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칼럼]
청춘, 청춘영화에 대한 단상
2004-12-31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12월3일 두편의 영화가 같은 날 개봉했다. <마이 제너레이션>과 <발레교습소>. 순전히 우연이었지만 나는 두 영화의 감독과 만나거나 전화로 인터뷰를 했고, 출연한 주연 및 조연배우들과도 만나볼 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념의 골방이 하나 생겼다. <마이 제너레이션>의 노동석 감독은 청춘이라는 말이 너무 좋다고 했다. <발레교습소>의 변영주 감독도 거리낌없이 청춘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그들이 자연스럽게 ‘청춘’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낯설었다. 심지어 내 생각에 두 영화는 매우 다르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동시기에 개봉한 자신들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청춘영화’라는 같은 용어를 쓰고 있었다. 이 점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편집위원들의 대담 말미에 청춘영화에 대한 짤막한 대화가 오고간 것을 보고는 기쁜 마음으로 읽어봤지만 내가 얻고 싶었던 만족은 없었다. 과거에 종종 사용되었던 청춘영화라는 범주가 오랫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예상치 않게 나타난 것에 대한 설명없이, 너무나 자연스레 청춘영화라고 부르며 인정하는 것 역시 낯설었다. 또, 도전과 저항이 청춘영화의 중요한 태도이어야 한다면, 그냥 저항영화, 도전영화, 새로운 영화라고 부르는 것이 낫다. 내 생각에 ‘청춘’은 행동의 그런 위풍당당한 풍채를 반영하는 언어가 아니다.

비슷한 용어로 한때 성장영화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하지만 인생에 어떤 규칙적인 생성의 마디점이라도 있는 양 부르는 이 말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 말은 스스로 일컫는 말이 아니고, 이미 타자화되고 과거화된 훈육대상으로서의 자신들을 인정하는 말처럼 들리기에 끔찍하다. 삶을 남들의 행진에 맞춰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스스로를 청춘영화라고 부르면서 등장한 이 영화들의 태도가 소중하다고 나는 느낀다. 물론 <마이 제너레이션>이 훨씬 좋은 평가를 받았고, <발레교습소>는 기대보다 못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청춘영화의 출현에 대해서는 분석적인 역추론도 필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소 나른한 다른 이야기로 맺고 싶다.

가령, 나는 아무래도 청춘을 정열이나 도전 같은 피끓는 활성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건 청춘이 아니라 좀더 단단하고 전투적인 다른 말로 불려야 한다. 오히려 청춘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것은 애수이고, 그로 인해 휩싸이는 것은 데자뷰다. 청춘은 ‘세상의 모든 유한함에 대한 찬가를 위해 만들어진 말’ 중 대표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무슨 이상, 의도, 결심 등과 연관이 있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유한성에 관한 예찬이 청춘영화가 가져야 할 진짜 태도일지 모른다. 그 유한함이란 단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감정의 유한함까지도 포함한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다 임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새로움을 기다리는 잠재태로 보일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태도 말이다. 거기에서는 떠날 것 같지 않은 절망도 곧 끝날 유한한 것이기에 희망의 전조가 되고, 서려 있는 모든 기쁨도 곧 끝날 것이기에 회한이 될 수 있는 이상한 자태가 있을 것이다. 그런 모호한 정의로 청춘영화를 생각한다. 써놓고 보니 별 요점도 없는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기에 불러앉혀 본 것뿐이다. 그리고 원래 청춘에는 요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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