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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게 벗어나고픈 아웃사이더의 영화 <알렉산더>와 <샤크>
2005-01-19
글 : 신윤동욱 (한겨레 기자)
스위트 홈은 악몽이다!

어쩐지 <알렉산더>가 좋더라. 연초 난생처음 사주를 봤다. 역마살이 끼었단다. 남들이 ‘별로’라고 하는 <알렉산더>가 ‘별로’ 싫지 않았던 이유는 다 역마살 낀 알렉산더(콜린 파렐)에 대한 연민 탓이었던 게다. 나는 이런 ‘루저’들이 정말 싫다. “세상 사람들 다 싫지만, 엄마만은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루저들. 솔직히 이런 아이들은 루저가 아니다. 루저인 척하는 것일 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기댈 언덕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알렉산더>의 알렉산더는 정말로 집구석이 지긋지긋한 아이다.

“나는 너만을 위해서 살았다.”

사실 이 말만큼 부담스러운 말이 또 있는가? 더구나 ‘모성애’의 이름으로 이런 심한 말을 쏟아부으면 정말 속수무책이다. 감히 “누가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했느냐”고 대드는 순간, 그 자식은 패륜아가 된다. 기껏 알렉산더처럼 남몰래 “낳아준 대가로 많은 걸 원하시는군요”라고 중얼거릴 뿐이다. 어머니의 불행은 그렇게 아들의 불행으로 유전된다.

집이 싫어 세상을 정복한 유랑민 알렉산더

알렉산더의 어머니 올림피아(안젤리나 졸리)는 세상 모든 불행한 어머니의 대명사다. 어쩌면 불행한 어머니는 자신을 버린 남편에 대해, 자신을 업신여기는 세상에 대해 복수하고 싶어한다. 유일한 복수의 방법은 아들을 번듯하게 키우는 것. 올림피아의 욕망은 수천년 이어지고 있다. 올림피아에게서 가부장제에 학대당하고 자본주의 욕망에 저당잡힌 우리네 어머니 인생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난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학대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욕하는 어머니를 원망한다.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이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는 비극이다. 어디서 많이 본 시나리오 아닌가?(최근 어머니의 욕망에 측은지심을 느끼면서 비로소 체제의 품에 안기게 됐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나는 더이상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알렉산더>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의 성공 비결이 ‘알고 보면’ 집에 돌아가기 싫어서라고 말한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도 기껏 ‘엄마, 아빠’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이유가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랴. 하여튼 집구석이 지긋지긋한 것을. 다 역마살 탓이다. 알렉산더가 애마 부세팔루스를 타고 ‘말 달리자’ 하면 나도 ‘말 달리자’ 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영광스럽게 죽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그의 마초스러운 슬로건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집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는 그의 심정에는 동정이 갔다.

알렉산더는 칭기즈칸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전쟁) 노마드(nomad: 유목민)다. 알렉산더의 목표는 금의환향이 아니다. 그는 마케도니아로 돌아가자는 병사에게 “(페르시아의) 바빌론이 나의 집이다”라고 외친다. 바빌론마저 버리고 인도로 가는 길에는 “새 땅을 밟을 때마다 환상이 깨져”라고 되뇌지만, 그저 주어진 길을 꾸역꾸역 가고 또 간다. 집을 중심점으로 밖으로 뻗어가는 원심력만이 그를 움직이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칠 때도 있다. 알렉산더도 “이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찾을 테야”라고 안식처를 간구하지만, 정작 안식처는 어디에도 없음을 잘 안다. 부하들에게 등 떠밀려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는 목숨을 잃는다. 죽음으로써 모친과 작별한다.

길동무가 있는 노마드는 불행하지 않다. 알렉산더에게는 죽마고우(혹은 불알친구) 헤파이션이 있다. 헤파이션은 알렉산더와 레슬링에서 “유일하게 져주지 않은” 사람이다.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알렉산더의 길을 묵묵히 같이 걷는다. 헤파이션은 알렉산더에게 어머니에게서 얻지 못한 안식을,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준다. 알렉산더에게 헤파이션은 어머니이자 애인이자 친구였다. 영화는 알렉산더가 “친구가 있어 (미치지 않고) 견뎠다”고 말한다. 그렇게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미치지 않을 수는 있다. 모두가 적인 세상에서, 둘은 서로에게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저승에도 함께 가야지”라고 맹세한다. 헤파이션이 죽자 알렉산더도 죽는다. 어쩌면 알렉산더에게는 헤파이션과 함께 걷는 길이 더없이 안온한 집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에서 퇴출당한 채식주의자 상어 레니

알렉산더가 집을 떠난 노마드라면, 레니는 집에서 쫓겨난 홈리스(homeless)다. <샤크>의 레니(잭 블랙)는 위대한 상어 가문의 둘째아들이다. 아버지 리노(로버트 드 니로)는 상어 마피아의 보스고, 형 프랭키는 마피아 후계자다운 냉정함을 자랑한다. 가문의 영광은 포악한 식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상어의 세계는 마초의 세계다. 사나이의 규율만이 이 세계를 지배한다. 섬세하고 심약한 레니는 끝끝내 부적응하고, 가문의 수치가 된다. 레니는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주의자”라고 선언한다. 행동거지도 장난이 아니다. 상어답지 않게 꼬리를 꼬고 앉고, 앉아서는 꼬리를 치고, ‘끼스러운’ 목소리로 교태를 떤다. 형 프랭키가 “계집애처럼 행동하지마”라고 윽박지르고, 아버지 레노가 ‘남자 만들기’ 훈련에 돌입하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다. 레니도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용기를 내보지만 도통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레니의 행동을 관찰하다보면, 레니의 채식주의자 선언이 게이라는 커밍아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남들은 다 알지만 오직 한 사람만 모른다. 다른 어족인 복어 사익스(마틴 스코시즈)조차 아는 레니의 진실을 레니의 아버지, 리노만이 모른다. 아니 모른 척한다. ‘가문의 영광’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리노에게 레니는 ‘스위트 홈’의 달콤함을 깨는 애물단지다. 미국 중산층 가정의 가장 큰 악몽이 “아빠 나 게이예요”라는 선언 아니던가.

레니는 결국 아버지의 세계에서 도망친다. 자신에게 사냥 연습을 시키던 형 프랭키가 돛에 맞아 죽자 아버지를 대면하기가 무서워 물고기들의 세계로 숨어든다. 자유를 얻는 레니는 대놓고 끼를 발산한다. 줄무늬 스카프를 두르고 춤을 추고, 콜라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빤다. 그리고 친구 오스카(윌 스미스)를 지키기 위해 돌고래 분장을 하고 아버지 집으로 간다. 리노는 ‘드랙’을 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레니의 스카프가 벗겨지고, 화장이 지워지면서 리노는 레니임을 눈치챈다. 리노는 “변장을 해? 정체성을 잊었냐?”고 화를 낸다.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너는 가족의 편에 서본 적이 없어”.

레니의 가출은 오래 가지 않는다. 오스카가 “야채를 먹으면 어떻고, 물고기 친구가 있으면 어떠냐”며 “있는 그대로의 그를 인정하라”고 상투적인 말을 늘어놓자 리노는 감동을 먹어버린다. 그리고 레니를 포옹한다. 일단 해피엔딩. 레니의 집은 행복할까?

일러스트레이션: 이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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