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라운드 · 체중+프로레슬링 vs 설경구
“가라! 누구든 씹어먹을 것 같으니까…”
전설의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몸을 만드는 것은, <공공의 적>에서처럼 나태한 생활과 과식을 비결로 뒤룩뒤룩 살을 찌우면 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거대하지만 운동으로 다져진 몸을 만들기 위해 한시라도 근력운동을 쉴 수가 없었고, 보라매공원을 홀로 달리며 일면식도 없는 사자(使者)와 싸워나가야 했다. “뭐 로봇도 아니고 하루종일 운동만 하지는 않았어요. 놀고 싶으면 놀고 어떤 날은 하루종일 탁구만 치기도 했다니까. 사람들한테, 사실 이거 탁구영화야, 하면서.” (웃음) 하지만 본격적으로 레슬링 훈련에 들어가자 낙법에 누르기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다. “어이, 나 죽겠네”라는 말이 입에 붙어서 어느 누가 말을 걸어와도 일단 “어이… 나 죽겠네”부터 시작했다. <오아시스>에서 설경구는 “재수없을 만큼” 삐쩍 마르게 만들어버렸던 이창동 감독이 태산만한 덩치로 바뀐 설경구를 보고 “뭐야 이거? 도대체 뭐야 이거?”라고 놀랐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그래도 이창동 감독님이 왠지 양아치 냄새가 나는 게, 그럴듯하다면서, 느낌이 좋다고 하시더라고.”
물론 기본적인 합을 맞추고 들어가긴 하지만 링 위에서의 레슬링 경기는 거의 실제 경기를 방불케 할 만큼 육탄전의 연속이었다. 설경구를 제외하면 모두 실제 레슬링 선수이고, 아즈마나미 역의 하시모토 신야는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이 멤버가 도쿄돔에서 레슬링을 하면 티켓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일 정도의 호화 캐스팅인 것이다. 동시에 아마추어 선수 설경구에게는 제삿날을 받아놓은 캐스팅이기도 했다. “얘들이 다 진짜 선수들이라서 손이 돌덩이예요. 그 돌덩이로 어깨 한번 짓누르고 머리 한대 치면 와, 나 죽는 거지. 숨이 억억 막혀. 그래서 ‘모이카이’(한번 더)!가 제일 무서워. 다시 하라면 안 할 수도 없는 문제고. 죽을 것 같아도 그냥 참고 가는 거지. 한번 더하면 더 죽을 게 뻔하니까.” 골절은 기본이고 거친 싸움이 시작되면 예상치 못한 일들도 벌어지는 경기였다. “배우는 혼방(진짜)에서 잘하는 거야. 슛 들어가면 진짜 잘할게요”라며 꾀도 많이 부렸지만 실전의 시간은 빨리도 다가왔다. “긴장을 하다보니 절대로 안 들릴 것 같은 사람들이 들리더라고요. 관객이 본다면 한 50kg은 덜 나가는 작은 사람이 그 큰 사람들을 들기만 해도 시각적인 효과는 충분하거든요.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로 갈수록 벌떡벌떡 들리더라니까. 이무라(후나키 마사카즈)는 나한테 얼마나 맞았던지 분장을 지워도 지워도 안 지워지기에 자세히 보니까 정말 시퍼렇게 멍이 든 거였대요.”
며칠에 걸쳐 진행된 이 ‘징한’ 레슬링 경기장면을 지켜보던 후지 다쓰야는“단 한번의 불평없이 묵묵히 하고 있는 배우와, 그런 연기를 묵묵히 시키고 있는 감독과, 이 모든 일들이 묵묵히 일어나고 있는 한국 영화현장을 보며 자신은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 회식자리에서 이 초로의 신사는 “설경구라는 배우를 존경하게 되었다”라며 가슴 벅찬 고백을 던졌다. “레슬링을 3분20초 동안 쉬지 않고 하고나면 게거품이 나온다니까. 사는 게 이게 뭐야 하는 생각도 들고. 한판 끝나고 나면 누가 오든지 다 씹어먹을 것 같고, 싸먹을 것 같다니까요. 정말 골병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긴장을 하고 있어서인지 아픈지 모르겠어요. 아마 촬영 끝나고 나면 좀 앓을 것도 같아요.”
