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자폐아 마라토너 이야기 <말아톤> [2] - 정윤철 감독 인터뷰
2005-01-31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이혜정

이야기 사이사이 누벼진 현실

그러고보면 그의 단편 <기념촬영>과 <동면>, 장편 <말아톤>은 시작과 먼 듯하면서 가까운 듯도 하다. 서울단편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기념촬영>은 삼풍백화점 붕괴와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과 함께 ‘재난 3부작’을 이루는 영화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날, 어느 여고생은 스케치북을 집에 두고와 뒤늦게 택시를 타고 학교에 간다. 그 아이가 놓친 버스는 다리 아래로 추락했고, 언제인가 찍었던 친구들과의 사진 속에서 그녀 혼자만 살아남아 스무살이 된다. 대사를 아끼는 대신 공기와 햇빛을 타고 애틋한 감정이 넘쳐나는 <기념촬영>은 정윤철 감독만의 추모시다.

“삼풍백화점 터에 놓인 영정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500, 600개는 돼보이는 그 사진들은 기념촬영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죽은 이를 쉽게 잊는다. 슬픔과 상실감은 당사자들만의 몫이다. 그래서 <기념촬영>을 찍었다. 성수대교 아래 위령비 하나 없고, 삼풍백화점 자리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고층빌딩이 올라가서.” IMF가 휩쓴 현실을 SF영화로 돌려 찍은 <동면> 또한 그의 발언이었다. 아이 키울 돈이 없어 갓 태어난 아기를 냉동장치에 담아 돌아오는 젊은 부부, 미래로 건너뛰어 현실의 참혹함을 되짚는 영화. 그의 영화들에선 판타지와 현실, 현재와 미래가 몸을 섞는다.

초원이 좋아하는 얼룩말이 판타지로 스며든다고 해도 <말아톤> 또한 현실을 누벼넣었다. 엄마는 아이의 표정을 보면 알거든요, 초원이 완주할 수 있어? 없어, 끝까지 달릴 수 있어? 있어, 초원아 상추도 먹어야지, 운동선수는 뭐든 잘 먹어야 돼. 이런 상황과 대사들은 모두 현실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다. 그럼에도 현실 그대로는 아니다. “재료를 가져다가 먹음직스럽게 차렸다고 할까. 향을 더하는 것이 내 역할이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아이, 지하철 노선도를 몽땅 외우는 아이, 한달에 한번 비행기 타는 걸 취미로 삼은 아이(이 아이는 다행히도 아직 국제선의 존재를 모른다), 새로 다리가 생기면 꼭 가봐야 하는 아이, 그리고 어른의 얼굴에 어린아이의 표정을 가진 그 모두. 정윤철 감독과 두 작가는 직접 다가가 눈과 마음에 담은 자폐아들을 어느 하나 내치지 않고 초원 안에 담았다. 본 적 없는 존재여서 낯설지 몰라도, 초원은 우리 중 하나라고, 정윤철 감독은 몇번이고 되풀이해 말했다.

개봉이라는 이름의 다음 코스

쉬는 날도 거의 없이 석달을 꼬박 찍은 <말아톤>은 짧게 완성한 편에 속하지만 노동의 밀도만은 마라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달리는 호흡을 늦추며 바람의 감각을 일깨우는 이 영화는 짐작하는 것보다 지친 상태로 결승점에 도달한 셈이다. “언제 선상반란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한 분위기였고, 스탭도 배우도 나도 뭘 찍고 있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정윤철 감독은, 겨울이 오면 영화가 끝나리라는 위안을, 초원이가 먹고 힘을 내는 초코파이 삼아 살았다. 마라톤보다 힘든 여정이었다. “형진이와 마라톤을 하다가 42.195km를 완주했다. 10km는 경험이 있었고, 하프 지점까지는 어떻게 뛸 것 같았는데, 30km 넘어서니 죽을 것 같아도 돌아갈 길이 더 멀어서(웃음)…”라며 마라톤을 완주한 정윤철 감독은 단편과는 호흡과 무게가 다른 장편 앞에서 숨이 막혔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라토너보다는 불행하게도 감독에겐 완주가 끝이 아니다.

