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비싼 대가를 치른 실패작, <알렉산더>
2005-01-26
글 : 심영섭 (평론가)
올리버 스톤의 <알렉산더>가 저지른 세가지 패착

알렉산더는 기원전 320년, 동방 깊숙이 다다른 최초의 백인이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왕자로, 난폭한 마케도니아 전사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은 그는 호메로스의 애독자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고 동시에 저 멀리 인도에 가서는 잠수함 비슷한 물건을 타고 바닷속을 들어간 호기심 많은 탐험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플루타르크의 매끄러운 혀가 예찬한 이 영웅 대제도 미국이 낳은 이단아 감독 올리버 스톤 감독의 손에서는 집에 들어가기 싫어 길거리를 배회하는 가출한 10대 소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물론 놀랄 일도 아니다. 유난히 대통령이나 황제 같은 권력의 최정점에 오른 인간을 선호하는 이 미국 감독은 늘 이들의 날개를 뽑아 인간의 땅에 내던져야 직성이 풀리는 재해석의 애호가 아니던가. 스톤의 손에서 닉슨은 평생의 라이벌이자 영원한 이상인 케네디 초상화 앞에서 엉엉 우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화상처럼 각인되는 폭력의 화마를 그대로 경험하는 스톤의 주인공들은 항상 자신의 정체성을 시험당하곤 했다. <플래툰>의 어린 신병 크리스나 <도어즈>의 짐 모리슨, <내추럴 본 킬러>의 미키처럼. 이들은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과도한 폭력과 정치적 술수의 유혹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데, 그러나 알렉산더의 경우는 좀 심했다.

첫번째 문제- 엄청난 스케일에 안 어울리는 오이디푸스 비극

알렉산더의 가정사는 낱낱이 들추어지고, 전형적인 살부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이 사내는 결국 유령인 아버지의 환각을 경험하는 창백한 햄릿의 복사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여기에 치유 불가능한 알코올 중독자, 비역질하는 양성애자, 못 말리는 전쟁광, 허풍선이 엔터테이너, 선동가, 마마보이, 편집증 기질 모두가 알렉산더의 몫이다. 그는 온몸에 뱀을 두른 남근적 어머니와 복종하라고 외마디소리를 지르던 가부장적 아버지 사이에서 분열된 남성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거다. 1억5천만달러라는 억 소리가 나는 제작비를 퍼부어 히말라야부터 그리스까지 엄청난 스케일의 세트를 세워 매번 다른 장면으로 옷을 갈아입는 영화치고는 오이디푸스 비극이라는 심리학적 클리셰가 너무 심심하게 평범한 것 아닌가. 물론 이름처럼 혹 머릿속에서 돌소리가 나는 것인지 의심이 가는 이 감독의 가장 만만한 심리학적 해석이 오이디푸스 외에 무엇이 더 있었겠느냐마는.

<알렉산더>를 만들면서 스톤은 스탠리 큐브릭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만들면서 썼던 연출 전략을 그대로 반복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알렉산더>라는 큰 영화의 틀 안에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하나의 영화처럼 공들여 만들어 이것을 일렬로 죽 나열하는 방식 말이다. 나는 <알렉산더>에서 올리버 스톤이 던진 진정한 승부수는 컷들이 붙는 몽타주가 아니라 신들이 붙는 큰 장면의 배열에 있다고 본다. 독수리 문양을 담은 A자형 문장으로부터 시작한 영화가 다시 그 문장으로 끝나기까지 에피소드를 이루는 신들은 태양과 그림자처럼 낮장면과 밤장면을 반복한다. 명마 부세팔로스를 얻은 어린 알렉산더의 의기양양함 뒤에는 아버지 필립과 굽어보는 신화의 세계, 동굴 속에 새겨진 어둠의 세계가 이어져 있다.

새의 시점으로 굽어본 어지럽고 욕지기나는 낮의 전투장면이 끝나면 반드시 그보다 더 음탕한 시선이 오가는 술에 취한 환락의 밤이 어지럽게 펼쳐진다. 고대하던 아비의 월계관을 머리에 쓴 뒤엔 필시 어미의 목을 조르다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는 근친상간의 감정이 뒤섞인 그림자의 혼령이 춤을 춘다. 그것은 단지 낮과 밤이라는 배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부귀영화와 좌절, 표면으로 드러나는 영웅의 빛과 깊숙이 숨겨진 인간의 어두운 내면의 혼합물로서 알렉산더를 이루고자 한다. 게다가 거의 모든 에피소드가 연대기순으로 붙어 있는 이 영화에서 필립 왕의 암살장면만큼은 뒤로 돌아 영화의 후반부, 알렉산더의 죽음 직전에 배치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평생을 아버지의 그림자를 따라 살아간 아들 알렉산더라는 스톤식 해석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러한 배치는 의미있는 시도이지만, 그러나 가우가멜라전투부터 인도 원정으로 이어지는 알렉산더의 연대기는 2시간53분의 러닝타임 동안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두번째 문제- 말만 많은 각본,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한 것 맞아?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미드나잇 익스프레스>의 각본을 써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했고,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카페이스>와 마이클 치미노의 <이어 오브 더 드래곤>를 썼던 할리우드의 가장 잘 나가는 각본가인 스톤의 전력을 돌이켜보면. <알렉산더>에서 스톤은 장광설로 일관한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을 지켜본 늙은 톨레미의 회상은 시각적 탄력성을 잃어버린 채 헐거운 에피소드들을 얼기설기 기워 알렉산더에 대한 중언부언을 계속한다. ‘그는 신이었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의 삶을 변화시켰다. 그는 태양신인 아폴로처럼 세상을 환히 밝혔다. 어쩌고저쩌고.’ 그리곤 스톤의 장기인 음모론. 돌이켜보면 우리 모두가 알렉산더를 죽였다는 통한의 고백도 빼놓을 수는 없다. 여기엔 극한까지 가는 폭력을 극한의 몽타주로 밀어붙이는 스톤의 파워 넘치는 연출이 <알렉산더>에 이르러서는 더이상의 진화없이 기교적으로 남발되고 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망막을 태워버릴 듯 작열하는 색채, 까끌대는 질감, 보는 이를 기습하는 사선의 삐딱한 앵글들, 섬광처럼 잔상을 남기며 스쳐가는 플래시숏은 전형적인 올리버 스톤표의 영화형식들이다. 마치 관객을 코너로 몰아붙이며 라이트훅 한방, 레프트훅 한방을 쏟아붓는 것 같은 그의 몽타주들은 강렬한 최음제를 삼킨 것처럼 그의 영화를 때론 몽환적으로 때론 형식 과잉의 스타일로 작열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톤의 영화에서 롱숏은 있을망정 롱테이크는 없다. 그런데 <알렉산더>에서는 이 스톤표 몽타주가 구태의연한 각주처럼 인물들을 부연설명하는 데서 그친다. 안젤리나 졸리의 얼굴 위에 신화 속의 메디아를 그린 동굴 벽화가 겹쳐지고, 알렉산더의 눈과 독수리의 눈 그리고 동굴 속 오이디푸스의 피흘리는 눈이 하나가 된다. 이 가운데 알렉산더와 부하들간의 논쟁과 회유, 협박, 경멸 모두가 대사로 뭉뚱그려져 있는데, 스톤의 <알렉산더>는 오이디푸스 같은 비극적 신이 되기에는 너무 말이 많은 편이다.

