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제너레이션>은 ‘자신의 세대’에 대해 발언한다. <플레전트빌>이 아니더라도 의미를 파악함직한 무채색 화면으로, 영화는 담담하고 처연하게 청년실업과 ‘카드깡’을 말한다. 시무룩한 표정과 풀이 죽은 목소리로 영화가 전하는 아픈 진실은 이런 것이다. 청년실업과 신용불량은 IMF사태 이후 일어난 일시적인 소요가 아니라 거대한 문명사적 과정이며, 노동과 고용의 신화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고.
그들은 왜 청년실업자가 되었는가?
최근 노동부 보고에 따르면 2004년 10월 현재 청년실업자 수는 35만5천명으로 실업률은 7.2%이다. 그러나 공식집계 외에 적극적인 구직 활동을 포기한 비경제활동 인구 30만7천명과 유휴 비경제활동인구 24만3천명을 합하면 실질적인 청년실업자 수는 90만5천명에 육박하며, 이런 사태는 향후 5%대의 경제성장률이 유지되더라도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라 한다. 이른바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실업’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산물이다. 자본은 호황기와 불황기에 따라 고용을 조절하고 상대적 과잉인구(산업예비군)를 형성·유지시킨다. ‘고용없는 성장’ 역시 자본의 축적에 따른 필연적 단계이다. 자본이 축적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불변자본/전체자본)가 높아져서 전체자본에서 고용을 유발하는 가변자본의 비중이 작아진다. 또한 국경을 넘는 자본 자체의 이동과 초국적 기업에 의해 국민경제의 틀이 무의미해지고, 이른바 ‘기술혁신과 경영합리화’를 통해 생산성이 급신장하면 일국 내 추가고용창출이 없는 경제성장이 나타난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의 핵심인 ‘노동시장 유연화’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양산한다. IMF 때 감행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로 일자리의 절대 수가 감소하였고, 나머지 일자리마저도 임시직, 계약직, 파견직, 위장 자영업화 등으로 ‘비정규직’화되었다. 경기등락에 따른 자본의 위험부담을 노동자의 고용불안으로 대치한 것이다.
병석은 낮에는 결혼식 비디오 촬영을 하고 밤에는 갈빗집에서 숯불 붙이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나마 부정기적으로 있는 비디오 촬영은 건당 수당을 받는 계약직이고 갈빗집 아르바이트는 손님의 사고로도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임시직이다. 재경은 고등학교 졸업 뒤 보험회사에 1년간 다닌 적도 있지만 무수한 해고 끝에 ‘카드깡’ 사무실에 불필요한 잉여의 노동자가 되었다가 하루 만에 “잘리고”, 자영업자를 위장한 (인터넷몰) 판매원이 된다. 이들의 과정은 어쩌다 일어나는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다. 실질적인 일자리 수가 감소하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마저 죄다 비정규직화되는 시대에 밟게 되는 필연적인 수순이다. 이들이 특별히 무능하거나 운이 나쁘기 때문에 겪는 일들이 아니라, 공공연한 ‘20:80의 사회’에서 상위 20%에 들지 못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겪는 일들인 것이다.
그들은 어쩌다가 신용불량자가 되었는가?
생산성은 높아졌지만, 20:80으로 양분된 사회의 하위 80%는 실업자 상태로 생존경쟁에 시달린다. 이들에게 이른바 ‘티티테인먼트’가 주어진다. 즉 ‘오락거리’(entertainment)와 ‘엄마 젖’(tits)이 이들 좌절한 실업자들에게 위로로 주어진다. 플레이스테이션과 소형차는 물론, 가난한 연인들의 모텔 출입과 캠코더로 대변되는 영화감독의 꿈 역시 일종의 티티테인먼트이다(캠코더를 통한 화면만 컬러이다. 무채색인 현실과 달리 그들의 환상만 색을 지녔다).
그러나 그것마저 공짜가 아니다. 그들은 돈이 없지만, 그것들을 살 수는 있다. 이른바 ‘신용사회’이기 때문이다. IMF사태 직후, 정부는 기업의 막대한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조정정책을 강행하였다. 그 결과 실업이 급증하고 중산층이 붕괴하면서 소득격차가 월등히 벌어졌다. 이로 인해 초래된 내수부진을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카드발급요건을 완화하였다. 그 결과 가계부채가 400조원에 이르게 되었다. 결국 막대한 기업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가계부채를 만들어낸 셈이다.