4라운드 · 역도산 vs 설경구
“내가 재연 배우야? 나 역도산 몰라”
‘일본, 역도산’이라는 주소로 편지를 보내면 배달이 될 정도로, 천황 아래 역도산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역도산은 전후 일본사회의 가장 중심에 섰던 남자다. “그전에도 그 이후도 역도산만한 슈퍼스타가 없었을 정도”다. 그러나 한국 관객에게 역도산은 거의 가상의 인물 수준으로 알려진 바가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 해도 한번도 실존 인물을 연기해본 적 없는 설경구에게는 역도산이란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었다. “촬영전에는 역도산을 잊어버리자, 라고 생각했어요. 그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에는 마이너스다라고.” 그래서 스탭들이 실제 역도산 사진을 들고 어슬렁거릴 때면 “야! 씨발, 사진을 왜 들고와, 내가 재연 배우야? 나 역도산 몰라. 나 역도산 연기하는 거 아냐, 역도산 이름만 따온 거야. 몰라?”라고 호통을 쳤다. 괜한 화가 스탭들에게 미쳤지만, 어쩌면 이것은 설경구가 본인을 향해 내지르는 과격한 주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이런저런 자료를 주었지만 대부분 읽지 않았다. “아는 게 병이 될 것 같아서”였다. 다만 레슬링 장면이 담긴 비디오만 보았을 뿐이었다. 히로시마 촬영 때 본 자료화면에서 처음으로 그가 신경안정제같은 약으로 그 짧은 생을 지탱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통 이 인간의 정체를 모르겠더라고. 센 사람, 나쁜 사람인 것 같다가도 고향, 나라도 없는 신세가 불쌍하기도 하고, 굵고 짧게 살다간 인생이 부럽기도 하고, 그렇다고 지 맘대로 살았냐 하면 그렇게 산 것 같지도 않고, 고독하고 외로운 건 나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원래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아닌가? 이런 사람이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고.”
실존 인물을 따오긴 했지만 시나리오는 가상의 일들이 더 많았다. 아야도, 칸노도 영화 속에서 새롭게 창조된 인물이었다. 역도산이 아니라, 설경구가, 내가 일본에 가서 레슬링을 한다고 생각하자, 새로 만들어가는 역할이라고 생각하자, 고 몇번이고 되뇌었다. “모사꾼에 신사, 야비한 짓도 많이 했고 술만 먹으면 싸움질이고, 완전히 꼬여 있는 사람이었죠. 게다가 욕심도 끝이 없어. 하지만 어떻게 잡은 권력이고 어떻게 올라간 자리인데 그걸 놓기란 쉽지가 않았을 거라고. 나라도 못 놨을 것 같아요. 게다가 반골기질이 있어서 하지 말란 일은 더 했던 사람이더라고. 그 점은 나랑도 비슷하지. (웃음) 역도산이 야쿠자인지 누군가의 칼에 찔려서 병원에 누워 있다가 결국 복막염으로 사망했거든. 그런데 가장 유력한 사인이 사이다 때문인 것 같다, 고 하더라고. 원래 콜라, 사이다 이런 걸 병적으로 마시던 사람인데 배가 그 꼴이 된 상태에서도 남들이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기어이 꾸역꾸역 사이다를 마셨나봐. 그 비서가 쓴 책을 보면 그냥 ‘사이다 드세요’ 했으면 안 드셨을 텐데, 후회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점차 공통점을 찾아가긴 했지만 설경구에게 역도산은 처음부터 살가웠던 존재는 아니었다. 그 속을 파보면 고름투성이긴 하지만, 어쨌든 외양상으로 최상의 계층을, 기득권을 연기하는 것이 처음이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옷들도 얼마나 좋은데요.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 의상비 다 합쳐도 역도산 양복 한벌 값이 안 될걸요. 이창동 감독이 자기 잠옷 가져다주고 스크립터가 아버지 몰래 빼온 잠바 입고 출연했던 거에 비하면 정말 부유한 역할이죠. 나중엔 내가 좀 즐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러다가 내 위에 누가 없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도 하고, 어찌나 기름이 흐르는지 닦아도 딱아도 번들번들해.” (웃음)
어느덧 설경구가 내뱉는 모든 대답 속에는 그와 역도산이 혼재되어 있었다. “내가…”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시나리오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설경구가 그랬다는 말인지, 역도산이 그랬다는 말인지 헷갈릴 정도다. 후지 다쓰야는 그런 설경구를 보며 “나는 설군이 역도산의 좋은 모습만 받아들였으면 좋겠네. 야비하고 폭력적인 모습 말고, 그 사람의 정신이나 굳은 의지 같은 좋은 기운들만 기억해주게”라며 염려했다. “그런데 그게 잘되나, 이미 내 속에 그 인간의 나쁜 기운들까지도 많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예요. 어쩌면 원래 내 속에 있는 사악한 기운들이 솟구쳐올라온 것일 수도 있고, 나 원래 착한 사람 안 좋아하는데, 역도산도 ‘한번 사는 인생 착한 척할 시간이 어딨냐’고 하잖아요. 그게 좋더라고.”
