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애타게 순결한 영혼을 찾아서, <거미숲>
2004-09-22
글 : 심영섭 (평론가)

<거미숲>을 통해 본 송일곤 감독의 시적인 영화미학

내 얼굴이 한폭의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주어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 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 든다 - 기형도, 병(病) <입속의 검은 잎> 중

결혼식 초야를 치르고 독사에게 물린 아내를 저승사자에게 잃은 남자는 지옥에까지 내려가 거문고를 연주하며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찾아 헤맨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저승의 계단. 남자는 그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면서 자신에게 중얼거린다. 아내는 살아 있다.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그러나 남자는 결국 뒤돌아본다. 소금 기둥이 되는데도 뒤돌아본다. 검은 창에 자신의 모습만이 비추어지는 그 저승의 창문 앞에서. 기억은 흡혈당하고 길은 뫼비우스 띠처럼 자꾸자꾸 제자리로 돌아오는 미로 속에서, 오르페우스이자 라스콜리니코프의 화신인 이 남자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만다.

<거미숲> - 한국영화 사상 드물게 영화의 ‘추상화’를 시도하다

송일곤 감독의 신작 <거미숲>은 신화와 소설과 영화의 모티브들이 복잡한 실타래처럼 뒤엉켜 어두운 심연 사이에서 입을 벌리고 조각난 기억들이 가르랑거리는 그런 영화이다. 감독 본인이 순순히 털어놓았듯, 이 영화에서 죄와 구원의 문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광기와 내통하고,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지워 내는 영화적 문법은 펠리니의 <여인의 도시>와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를 동시다발적으로 주석으로 삼았으며, 아내를 잃은 남자가 저승을 헤매는 듯한 주관적 기억의 순례기는 오르페우스 신화의 한 조각이 감독의 눈에 들어갔음을 확신케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떠나 <거미숲>은 매혹적이다. 시적이고 우아하며 잘 계산되었고 지나치게 단아하다. 정신분석에 매혹된 사람으로써 <거미숲>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오이디푸스의 재현이자, 라캉과 지젝이 너무도 좋아했을 만한 정신과 환자의 케이스 스터디처럼 보인다. 주체는 분열되었고, 유령은 자신이 죽어 있는 것을 모르며, 욕망은 왜곡된 기억의 나선을 따라 현실을 뒤덮어버린다. 두번이라면 신물이 났을지도 모를, 그러나 한국 영화역사에서는 처음 있는, 송일곤 감독은 드물게도 스타일리시한 방법으로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꿈꾸며 욕망, 주체, 무의식, 실재계의 불협화음을 손에 잡힐 듯 시각화한다.