그들은 카드로 캠코더를 사고, “먹고 마시고 모텔 가느라” 카드 빚을 졌다. 직장 없이 가시오가피를 팔러다니는 병석의 형은 동생의 이름으로 빚을 지고 잠적한다. 재경은 가입비 130만원을 카드로 긁고 인터넷몰 판매자가 되었다가 친구들의 반품요구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돈한테 버림받아본 적 없는 실비”를 위해 그녀의 남친은 병석에게 돈을 꿔달라 한다. 급전이 필요해진 재경은 그나마 안면이 있는 ‘카드깡’ 업자를 찾아가고, 알음알음으로 300만원어치 ‘금깡’을 하게 된다. 같은 시각 병석은 유일한 꿈이었던 캠코더를 판다.
이 과정 또한 우발성은 전혀 없다. 그녀가 특별히 범죄적인 상황에 말려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카드깡’은 “급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지푸라기처럼 잡고 싶은 곳이고, 그렇게라도 돈을 빌린 이들은 모두 업자에게 고마워한다. 신용이 불량한 이들을 위한 ‘재야’ 금융권이다. 그녀가 찾아간 ‘카드깡’ 업자나 ‘금깡’ 업자가 잔혹하거나 비정한 것도 아니다. ‘카드깡’ 업자는 그녀가 지게 될 빚을 걱정하여 “안 좋은 건 줄 알잖아” 하며 말리고, ‘금깡’ 업자는 돈을 건네며 “위험하니까 조심”하란다. 시종 조마조마한 상황이지만 어떠한 폭력적인 사태도 일어나지 않는다(‘금깡’ 업자는 되레 현금을 놓아둔 곳이 그녀에게 노출될까봐 조심스러워한다). 그녀가 접하는 위험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이자의 메커니즘 자체로부터 오는 것임을 감독은 명확히 직시한다.
캠코더를 파는 병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노숙자에게 카메라를 탈취당하지 않으며, 억지로 터무니없는 가격에 매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의 거래 역시 자유롭고 평화롭다. 노숙자나 매수자도 병석보다 강하거나 약삭빠르거나 악(惡)하지 않다. 그가 어려운 딱 그만큼 그들도 어려울 것이고, 그가 이해하는 딱 그만큼의 폭으로 타인의 사정을 이해하고, 또 관심을 접을 것이다. 병석과 재경이 느끼는 불안과 암담함은 그들만의 특수상황이 아니다.
그들은 우울하고 그들의 인식은 유폐되어 있다
그들의 보편적인 정서는 우울함이다. 재경은 우울해 보인다는 말을 두번 듣고 해고당했다. 병석은 결혼식 비디오 촬영에 온통 우는 장면만 찍어 ‘잘릴’ 위기이면서도, 모텔에서 재경의 얼굴까지 우는 모습으로 찍으려 한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병석의 형은 “때려, 빨리!”라 피학적으로 소리치고, 노숙자는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며 찍어달라 간청하고, 갈빗집 뒤꼍에 앉아 있던 남자는 가만히 있다가 숯불을 사람한테 던진다. 재혼한 아버지도 싫고 이혼당한 엄마도 싫어서 혼자 산다는 실비는 절대 사진 찍지 말라는 말을 그녀 남친이 전한다. 병석의 이복동생도 고개만 끄덕일 뿐 좀처럼 말이 없고, 과민성대장증상이 있는 ‘카드깡’ 업자는 하필 “mute”(말없는)라는 단어를 그녀에게 묻는다.
영화 속 그들의 인식은 유폐되고 단절되어 있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은 없는 것이다. 나는 장님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럼 뭐가 있는 거지?”라는 유아론(唯我論)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배나무 아래에서 “배, 배, 배…”를 외치며 배를 두드리는 유명론(唯名論)을 거쳐, “카메라 꺼, 그럼 이야기 할게”에서 암전되면서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끝맺는다. 배는 뒤늦게 떨어지고, 그들은 망원경으로 자동차극장 화면을 기웃거리듯 세상 밖에서 서성이며 좀처럼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카드깡’ 업자의 말마따나) “대한민국이 다 어렵다”. 그래도 “나쁜 맘먹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그들의 다짐만은 흔한 것이 아닌 듯싶다. 춥고 돈없는 청춘을 ‘자신의 세대’라 칭한 감독이 전하는 한줌의 온기는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