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자폐아 마라토너 이야기 <말아톤> [1]
2005-01-31
글 : 오정연
글 : 김현정 (객원기자)
<말아톤>은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는가

“이건 개구리 왕자하고 비슷한 이야기예요.” 정윤철 감독의 세심하고 촘촘한 주석 중에서도 유독 한마디가 반짝, 빛이 났다. 마법에 걸린 소년, 키스해줄 공주를 만나지 못한 왕자, 세상 안에 갇힌 자폐아 초원. 정윤철 감독은 남들과 파장이 달라 “개골거리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가진 초원을 발견했고 동화처럼 아주 잠깐 마법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 잠깐에 도달하기까지 노고는 짧지 않았다. 지팡이 한번 휘둘러 마법을 푸는 대신, 팅커벨이 살아나기를 기원하는 아이들처럼 마음을 모으는 영화. 차근차근 초원을 향해 걸어가는 <말아톤>은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 진심으로 감각을 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온기를 건져올린다. 동물을 좋아하고 눈물도 많은 편이라고 하는 정윤철 감독은 어떻게 초원, 혹은 실화의 주인공인 형진을 만나고 그 형상을 다듬어서 한편의 영화로 만들었을까. 그 까닭이 궁금한 이유는 인간 승리에 감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없는 아이의 영혼에 다가선 예민한 감각을 닮고 싶어서일 것이다.

인간승리보다 달리기로 소통하는 이야기

잘 알려진 것처럼 <말아톤>은 마라톤과 철인3종경기를 완주한 자폐아 배형진씨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영감을 받은 영화다. 그의 어머니 박미경씨는 지능이 다섯살 정도인 아들을 끈기있게 훈련시켰고 달리기뿐만 아니라 웃기도 할 줄 아는 스물세살 청년으로 키웠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던 배형진씨가 열다섯 시간 동안 철인3종경기를 뛰고 나서 집에 가자며 칭얼거리는 모습은 의지와 무구함이 어울려 기묘한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이 아이템을 받아든 정윤철 감독은 장애를 극복한 승리담보다는 달리는 행위 자체가 주는 쾌감에 더 큰 공명을 느꼈다. “어느 정도 달리면 몸과 마음이 분리되고 머리가 맑아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도 하고 안 하기도 하고. 회로를 꺼버리는 듯한 느낌이다. 명상을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자신도 마라톤에 매혹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정윤철 감독은 스포츠드라마라는 컨셉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무작정 운동장을 달리기 시작했을 무렵, 정윤철 감독은 <말아톤>의 제작사인 시네라인-투에서 3년을 보내면서도 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처음 썼던 시나리오는 한 남자가 다른 별에 살고 있던 도플갱어를 만나는 “<존 말코비치 되기>와 비슷한, 리얼한 판타지”였지만, 장편영화에 걸맞은 드라마를 구축하지 못해 1년 만에 접고 말았다. 그리고 회사에서 제시한 아이템이 몇 가지. 그중에서도 마라톤이라는 소재가 성큼 눈에 들어왔다. “시나리오도 안 풀리고, 사는 것도 힘들고, 돈도 없고. 집 앞에 있는 서울고등학교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세 바퀴까지는 힘들었는데, 다섯 바퀴, 열 바퀴 뛰다보니까 내게도 몸이 있고 심장이 있고 피가 돋는 혈관이 있구나 싶었다. 머리로만 살다가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10km 코스까지 완주했다.” 어쩌면 그 또한 웅크린 마음을 풀어주는 치유가 아니었을까. 정윤철 감독은 특수한 처지 때문에 감동받았던 배형진씨의 이야기에서 꼭 영화로 만들어야만 할 보편성을 찾아보았고 “데뷔작으로 어머니와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머니 박미경씨가 쓴 수기 <달려라! 형진아>를 먼저 읽고 뒤늦게 다큐멘터리를 본 정윤철 감독은 그것과는 별개로 직접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스스로 닫았다’(自閉)고 칭하는 아이들. 정윤철 감독은 카메라를 매개로 그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만났고, 꼭 형진이만은 아닌 초원과 꼭 미경씨만은 아닌 경숙의 형체를 빚어내기 시작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큰 어려움을 겪진 않았다. 초원은 영화 속에서 거의 웃지 않지만 이미 소통을 배운 배형진씨는 곧잘 웃고 미용실 누나에게 정을 붙일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형진이하고 산에 갔다가 약수터에 들렀는데, 그애가 물을 떠주면서 ‘여름에는 더우니까 땀이 많이 나지’라고 했다. 조금 놀라서 나도, 그래 땀이 많이 나지, 하고 웃었다. 그건 자폐증이 있는 아이들에겐 힘든 행동이어서 이제는 마음이 통하는구나 했다. 꾸준하게 관찰했던 게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들, 코치, 세 캐릭터가 엉키고 풀리는 관계는 아직, 종이 아래 숨어 있었다.