입 속의 검은 잎이 나풀거리듯, 이미 설암으로 입 속의 병든 잎을 경험했던 <꽃섬>의 주인공은 다시 한번 입 안에서 우굴거리는 거미들을 바라본다. 송일곤의 영화에서 죽음이란 혹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의 재림이란 입 안의 이파리처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다. 구강적 욕망이 살아 숨쉬는 그 장소에 오히려 죽음의 공기가 흡입되어지는 경지. 그리곤 그의 주인공들은 흔히 죄를 지어서 죄의식이 생기기보단, 더 많은 죄의식에 시달리기 위해 친족들을 살해하는 듯 보인다. 집단자살을 감행했던 <소풍>의 아이는 혼자 살아남았고, <간과 감자>의 카인은 감자 몇알에 형의 목숨을 바꾸고 그것으로 가족에게 일용할 양식을 가져다준다. 그리곤 살아남은 이들 앞에 놓여 있는 심연 속에서, 물론 죽음보다 더 못한 삶이 기다릴 것 같은 그 순간에도 송일곤은 자신이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는 쪽이다. 그래서 <거미숲>의 첫 프롤로그는 송일곤의 영화세계의 서명이자 인장이었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자. 미끄러지는 트래킹숏. 프레임과 유리창이라는 앞과 뒤, 위와 아래를 가르는 장치들. 무엇보다도 다시 겨울로 돌아간 변함없는 송일곤의 계절 감각. 음악에 앞서는 거칠고 황량한 바람소리. 이것은 앞이 아니라 뒷모습의 영화이며, 뒤를 쳐다보아 과거를 돌아나오는 영화이며,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실에 미끄러지는 기표들, 기억들, 욕망들. 무엇보다도 영혼에 대한 영화라고. 그 한 프레임에는 송일곤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거미숲>에서는 어둡고 무거운 길 잃은 기억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검은 집>의 창문이 그러하듯, 데이비드 린치의 ‘린치 타운’에 걸려 있는 벨벳으로 만든 파란 커튼이 그러하듯, 그곳은 나쁜 꿈이 현실이 되는 곳이며 검은 피가 무의식의 동맥에 녹아들어가 의식의 수액이 되어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공간이다(지젝은 이걸 현실에 난 구멍, 실재계라 하겠지). 이것은 현실입니다. 이것은 과거입니다 하는 경계가 없는 공간이다. 기억의 미로를 숲으로 형상화시킨 이곳에서 여전히 여자들은 중력을 이기고 하늘로 올라가고(<꽃섬>의 마지막을 떠올려보라. 송일곤의 여자들은 늘 하늘로 떠오른다) 머리를 다친 남자에게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물론 여성주의 관점에서 맘에 안 드는 남성 판타지임에 틀림없으나 그러나 그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송일곤 감독이 이 경계를 넘나드는 장치로 플래시백 대신에 선택한 것이 사람들의 얼굴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세명의 여성주인공들이 시종일관 카메라에 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던 <꽃섬>에서도 두드러지게 이용되었다. 과거-대과거-현재-과거-현재로 이어지는 이 복잡한 플롯 구성에서 우리가 시간의 이동과 편집의 구심점으로 찾아야 하는 지표는 플래시백이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이다. <거미숲>에서 헤어져야 했던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주인공의 왜곡된 기억의 흔적일 수도 있는 이 이야기에서 소녀를 떠나보낸 소년의 얼굴은 다시 바로 강민 PD의 얼굴로 이어진다. 혹은 죽은 아내의 얼굴은 꽃을 든 여자인 민수인의 얼굴로 이어진다.

역할이 어떠하든 <거미숲>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러므로 흔히 누가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되는 영화 속 주인 찾기의 문제를 송일곤의 영화에서는 떠들어봤자 참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송일곤이 관심있는 것은 공간과 얼굴, 피사체에 대한 카메라의 멀고 가까움의 문제, 이의 등가성을 통해 확보하는 초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공간에서 이동할 때,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현실과 판타지를 오갈 때, 그 심리적 통로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서 늘 송일곤은 느린 트래킹숏으로 공간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경향이 있다(<꽃섬>이 비평가들의 많은 비판을 받은 진정한 이유는 이 영화에서 얼굴에 대한 욕망이 공간에 대한 감각을 눌러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거미숲>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수인과 강민 두 사람이 숲속을 걸어가는 롱숏을 떠올려보라. 반대로 가장 가슴 아픈 고백이나 신화적 서사가 끝난 뒤, 거기에는 늘 누군가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다. 공간을 잡아내고 얼굴을 잡아내는 두숏은 피사체와의 거리가 극단적으로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매우 비슷한 질감과 무게를 지닌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에서 얼굴 클로즈업은 막다른 골목에서 스스로 선택한 정지의 움직임처럼 죽음을 이기려는 의지이며, 향수이자 신비이고 이 세계의 고통을 넘으려는 초월에의 희구같이 느껴진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송일곤은 데이비드 린치와 한끝이 다르다. 송일곤의 영화에서는 그의 마음속 깊이 감추어져 포기할 수 없는 저 도도한 유러피언 마인드, 베리만이나 키에슬로프스키 같은 감독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초월에 대한 희구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미숲>을 통해 감지되는 송일곤 감독의 무의식은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은 살인을 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기우는 ‘윤리’에 대한 욕망 같은 것이다.

