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황금기의 완벽한 재현
강렬하고 화려하고 슬픈 이야기. “어른이 되면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비행기를 타고, 세상에서 제일 재미난 영화를 만들고,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겠다”던 소년 휴스는 그 모든 것을 이뤘고, 역사를 바꾸었지만, 자신을 돌보지 않았고, 그래서 외롭고 불행한 어른으로 늙었다. ‘스피드’와 ‘사이즈’와 ‘신기술’에 집착한 휴스의 생애는, 미국 현대사의 가장 밝은 빛과 가장 어두운 그늘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의 영화로 만들어내기에 그의 삶은 너무 거대하다”는 디카프리오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2시간46분의 상영 시간 내내 휴스의 전성기 20년을 따라잡느라 숨이 턱에 찰 지경이니까. 어떤 의미에서 <애비에이터>는 스코시즈의 대표작들을 집대성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택시 드라이버> <레이징 불>의 ‘추락하는 남자’가 <카지노>의 ‘화려한 무대’를 <좋은 친구들>의 ‘워킹’으로 걸어나간다고나 할까. 전작 <갱스 오브 뉴욕>이 너무 방대하고 무거운 이야기였다면, <애비에이터>는 반대로 한 인물에 집중해 따라가는, 그래서 조금은 날렵하고 리드미컬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다.
영화가 어떤 시대를 배경에 두르든, 완벽에 가까운 세팅을 선보이는 스코시즈는 이번에도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환상적으로 재현해냈다. 실제로 연출 여부를 고민하던 그를 사로잡은 건 하워드 휴스라는 캐릭터, 그리고 ‘아르 데코’ 스타일의 비주얼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 속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아무래도 ‘스타’들이다. 무려 8년 동안 하워드 휴스를 가슴에 품은 디카프리오는 젊은 백만장자의 빛나는 카리스마부터 기괴한 망상집착증에 이르기까지, 그의 가파른 삶의 등락을 열정적으로 체현했다. ‘미녀 수집가’로 악명이 높았던 휴스의 생에 ‘소중한’ 여인들로 남은 캐서린 헵번은 케이트 블란쳇이, 에바 가드너는 케이트 베킨세일이 맡아, 아이콘이 된 스타 여배우의 캐릭터에 걸맞은 매력을 발산했다. 이들이 군중의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레드 카펫을 밟아 차이니즈 시어터로 걸어들어갈 때, 그리고 ‘스타들의 놀이터’였다는 클럽 코코넛 그로브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마실 때, 타임머신을 탄 듯 현기증이 인다. 스코시스의 오랜 조력자인 프로덕션디자이너 단테 페레티와 의상디자이너 샌디 파웰의 솜씨.
장르와 시대를 과감하게 가로질러온 스코시즈지만, <애비에이터>에 이르러 새롭게 시도한 기술이 있었으니, ‘과거’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시도한 디지털과 아날로그 기술의 접합이다. 휴스가 <지옥의 천사들>을 촬영하는 과정, 그리고 직접 비행을 시도하는 에피소드에서 비행기의 미니어처와 모델을 대거 동원한 것이다. 특히 휴스가 새 모델의 비행기를 타고 시험 운행하다가 베벌리힐스에 추락할 때 비행기 날개가 집 지붕과 벽을 가르고, 기체가 부서지고 폭발하는 장면은 온갖 종류의 특수효과가 동원돼 만들어졌다. 모처럼 폭력이 없는 영화를 만들어냈지만, 이 장면만큼은 비명이 터져나올 만큼 무시무시하다. 스코시즈의 야심찬 시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시대 영화의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인 색감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그는 흑백 필름을 적색, 녹색, 또는 청색으로 분리 영사해 컬러영화처럼 보이게 하는 당대의 테크니컬러 효과를, 그 시대의 감성을, 디지털 기술로 모사해냈다.
스코시즈의 첫 오스카 수상작이 될까
<애비에이터>는 평단과 언론에 공개된 뒤로, 오스카 감독상과 남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좋은 친구들> 혹은 <카지노> 이래 스코시즈 최고의 걸작이라고 앞다퉈 상찬하는가 하면, “역대 오스카 수상작에 걸작은 드물고 수작은 많으니, 그런 의미에서 <애비에이터>의 감독상 수상이 유력하다”(<뉴스위크>)는 다소 가시 돋친 진단을 내놓기도 한다. 긴 세월에 걸쳐 네 차례나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과는 인연이 없었던 스코시즈, 미소년 핀업 스타의 이미지를 벗고 배우로 거듭나려 나름의 분투를 벌여온 디카프리오가 과연 연단에 올라 트로피에 입을 맞출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다. 중요한 건 하워드 휴스에 버금가는 영화에 대한 집착과 열정이 ‘보인다’는 사실, 그리고 로버트 드 니로 이후 마땅한 ‘페르소나’를 찾지 못하던 스코시즈가 디카프리오에게서 그 가능성을 찾았다는 사실이다. 마티와 레오, 그들의 ‘비행’은 이제 막 시작됐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인터뷰
“하워드 휴스는 가장 복잡한 완벽주의자”
하필 마지막 인터뷰가 우리 그룹이었다. 하루종일 인터뷰에 시달린 디카프리오는 무척 피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히워드 휴스를 연기하기 위해 검게 염색했던 머리칼은 햇살 같은 금발로 돌아와 있었지만, 휴스의 ‘올백 스타일’만은 유지하고 있었다. 젊고 미남이고, 돈이 많고 유명하고, 미녀스타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그는 하워드 휴스와 비교당하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하워드 휴스가 되기 위해 오래 준비했다.
