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따로 또 같이” 가는 촌철살인 모음, 옴니버스영화제
2005-01-26
글 : 오정연
서울아트시네마, 1월29일부터 옴니버스영화제 상영

단편소설의 촌철살인은, 장편소설의 길고 깊은 호흡과 맞먹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런 단편들은 일정한 공통점을 가지고 한곳에 모이면서 더욱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이는 영화 역시 마찬가지. 독립영화 배급사 인디스토리가 1월29일부터 2월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개최하는 옴니버스영화제는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다. 전주영화제가 디지털 삼인삼색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2000년은, 류승완 감독이 몇년에 걸쳐 완성한 단편들을 묶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극장 개봉에 성공한 해이기도 하다.

이후, 공포를 소재로 한 아시아 감독들의 옴니버스영화 <쓰리>와 <쓰리, 몬스터>가 만들어졌고, 충무로 감독들이 인권을 주제로 한 옴니버스영화를 완성했다. 환경영화제, 세네프영화제 등은 재능있는 감독들에게 일정 정도의 제작비를 제공하면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장이 되어주었다. 이송희일, 유상곤, 이지상, 김정구 등 독립영화 감독들은 성(性)이라는 공통주제를 가지고 <사자성어>를 완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좀더 다양한 루트로 옴니버스영화가 만들어졌다. 한국영화아카데미 20주년을 기념하여 스무명의 감독들이 완성한 <이공프로젝트>, 충무로의 내로라 하는 스타감독들이 참여한 다음검색 필름페스티벌 등이 그 예. 동성애를 공통주제로 만들어진 <동백꽃 프로젝트>를 비롯, <국가보안법철폐 프로젝트>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 등 묵직한 사안을 재기발랄한 화법으로 접근하는 독립영화들도 중요한 결실이다.

영화제를 준비한 인디스토리의 오주은씨는 “옴니버스영화는 완성도가 떨어진다거나, 신인감독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7편의 국내작품들과 함께 상영될 10편의 해외작들은 다양한 스타일과 제작방식, 만만찮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들. 영화제 기간에는, 옴니버스영화의 제작·배급에 대한 세미나와 인디스토리가 제작하는 옴니버스영화의 제작발표회가 함께 열린다.

옴니버스 영화제

주관: (주)인디스토리
주최: (사)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주한독일문화원
관람료: 1회 6천원
문의: 서울아트시네마(www.cinematheque.seoul.kr, 02-720-9782), (주)인디스토리(omnibus.indiestory.com, 02-743-605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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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소개

동백꽃 프로젝트-보길도에서 일어난 세 가지 퀴어 이야기

<떠다니는, 섬>
동성애라는 소재와 보길도라는 한정된 공간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이성애를 다룬 영화들에서 끊임없이 반복했던 상황과 관계를 고스란히 동성애로 옮겨오면서 절실함을 더한다. 옛사랑의 서글픈 추억,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위한 도피와 그 끝에서 맞닥뜨린 두 연인의 갈등, 죽은 연인의 옛애인을 바라보며 느끼는 씁쓸한 감정 등 흔하디 흔한 이야기를 묘사한 세 단편은 저마다의 스타일을 자랑한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감독 중 유일하게 이성애자이면서 <히치 하이킹> 등을 통해 독특한 세계를 선보인 최진성 감독의 <김추자>는 애니메이션과 퍼포먼스, 뮤직비디오 등 다양한 형식을 두루 차용했다. 소준문 감독의 <떠다니는, 섬>은 존재 자체가 외로움인 이들의 지난한 감정을 서정적으로 묘사했으며, 김태용 감독을 주연으로 전격(!) 캐스팅한 <동백아가씨>는 동성애자를 사랑한 이성애자의 애증어린 시선을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독립영화인 국가보안법 프로젝트

<학습된 두려움과 과대망상>
인디다큐페스티벌과 문화연대가 기획·제작했다. 딱딱하고 무거운 주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선정된 감독들의 조합이 유쾌하다. 푸른영상의 김진열 감독은 93년 남매간첩단 조작사건의 주인공 김삼석, 김은주 남매의 경험을 생생한 자료화면과 인터뷰들을 통해 재현했고(<남매와 진달래>), <각하의 만수무강>을 통해 보수주의에 대한 날선 비판의식을 보여줬던 김경만 감독의 <학습된 두려움과 과대망상>은 극우보수주의자들과의 집요한 인터뷰가 돋보이는 작품.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 등 개성만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최진성 감독은, 소심하기 그지없는 ‘나’로 영화 속에 등장하여 경직된 세상을 비판한다(<캐치 미 이프 유 캔>). 미디어 참세상의 <저공, 원숭이, 그리고 상수리 열매>는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국회의원들과의 인터뷰가 ‘말 못할’ 이유로 인해 좌절되는 과정을 통해 국가보안법이 테러방지법, 집시법, 청소년보호법 등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드러낸다.

