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범죄와 배신의 섹시한 파노라마, <팜므 파탈>
2004-11-16
글 : 김용언
꿈과 사진을 넘나드는 데자뷰의 향연, ‘리얼 배드 걸’이 펼치는 범죄와 배신의 섹시한 파노라마.

“난 누구도 사랑한 적 없어. 영혼까지 썩어 있으니….” 여자는 꼼짝달싹 못하게 붙들린 채 이를 갈고 있는 남자에게 속삭인다. “돈이 오기까지 몇 시간 여유가 있어. 어디 가서 좀 놀다올까?” 이 뻔뻔할 정도의 태연함, 너의 쾌락을 즐겨라! 여기, 히치콕의 여주인공이 재탄생한다.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를 그토록 매혹시켰던, 그리하여 결국 추락사당하는 킴 노박의 옆모습은 우아하게 스카프를 감고 커다란 선글라스로 눈에 든 멍을 감추는, 그러나 결코 살해당하지 않는 옆모습으로 재현된다. “왜 악당들이 잘사는지 알아?”라는 그 여자의 거만한 질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원하는 대로의 정체성을 덮어쓸 수 있다. 겉모습만 바뀌는 게 아니라 그녀의 기억조차 완전히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오래간만에 작심하고 히치콕 스타일로 찍은 스릴러 <팜므파탈>은 순수하게 (히치콕의) 영화적 쾌감을 체현하려는 욕망으로 팽배하다.

컴컴한 호텔 방 안의 남자가 갑자기 커튼을 열어젖히면 창밖으로 칸영화제의 스펙터클이 펼쳐지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육안으로 잘 잡히지 않던 ‘얼룩’들이 렌즈 속에서 살아서 꿈틀거린다. 끊일 듯 끊어지지 않는 볼레로의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보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 사이의 팽팽한 간극만으로 스릴의 속도를 조절하는 드 팔마의 테크니션적 감각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극중 파파라치 니콜라스(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인화하여 거대한 파노라마로 구성한다. 집 근처 카페를 즐겨 찍는 그는 일상다반사의 풍경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강한 흥미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군복을 입은 섹시한 여자와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불안에 떨고 있는 여자, 그 둘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과 은밀한 뒷거래, ‘빛을 반사시키는’ 은회색 가방, 뛰어들어오는 트럭 창가에 걸린 목걸이, 놀라서 크게 벌려진 입…. 지극히 평범한 파리 시내의 카페촌 한구석에서 벌어지는 이 사건들은 그야말로 ‘얼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룩을 보지 못한다. 혹은 별 관심이 없다. 그 얼룩을 눈여겨보는 사람은 곧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너무 많이 아는 사나이’가 될 것이다. 너무 많이 아는 건 그 대가로 죽음을 의미하기도, 혹은 죽음에서 탈출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브라이언 드 팔마는 그 양극단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서서 관객에게 찡긋 웃음을 날린다. 이 음탕한 계획의 스펙터클의 일부가 되라고 유혹하는 그 웃음은, <팜므파탈>을 어떤 ‘고전의 다시 보기’ 개념으로 즐겁게 복습할 수 있을지 아니면 기승전결이 완벽한 스릴러를 기대했다가 내심 실망만 느끼게 될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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