누가 돈내고 보러 올까,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소재로 출발한 <말아톤>은 이제 아득한 이미지 속으로 질주한다. 그를 오해했던 사람들과 손을 마주 부딪치고, 밀려났던 공간을 자유롭게 부유하고, 사바나 풀줄기를 줄무늬로 새긴 얼룩말과 나란히 달리는 초원. 그는 “비가 주룩주룩 내려요”라고 말해서 아들이 대학 들어간 것처럼 엄마를 기쁘게 했다는 형진이고, 결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모든 어머니의 자식이다. 이렇게 순한 숨결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나 돌아보도록 만드는 <말아톤>은 더 많은 이들과 함께해야 할 다음 코스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왕국에서 새끼를 기르는 이야기이다”

정윤철 감독 인터뷰

-실화를 바탕으로 삼은 영화는 드라마나 갈등이 부족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극복하려고 했는가.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코치와 엄마 사이에 로맨스가 생긴다거나 지친 아버지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린다거나.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세팅된 그대로 깊게 파보자고만 생각했다. 물론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형진이가 혼자 춘천까지 가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건 아니지만, 형진이는 달리기를 정말 좋아한다. 엄마조차 그걸 모르다가 문득 깨닫고 아들의 손을 놓아주는 순간은 곧바로 우리 삶과도 통한다. 내 어머니도 <말아톤>을 보셨다. 그분도 당신과 나의 이야기 같아 감정몰입이 잘되더라고 하셨다.

-배형진씨 가족은 이런 영화를 제작한다는 데 어떻게 반응했는가. 각색을 하다보면 뜻하지 않게 상처를 입을 수도 있을 텐데.

=형진이 어머니는 기꺼이 도움을 주셨다. 자폐증이 장애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했다. 내가 걱정했던 건 다른 아이들과 어머니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형진이는 어머니가 생선을 팔아서 자식 서울대 보냈다더라는 케이스와 비슷하게 특수한 경우다. 이 영화가 그렇게 특별한 아이와 엄마의 이야기로 비치지 않기를 원했다. 형진이 어머니가 그랬다. 살림이 넉넉했으면 아이를 시설에 넣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대안이 없었고, 자폐증이 질병처럼 완치되는 줄 알았기 때문에, 매달린 거였다고.

-코치 정욱은 모정을 내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고, 초원과의 관계도 깊다. 하지만 중반 이후 그의 존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고민했던 부분이다. 러닝타임이 충분했다면 정욱의 이야기도 넣을 수 있었겠지만, 사람들이 좋아할지 자신이 없었고, 데뷔작으로 두 시간 넘는 영화는 부담스러웠다. 어쩌면 이건 다 핑계일 거다. 영화 후반부는 초원이에게만 집중하고 싶었다. 초원은 춘천 마라톤에서 처음으로 날갯짓을 한다. 그애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게 옳은 구조인 것 같았다.

-치타를 보고 시나리오의 감을 잡았다고 했는데, 정작 영화에 등장하는 동물은 얼룩말이다.

=자폐아들은 제각기 집착하는 대상이 있다. 다들 돈이나 명예에 집착하니까, 그 아이들이 그렇게 이상한 것만도 아니다. 그래서 뭔가 하나 정하려고 했는데, 달리는 동물이 좋을 것 같았고, 말은 식상했다. 얼룩말은 길들일 수 없다. 디자인 때문에 눈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보거나 만져본 사람도 많지 않다. 그래서 초원이 사바나에서 얼룩말과 함께 뛰는 장면을 보면, 우리가 잡고 싶어하는 무언가, 말하자면 유니콘 같은 존재로 느껴질 것이다.

-초원은 자주 <동물의 왕국> 내레이션을 중얼거린다. 도입부에서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실화에서 가져온 모티브인가.

=<동물의 왕국>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새끼를 떠나는 치타 어미를 보고나서 조금 달라졌다. 이 영화는 인간의 왕국에서 새끼를 기르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세렝게티를 보듯, 외계나 천상에서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나는 치타가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면 매우 기뻐할 것 같다. 그 자신은 관찰할 수도 없고 목격할 수도 없는 이야기를 보게 해주니까.

-조승우는 표정이 별로 없으면서도 남들과 똑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자폐아를 연기했다. 아주 작은 차이로 감정을 드러내는 연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조승우는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사악하게 보이기도 해서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담백한 크래커 같은 배우다. 무엇이든 얹어 먹을 수 있는. 몰입력이 강하고, 순간적으로 상승하는 힘이 있다. 조승우는 원래 완벽을 추구해서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를 좋아하는데, 어느 순간 그걸 다 놓고, 어린아이처럼 자연스럽고 편하게 연기하기 시작했다. 자폐아들은 어린애 표정이 어른 얼굴에서 나오는 거니까. 자폐아라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자개아’(自開兒)라고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정을 속이고 만들지만, 그 아이들은 표정이 마음 그대로다.

-경숙이 초원을 초코파이로 유혹하면서 산에 오르도록 만드는 장면은 <E.T>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우리 영화는 초코파이 PPL 안 받았다. (웃음) 형진이가 원래 초코파이를 좋아했는데, 우연히 내가 모티브를 얻은 영화 중 하나가 <E.T>였다. 그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E.T와 엘리엇이 손가락을 맞대는 장면이다. 그게 소통이다. 말도 통하지 않던 존재와 마음으로 대화하는 거다. 그것이 인간으로서 가장 기쁜 순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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