송해성 감독은 서서히 역도산에 몰입해가는 설경구를 보며 그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했던 것이 옳았음을 깨닫고 있다고 했다. “매신, 설경구가 하는 연기를 보면서 저놈 참 나쁜 놈, 저놈 참 불쌍한 놈. 설경구가 웃으면 기뻐지고, 설경구가 울면 슬퍼지더라고요. 지금은 설경구가 하지 않은 역도산을 상상하기가 힘들 정도예요. 이렇게 자주 감정적이 되었던 영화는 처음이었을 만큼.” 또한 스탭들은 “설경구 선배를 보면 미안해서 열심히 안 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 고생을 하고 나서도 숙소로 돌아가면 20, 30kg이 넘는 역기를 들고 나서 주무시더라고요. 정말 투혼의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투혼(鬪魂). 이 닳고닳은 수식어가 배우 설경구가 만나니, 혼을 던져버린다는 그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역도산, 서른아홉에 죽었는데 참 바쁘게도 달려왔던 사람이었어요. 이제 이 촬영 5일 남았는데 역도산 인생만큼이나 바쁘게 달려왔던 것 같아. 치열하게… 전쟁터 같았어….”
마지막 라운드
설경구, 역도산을 껴안다
“…긴타로, 우리 고향에선 말이다. 사람들이 참 많이 웃었다.… 형들하고 난 농담을 섞지 않으면 얘기를 안 할 정도였다. 우리 오마니 농담도 대단했지. 그런데 일본에 왔더니, 웃을 일이 없더라. 아이, 웃어서는 안 되겠더라구. 가난한 조센진이 뭐가 좋아서 웃고 다니냐고 욕하는 거야. 그래서 난 결심했다. 성공하자. 성공하면 웃을 수 있다. 아니 웃으려면 성공하자. 일본에서 가장 많이 웃는 사람이 되자. 그 때까진 웃지도, 울지도 말자….”
영웅의 초라한 마지막, 세상을 다 가졌다고 생각했지만 사후엔 상속세도 내지 못했던 이 남자의 삶이 “너무나 허무해서” 그렇게 설경구는 시나리오를 펼쳐놓고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여름 아침, 좁은 여관방, 숙취에 시달리던 서른일곱의 한 남자배우가, 서른아홉에 타국에서 죽어간 한 프로레슬러의 마지막 이야기 앞에 수건에 얼굴을 묻고 그렇게 엉엉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설경구와 역도산, 두 사람은 42년 만에 끝내 만나버리고야 만 것이다.
“… 그런데 이 기사 제목이 뭐예요?.”“음… 설경구는 어떻게 역도산이 되었나 … 뭐 이 정도…?”“되긴 뭐가 돼. 안 됐지.”
그렇다. 설경구는 역도산이 된 것이 아니었다. 천만번의 라운드를 거쳐서 설경구와 역도산이 서로 껴안아버린 것이다. 승부를 낼 수도 없이 그렇게 링 위에서 징하게 뒹굴어버린 것이다. 결국 오는 12월에 우리가 만나게 될 <역도산>은, 40여년 만에 무덤에서 끌어올려진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다큐멘터리도, 상처투성이 앞얼굴도 아니다. 설경구라는 필터를 통해 새롭게 해석되어진 한 고독한 남자의 초상, 그 비열하고 허무하고 서러운 뒷모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