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은 장난감이 아니며, 총을 쏘는 행위는 패션이 아니다. 명확한 대상과 이유를 모르는 자의 총질은 한낱 바보 같은 행위일 뿐이다. 싱싱하던 시절의 엘비스 코스텔로가 만든 앨범 제목처럼, 올바른 행동엔 ‘진실한 혹은 명확한 목표’가 있어야만 한다. 클로브 샤브롤이 마지막 공산주의 영화가 될 거라 했던 <의식>과 나이든 세 악동 래리 클라크와 에드 라크만, 하모니 코린이 만든 캘리포니아의 지옥도 <켄 파크>는 ‘나는 총을 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의식>의 마지막, 두 여자는 <돈 지오반니>를 보던 일가족이 사냥감인 양 장총을 발사한다. <켄 파크>의 처음, 스케이트보드를 타던 켄 파크는 셀프카메라 앞에서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겨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보호자의 가슴에 칼을 꽂는다. 가정부가 주인을 살해한 이유를 우리가 궁금해하는 만큼, 켄 파크의 친구들도 그의 자살과 그의 살인이 이상하기만 하다. 거기에 더해 우리가 느끼는 까닭 모를 죄의식의 정체는 대체 뭘까? 눈앞의 범죄자인 그들이 어쩌면 희생자가 아니었을까?
일상의 삶을 살고 있던 부르주아 가족과 어른들은 죽음 앞에서 ‘왜 우리가 죽어야 하지?’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쉽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의식>과 <켄 파크>는 누군가는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두 영화는 계급의 존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그래서 두 여자를 기껏 동정과 멸시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못하는 부르주아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아이들에게 희망없는 미래를 유산으로 남긴 어른들에게 죄를 묻는다. <의식>과 <켄 파크>는 살인에 대한 정당화가 아닌, 총을 당기는 행위에 대한 질문이자 답변이다. 정말 그렇다. 두 영화는 오랜 시간 삭이면서 살아온, 울분 가득한 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자 부르주아 문화와 가족, 체제에 던지는 화염병이다. 만약 <의식>을 미친년들의 난동으로 생각한다면, <켄 파크>를 싸가지 없는 것들의 포르노그라피로 봤다면, 당신은 정작 총을 맞아야 함에도 맞을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의식> DVD 부록 속의 클로드 샤브롤이 흥미롭다. 공산주의자는커녕 부르주아인 그가 계급의식을 다룬 영화를 지휘하는 모습이 신기하지 않은가. 외모 때문에 독재자형 감독일 거라 생각했다면 오해다. <켄 파크>는 노골적인 묘사로 인해 영화가 제작된 미국에서는 제대로 개봉되지 못했다. 그래서 DVD는 주로 유럽 지역에서 출시되고 있다. 이용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