力道山. 한 고개라면 넘겠다. 둘이라도 넘어볼 만하다. 하지만 이 산으로 가는 길은 한두 고개를 넘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역도산. 조선이름 김신락, 17살에 현해탄을 건너와 ‘조센진’이라는 과거를 지우고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러이자 전후 일본의 영웅이 되었던 사나이. 100kg에 가까운 거대한 몸 만들기, 카메라 트릭이 허용되지 않는 프로레슬링 훈련, 영화 전체에 깔리는 일본어 대사 소화, 그리고 실존 인물이라는 부담감까지. 산 넘고, 물 건너서, 바다 건너서, 이 험난한 지옥의 라운드를 거쳐 설경구는 어떻게 역도산이 되었나. 아니 역도산은 어떻게 이 괴물 같은 배우의 몸을 통해 부활했나.
“인터뷰는 … 다음날 할까요?”“그래… 그래요…. 지금은 뭐라도 다 씹어먹어버릴 것 같으니까….”
언뜻 살기(殺氣), 그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근접하지도 뛰어들지도 못할 것 같다. 그래 오늘은 돌아가자. 며칠 뒤면 <역도산>과 설경구 사이, 결국 홀로 치러낼 수밖에 없었던 그 길고 고된 경기의 첫 라운드부터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1라운드 · 차승재 vs 설경구
“그래 할게, 씨발, 내가 하면 될 거 아니야”
안 한다고, 죽어도 못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다.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역도산> 시나리오를 던져줘서 읽긴 했지만 이건 도저히 자신이 할 수 없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할 건 안 봐도 뻔한 거지. 뺑이칠 게 너무 분명하잖아요. 덜컥 하겠다고 했는데 책임을 못 지면 어떡해요. 단기간에 살을 찌우는 것도, 레슬링을 배우는 것도, 대사가 죄다 일본말인데 그걸 마스터한다는 것도 미친 짓이고, 설사 일본어를 배운다고 해도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는지도 미지수고, 뭐 하나 자신있는 게 없더라고. 게다가 <카라>로 망한 송해성 감독, <파이란>으로 겨우 일어섰는데 나 때문에 다시 <카라> 만들 수는 없는 일이잖아.” (웃음)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지 “설경구가 역도산이라며?” 하는 소문이 충무로에 퍼졌다. 이미 설경구의 차기작은 <역도산>이라는 것이 기정사실화되어갔다. “아주 발목을 잡으려고 여기저기 다 이야기를 하고 다녔더라니까….” 송해성 감독에게도 설경구는 절대적인 선택이었다. “솔직히 드라마틱한 역할이다보니까 탐내던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역할이 단순히 연기를 잘한다거나, 몸이 좋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가슴속에 뭔가 울분이나 악마성이 없으면 힘든데, 그렇게 놓고보니까 설경구밖에 대안이 안 보이더라고요.” 오히려 <오아시스>를 본 일본쪽 프로듀서 가와이 신야만이 “연기를 떠나서 저렇게 마른 사람이 어떻게 역도산 역을 하겠냐”며 걱정을 했다. 하지만 차승재 대표는 “걱정마라, 걔는 하면 한다. 조만간 역도산 몸이 되어 나타날 거다”며 장담을 했다. 그렇게 얼마간을 도망다녔지만 더이상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너 안 한다면 차선책은 내가 하는 건데… 이미 사전에 십몇억 깨졌어. 너 아니면 영화 엎어야 돼….” 협박 아닌 협박이 오갔다. “하루는 한다 안 한다를 놓고 차승재 대표와 길게 술을 마시는데 그 덩치 큰 사람이 술에 취해 불쌍하게 쪼그리고 자고 있더라고….” 아, 징글징글한 양반. 그동안 한번도 무리한 부탁을 안 했던 이 사람이 이토록 강력하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그래 할게, 씨발, 하면 될 거 아니야.” 물론 그 말을 하면서 울었던 사실은 죽어도 기억나지 않는다.
2라운드 · 일본 vs 설경구
“좆도 말이 뭐가 필요해, 이제부터는 감정이다!”
2003년 말, <실미도> 관련해 설경구와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려는데 사무실로 그의 일본어 선생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코피나게 공부해놓고 밤새 TV 봤다고 뻥치는 얄미운 모범생처럼, 그는 이미 <역도산> 준비를 차근차근 해오고 있었던 참이다. 평생 ‘조센진’임을 숨기고 살아야 했던 남자. 가까운 부인이나 비서 앞에서도 절대 한국어를 쓰지 않았던 독종. <역도산>에서 설경구가 한국말을 하는 장면은 죽기 전 병원에서의 몇 마디뿐이다. 가장 큰 부담이었던 일본어 연기를 놓고 제작팀은 “안 되면 더빙하자”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이 ‘알고보면 모범생’의 자존심에는 기도 안 찰 이야기였다. 그렇게 3개월간의 알찬 국내 교습을 받긴 했지만 그의 일본어가 일취월장한 것은 바로 일본에서의 몇달간이었다.
하지만 촬영이 가까워오자 설경구는 이 진귀한 ‘일본어특강’을 딱 끊어버렸다. “말투까지 쫓아갈 것 같아서”였다. “어차피 내가 연기하는 건데, 자꾸 누군가에게 배우다보면 그 사람의 말투에 갇혀버리겠구나, 나도 모르게 따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좆도 말이 뭐가 필요해, 이제부터는 감정이다! 라고 밀고 나갔죠.” 물론 이런 ‘똥배짱’도 그간의 고된 트레이닝을 통해 어느정도 붙은 자신감이 아니면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감독님에게 긴 대사라고 해도, 혹시 중간에 틀리거나 해도 짜르지 말고 일단 찍어보자고 했어요” 특히 역도산의 후원자인 칸노 회장 역으로 출연하는 후지 다쓰야(<감각의 제국> <열정의 제국>에서부터 최근작 <밝은 미래>의 그 배우!)와의 신들은 대부분 원신 원컷으로 처리했을 정도다. “후지 다쓰야는 워낙 대배우다보니 촬영 전에는 얼마나 설레고 흥분되었는지 몰라요. 그런데 칸노와의 모든 신들이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찍다보면 서로의 감정이 올라와서 그런지 한번에 가게 되더라고요. 처음에 마스터컷을 찍고 나중에 클로즈업을 따놓기도 했는데, 현장편집을 해보면 왠지 어색해. 결국 통으로 쓰는 게 감정상 좋고 자연스러울 만큼. 결국 배우들끼리는 백마디 말보다 눈으로 소통한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느껴지는 게 있더라고. ” 스탭들에 따르면 설경구의 일본어 대사로 인한 NG는 거의 없을 정도였다. 촬영장에서 일본 스탭들과 일본어로 나누는 대화를 들어봐도 설경구의 말투와 느낌은 한국말을 할 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툭툭 내뱉듯이 던지는 농담, 길지 않은 문장. 그러나 그의 짧은 한마디에 모두들 웃게 만드는 태도에는 언어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