유토피아 Utopia-Nobody is Perfect in the Perfect Country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한다-보수당>
2002년 노르웨이 선거를 앞두고 만들어진 <유토피아>는, <국가보안법 철폐 프로젝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처럼 국내의 민감한 사안을 두고 기획된 작품으로 8개 정당의 이념과 그 한계를 신랄하게 성찰했다.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될 수 있는 줄거리 속에 액자식으로 구성된 각각의 작품에서는 초현실적인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자신의 존재가 없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는 가족들을 바라보는 가장의 허탈함(<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한다-보수당>), 대안가족을 이룬 레즈비언 커플과 한 소년의 소중한 인연(<가족-기독교 민주당>), 아프리카의 맹인 아이들을 돕겠다며 모금한 돈으로, 자신의 먹을 것을 사는 맹인 소녀의 침착함(<아이들을 구하라-진보당>), 줄줄이 늪으로 빠져들어가면서도 <인터내셔널가>를 합창하는, 늙은 운동가들의 웃지 못할 마지막(<대동단결-노동당>) 등을 통해, 복잡한 사안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영화적 화법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괴담 怪談

<설녀>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 일본 공포영화의 걸작. 아름다운 요괴와의 비밀을 지키지 못한 사냥꾼의 가슴 아픈 후회(<설녀>),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일가의 원혼을 달래주던 앞 못 보는 가수가 맞이하는 잔인한 최후(<귀없는 호이치>) 등 어린 시절 베갯머리에서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 네편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만큼이나 익숙하지만, 놀랄 만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각각의 작품들은 오늘날의 극단적인 일본 공포영화 이전의, 은근하고 심리적인 경향을 경험하게 해준다. 음산한 강과 바다, 울창한 숲까지 재현한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세트들 덕분에 시네마스코프로 촬영된 화면은 사실적인 한편 영화적이다. 아름다운 부인의 정체를 깨닫는 주인공의 섬뜩한 심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설녀>의 조명설계, 자신의 운명을 원혼에게 맡긴 주인공의 무기력함을 더해주는 <귀없는 호이치>의 생생한 카메라 움직임, 알 수 없는 화자의 정체가 스릴을 더하는 <찻잔 속에서>의 새로운 극적 시도 등이 인상적이다.

로봇 이야기 Robot Stories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유바리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비롯해서 30개 이상의 영화제에서 수상한 화려한 경력의 <로봇 이야기>는 한국계 미국인 그렉 박 감독의 장편 데뷔작. 입양심사를 위해 로봇아기를 기르는 젊은 부부의 갈등(), 비인간적인 인간들에게 혹사당하던 안드로이드가 옆 건물의 또 다른 안드로이드와 나누는 애틋한 사랑() 등 네편의 단편들은 각종 공상과학 텍스트들이 공유하는 인간성과 기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제시한다. 하나의 소재로 묶이는 짧은 호흡의 단편을 통해 주류 영화계에 승부를 던진 감독의 기발함이 돋보인다. 한편 짐 자무시 감독이 1986년부터 2003년까지 긴 세월에 걸쳐 조금씩 완성한 11편의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진 <커피와 담배> 역시 한 감독이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완성한 영화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다. 로베르토 베니니, 스티브 부세미, 케이트 블란쳇, 빌 머레이, 스티브 쿠건, 이기 팝 등 모든 에피소드에는 감독과 친분이 있는 유명인들이 등장하여 천연덕스러운 수다 연기를 선보인다.

원피스 프로젝트 One Piece!

<원피스 프로젝트>
다양한 러닝타임으로 이루어진 14편의 작품들은 모두 하나의 신과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져 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이 작품들 모두가 편집은 물론, 일체의 카메라 무빙과 음악, 사운드 작업까지 배제한 채 한 덩어리(원피스!)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야구치 시노부(<워터보이즈>), 스즈키 다쿠지가 함께한 이 프로젝트는 비디오카메라 한대와 번뜩이는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진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설파한다. 세심하게 고려한 카메라의 위치, 절묘하게 설정된 캐릭터와 상황으로 열악한 제작환경을 끝내 극복해내는 이들의 재기는 로테르담영화제와 베를린영화제 등을 한차례 놀라게 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이처럼 재기발랄한 젊은 감독들이 참여한 옴니버스영화들이 다양하게 제작되고 있는 일본 작품을 몇편 더 감상할 수 있다. 야구치, 스즈키 콤비가 백화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파르코 픽션>과 이와이 순지 등 촉망받는 감독들이 쓰마부키 사토시 등 인기배우들과 함께 만든 화제작 <잼 필름즈> 등이 그것.

에로틱 테일즈 Erotic Tales

<아리아>
에로티시즘을 화두로 전세계의 유명감독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옴니버스 프로젝트로, 현재 진행형인 작품. 여태껏 총 3번에 걸쳐 제작되고 있는 일본의 장기 프로젝트 <잼 필름즈>와 달리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으며, 각각의 감독이 섭외될 때마다 한 작품씩 제작하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의 할 하틀리, 아이슬란드의 프리드릭 토르 프리드릭슨, 영국의 켄 러셀 등 잘 알려진 중견감독들이 선보이는 저마다의 성적 판타지를 통해서, 다양한 ‘에로틱함’을 경험할 수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총 9편의 작품들이 세 섹션으로 나뉘어 상영된다. 한편 하나의 소재를 다루는 중견감독들의 방식이 어떻게 차별화되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면 <아리아>와 <죽음의 밤> 역시 놓쳐서는 안 될 것. 장 뤽 고다르, 로버트 알트먼 등이 만든 오페라 갈라 뮤직비디오 <아리아>는 고전을 해석하는 거장의 유머가 일품이며, 영국 일링 스튜디오가 1945년 제작한 공포물 <죽음의 밤>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감독들이 참여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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