-그랬다. 히워드 휴스의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8년 전에 처음 했고, 그동안 계속 이런저런 준비를 했다. 다행히 1년 정도 쉴 수 있었고, 그때 하워드 휴스에 대한 리서치를 많이 했다. 중간에 마틴 스코시즈를 감독으로 끌어들이고, 캐릭터 리서치를 하고, 그와 닮아 보이도록 연구했다.
=휴스의 어떤 점에 그토록 매료됐나.
-나는 작가가 아니다. 캐릭터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배우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사 속에서 흥미로운 캐릭터를 찾고 연구하는 일이었다. 하워드 휴스는 그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매우 ‘프라이빗’한 삶을 살았고, 그 삶은 미스터리에 싸여 있어서, 사람들은 그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런 인물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리서치 과정에서 휴스에 대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있나.
-그의 삶 속으로 여행을 다녀왔다는 표현이 맞을 거다. 그는 대단한 야심가였다. 수백만달러의 사비를 들여 영화를 찍고도, 유성영화 시대가 오자 사운드를 넣어 처음부터 다시 찍은 사람이다.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많아서 비행기를 개발하고, 몸소 시험 운행을 한 사람이다. 죽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또 디테일에 대한 집착도 대단했다. 제인 러셀의 가슴을 돋보이게 만들 완벽한 브래지어를 설계하고, 음식 주문을 할 때마다 조리법과 배달법을 수십장씩 메모해주었다고 한다.
=휴스의 젊은 시절 20년으로 이야기를 한정한 이유는.
-그의 후기 삶은 스토리상으로나 비주얼적으로나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은신해 살았으니, 세트는 방 하나면 됐을 것이고, 손톱을 길게 붙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가 미쳐가는 과정까지를 담는 게 영화적으로 적당하다고 봤다.
=제작에 참여했다. 연기 이외의 야심이나 계획이 있나.
-글쎄, 아직은 아니다. 배우로서도 할 게 많다. 이번에 처음 프로듀서로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로케이션이나 제작비 걱정은 다른 프로듀서들의 몫이었다. (웃음) 아직은 작품에만 집중하고 싶다.
=휴스가 비행 중에 캐서린 헵번과 우유를 나눠 마시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알아봐줘서 기쁘다. 하워드 휴스에게 우유는 모성과도 같다. 결벽증이 심한 그가 다른 사람에게 먹던 우유를 주고, 또다시 받아먹는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 여자와 자기 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일종의 고백으로 보면 된다.
=많은 여자들이 휴스에게 매료된 건 왜일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해해야 한다. 미국의 첫 번째 백만장자인 그는 할리우드의 황금기, 미국의 산업혁명기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세계 일주를 하고, 비행 신기록을 세우면서, 대중의 영웅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엄청난 미남이었다. 수줍음을 많이 탔지만, 매력적인 남자였다.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던 건 당연하다.
=당신과 휴스를 비교한다면, 어떤 점이 닮았나.
-모르겠다. 살아온 시대가 워낙 달라서. ‘프라이빗’한 삶을 원한다는 게 비슷하지만, 내 경우는 역할이 아닌 자연인으로서 내가 노출되는 것이 배우의 경력에 도움이 안 된다는 판단에서다. 정말 닮은 점이 있다면, 완벽주의자가 되려 한다는 거다. 휴스도 나도, 마티도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디테일에 집착한다. 휴스가 <지옥의 천사들>을 3년 동안 찍었다는 걸 보고, 마티와 나는 ‘만족할 때까지 찍고 또 찍는다 이거지, 와, 부럽다, 우리도 그래 봤으면…’ 했다. (웃음)
=<타이타닉>을 선택한 걸 후회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후 작품 선택에 영향이 있었나.
-아니다. <타이타닉>을 찍은 뒤의 인기나 그런 것들을 감당하기 힘들었고, 지금은 그런 비현실적인 기억들과 작별하는 중이다. 후회하거나 불평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타이타닉>을 벗어나거나 떨쳐볼 요량으로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