지나치게 관념적이지만 순결한 시인의 영혼

그러한 면에서 송일곤 감독의 유일한 문제점은 그가 지나치게 잘 만든 영화쪽으로 다가서는 끊임없이 노력하는 정공법의 감독이고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는 <꽃섬>에서처럼 여자를 모르면서 여자 이야기를 하고, <거미숲>에서처럼 악을 모르면서 악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곤 늘 뒤탈이 난다. <거미숲>의 어떤 장면은 송일곤 감독의 특기인 시적인 서정성과 삐걱거리며 톤이 전혀 맞지 않는다. 특히 국장에 대한 묘사는 더욱더 그러하다. 사악한 아버지, 에우리디케를 물어버린 독사(국장의 별명은 실제로 독사이다) 혹은 대타자인 이 아버지의 눈을 피해 강민 PD는 방송 중에 편집을 한다. ‘검이 짧으면 일보 전진, 여건이 안 되면 노력을 배가하라’는 그의 말은 전형적인 거세 판타지를 불러일으키는 가부장의 면모를 지녔지만, 막상 현실에서 넥타이를 목에 걸고 리포터의 머리채를 잡아 섹스를 하는 국장의 직설적인 행동은 우리가 다 떠올릴 수 있는 재미없는 평범한 인간의 그것이다. 오히려 송일곤 감독의 미학은 이미 죽어버린 여자를 마른 꽃으로, 켜켜이 앉은 기억의 실체를 푸른 먼지로, 인간을 관장하는 신의 이미지를 알 수 없는 곳에서 나타나 목덜미를 무는 드라큘라 곤충으로 표현하는 그 상징적이면서도 시적인 이미지의 배열에 있을 것이다. 특히 소리를 설계하는 그의 재주는 참으로 인상적이어서 가장 잔혹한 살인의 방식은 분수처럼 품어지는 피가 아니라, 국장의 몸을 관통하는 낫의 소리이며, 귓가를 휘감는 바람의 소리는 방황하는 영혼의 비가처럼 들리기도 한다. 앞으로도 송일곤은 결코 음악을 남발하거나, 정서를 질질 짜내거나, 먹기 좋은 이야기로 관객을 기쁘게 하는 그런 유의 감독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무한대의 점근선처럼 영화쪽으로 다가가는 순결한 감독이지 그 틀을 훌쩍 뛰어넘는 도발적인 감독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스파이더>란 영화에서 방 안에다 몇개의 줄을 쳐놓고도 거미줄이라고 우기지만, 송일곤 감독은 굳이 남도의 어디 끝까지 가서 진짜 <거미숲>을 찾아내고야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할 때, 송일곤의 탁월한 재주는 힘을 얻는다. 그의 영화언어는 본질적으로 시인의 영혼을 지녔다.

서정은 동굴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는 강민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당신의 세계예요.” 이것이 송일곤 감독의 세계일 바에야 개인적으로 나는 관객과의 의사소통의 문제 때문에 그가 컷을 낭비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싶다. 어차피 <거미숲>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관객이라면 슬로프가 멈춰지는 스키장 기계를 잡아내는 중간 숏이나 살인을 위해 문고리를 잡은 강민을 보여준 뒤 다시 그가 숲에서 무엇인가를 쳐다보는 설명 숏 같은 것이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거미숲>의 어떤 장면들은 사족처럼 붙어서 결정적인 순간을 잘라먹고 들어오고, 반대로 어떤 장면은 더 길어도 좋다 싶을 정도로 여운이 남는데 짧아서 아쉽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불구하고 <거미숲>에서 내가 본 것은 한 재능있는 감독의 미래였다. 그가 여자를 알고 악을 알고 뼈에 사무치는 후회를 알고 나서 만들, 어둡고 아름답고 윤기있고 반짝이는, 낫을 든 남자와 꽃을 든 여자가 공존하는 세계. 앞으로 코미디를 만들더라도 송일곤의 영화미학의 본질은 순결한 영혼에의 희구, 시적인 이미지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리듬 감각만 살린다면, 그에게 돈을 댈 누군가가 그럴 자유를 준다면…. 거미가 된 영혼은 자신이 죽은 걸 모르지만, 만약 누군가가 그 거미를 기억해준다면 그 거미는 영혼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과연 <거미숲>에 얼마의 관객이 들지는 모르지만, 그중에서 단 한명만이라도 송일곤의 영화를 기억해준다면, 이 감독은 기꺼이 ‘거미숲’에서 빠져나올 것이다. 진심으로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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