세번째 문제- 미국적 세계관을 대변한 올리버 스톤

명문 규수감을 버리고 고산족의 여자와 결혼하며 알렉산더는 부하들에게 소리지른다. “그리스인들의 우월감을 떨치라. 타문명에 대한 오만은 역겹다.” 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지적대로 스톤은 <알렉산더>에서 두개의 이슈, 알렉산더의 팬 내셔널리즘과 팬 섹슈얼리즘을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어미와 비슷한 여자, 와일드 캐츠의 멤버 같은 이국 여자와 결혼하고 남자들을 사랑했다는 알렉산더의 양성애는 차지하고, 알렉산더가 추구했다는 세계화에 대한 신념은 스톤의 전력으로 보아서 또다시 당혹스럽다.

<알렉산더>에서 올리버 스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미국적인 가치에 대해 우왕좌왕하며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전쟁터의 알렉산더는 문명국 그리스의 고상함은커녕 여성화되어버린 동양과 야만의 결혼을 되풀이하는 혼란스런 정복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그러한 점에서 피로 물든 붉은 인도 정글은 곧 화염으로 불에 타는 <플래툰>의 베트남 정글의 다른 버전은 아니던가). 인도의 왕이 탄 코끼리와 알렉산더가 탄 말의 충돌은 이라크전 이후에 횡행했던 문명의 충돌 담론을 단 한컷으로 시각적인 번역을 해낸다. 그러나 이 궁극의 장면이 지나면 알렉산더는 곧 모든 피를 씻어내고 발코니에 서서 빛나는 두눈으로 바빌론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세상은 하나가 되리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특히 아무리 좋게 보아도 산속 깊이 숨은 다리우스 황제와 숨바꼭질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은 누구에게라도 오사마 빈 라덴과 부시를 연상케 만든다.

알다시피 올리버 스톤이란 이름이 한때는 미국 내부에 존재하는 양심의 총부리를 의미하는 시절도 있었다. 그는 에서 미국 군수산업체의 추악한 이면을 까발리고, 영화 <닉슨>에서 불온한 욕망에 흔들리는 나약한 인간 닉슨의 결함이 바로 팍스아메리카 시대에도 변함없는 미국의 치부라고 역설했었다. 자신이 태어난 60, 70년대야말로 스톤에게는 숙명의 시대였고, 미국 내부의 성찰자로서 아버지의 시대를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스톤을 아카데미는 변함없는 지지로 감싸안았다. 이제 스톤의 혀는 그가 즐겨쓰는 뱀의 이미지처럼 두 갈래로 갈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영화를 장식하는 독수리 문양의 A는 알렉산더의 A이자 혹 아메리카의 A는 아니었을까?

올리버 스톤 스스로가 <알렉산더>의 흥행 참패가 마이클 치미노의 <천국의 문>의 신화를 밟을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그 이야기는 <알렉산더>가 <천국의 문>처럼 저주받은 걸작이 되길 바라는 스톤의 욕망을 반영하는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스톤은 아마도 <알렉산더>에서 동료인 배우 윌렘 데포의 말대로 ‘늘 악마(여기서는 약물을 의미함)와 싸우고 있다’는 평가를 듣는 자신과 같은 야심가, 21세기의 또 다른 정치적 선동가를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위대한 것과의 지나친 동일시는 강단있는 독설가를 흐리멍텅한 보통 사람으로 바꾸어놓는 법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작가주의영화도 아닌 영화를 탄생시켰다(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같은 소품이 더 그다웠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필생의 기회를 놓친 것. 이 점이야말로 알렉산더가 환생한다면 살아생전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을 텐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이번에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린 쪽은 알렉산더가 아니라 올리버 스톤 그 자신은 아닌지. 올리버 스톤은 작가주의의 문패 대신 역사상 가장 비싼 실패를 한 수많은 감독들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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