 돌아가면서 아내의 사고사,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 새롭게 찾아온 사랑 등 주인공 강민이 지닌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그러나 이 기억들은 시간적으로 잘리고 다시 강민의 죄의식과 욕망으로 변색되면서 입체퍼즐 조각처럼 흩어진다. 관객에게 까다로운 숙제를 던져주면서 “인상적인 그림 한 점이나 음악 한 곡을 감상하는 느낌으로 즐겼으면 한다”고 말하는 송일곤(33) 감독의 권유가 문득 얄밉게 들린다.

잔혹한 살인사건과 목격자인 주인공의 사고, 지워진 기억의 복원 등 <거미숲>은 미스터리 스릴러라는 장르 영화의 얼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야기의 ‘거미줄’을 풀어가다 보면 감독의 야심이 단순한 장르적 쾌감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꽃섬> 때보다 관객들이 편하게 볼 수 있는 틀거리로 스릴러라는 장르적 접근을 했어요. 그러나 틀 그 자체보다는 주인공의 기억이나 무의식을 따라가는 내적인 심리드라마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감독의 이런 의도는 영화의 초반부에 떠오르는 ‘누가 죽였을까’라는 궁금증을 ‘왜 죽였을까’로 선회시킨다.

애당초 <거미숲>이 찾고자 하는 것은 ‘범인’이 아니다. “오르페우스처럼 슬픔을 가진 채 극단적 상황에 놓여있는 남자”를 통해 정신적 상처와 기억, 그 기억을 왜곡시키는 무의식의 욕망, 죄의식 등 녹록지 않은 단어들을 끌어내고자 한다. 강민의 아내역과 함께 서정이 1인2역으로 연기하는 민수인은 거미숲에 들어가는 문의 열쇠 같은 인물이다. 민수인은 죽은 아내의 얼굴에 어린 시절의 여자친구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상처와 죄의식을 부정하려는 강민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고, 또 어린 시절 결핍됐던 어머니상, 나아가 강민을 치유하고 위무하는 존재”라고 감독은 덧붙인다. 민수인은 강민을 거미숲으로 안내하면서 “기억되지 못한 영혼들이 거미가 돼 숲을 떠돌아 다닌다”고 말한다. <꽃섬>이 슬픔을 잊을 수 있는 이상향이었다면 거미숲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존재하는 곳이다. “숲은 많은 이들이 가고 싶어하지만 막상 숲 깊숙이 들어가면 무섭고 빠져나오고 싶은 곳입니다. 길을 잃기도 쉽고. 거미숲은 가기 싫지만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하는 어떤 곳, 어쩔 수 없이 대면해야 하는 어두운 진실인 셈이지요.”

송일곤 감독은 1년 반 동안 강민의 연대기와 영화적 연대기를 끼워 맞췄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며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친절한 설명으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관념들을 상징과 비유로 그려내는 작업은 “그때 생긴 이마의 주름이 아직 안 지워질 정도”인 감독 뿐 아니라 스태프들에게도 쉽지 않았을 터. 순제작비 14억원으로 뽑아낸 고급스러운 질감의 화면은 ‘저예산 독립영화 감독’과 스태프들의 지난했던 시간을 짐작케 한다.

9월 초 송일곤 감독은 쏟아질 관객들의 질문과 흥행부담을 훌훌 털어버리고 제주 우도로 떠난다. 옴니버스 환경영화 의 중편 ‘깃’을 연출하기 위해서다. “‘계도’와는 거리가 먼 부드러운 로맨스가 될 겁니다. 허리 휘게 고생한 스태프들과 일처럼 놀이처럼 찍을 거예요.” 송 감독은 이제 악몽의 거미숲을 천천히 빠져나와 치유의 여정을 밟게 되는 모양이다.

사진·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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