어미와 새끼의 이야기를 기둥으로

처음에 <말아톤>은 코치가 전면에 나서서 초원과 변화를 주고받는 <어바웃 어 보이>풍의 이야기였다. 정윤철 감독은 좀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 스토리라인을 좇으면서도 기둥 뒤편 어머니와 아들에게 자꾸 마음이 끌렸다. 누구라도 마음을 쏟을 수밖에 없는, 온 세상을 가득 메운 그 관계에. 실화를 소재로 삼은 영화는 얼마나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믿은 정윤철 감독은 차츰 경숙과 초원에게 이끌렸고, 보편적이어서 평범할 수밖에 없는 시나리오에 고민하다가, 우연히 세렝게티 초원을 찍은 동물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는 두살 먹은 새끼를 두고 떠나는 어미 치타를 보면서 울었다. “내가 왜 울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치타는 두살만 돼도 어미처럼 덩치가 크지만 사냥할 줄은 모른다. 어느 날 새끼가 처음으로 영양을 사냥해서 고기를 뜯고 있으니까 멀찌감치 있던 어미가 돌아서서 떠났다. 얼마나 쿨한 애정인가. 사람은 자식에게 많은 걸 요구하고, 자식도 부모에게 기대려고 한다. 이러면서 우리는 자연과 멀어지는구나 싶었다.” 엉뚱하게도 <동물의 왕국>에서 물길을 튼 <말아톤>은 경숙이 초원의 손을 놓는 순간 클라이맥스에 이르는 지금의 모양새가 되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어미와 새끼는, 충돌하고 화해한다. 경숙은 나만은 아들을 알고 있다는 굳은 믿음이 흔들리면서 포기에 유혹당하지만 새끼를 혀로 핥아 홀로 일으켜 세우는 얼룩말 어미의 심정을 깨우친다. 그 관계는 마주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초원이가 조금 연약한 새끼일 뿐 <말아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말하는 정윤철 감독은 어땠을까. “아버지는 내가 영화하는 걸 끝까지 반대했고 화해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어쩌면 영화는 감독이 꾸는 꿈인 듯하다. 내 욕망과 애증을 반영하는.” 정윤철 감독은 대학입시제도가 선시험 후지원인 줄 알고선(사실은 선지원 후시험이었다) 아들이 시험 끝나기만 기다렸던 아버지의 착각 덕분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원래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87년 즈음이던 10대 시절, 더 강력하게는 재단비리로 악명을 떨친 모교 상문고가 그를 영화로 떠밀었다. “하루빨리 이 암울한 상황을 영화로 만들어서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친구들도 이 상문 수용소의 상황을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했고. 그런데 내가 데뷔하기 전에 벌써 누가 영화를 만들었더라.” (웃음) 매체를 모색하던 그는 <계엄령> <실종> <Z> 등 코스타 가브라스 영화들을 모아 상영하는 행사에 갔다가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쳐 과학도의 소망을 버렸다.

“형진이 다리는 백만불짜리 다리”

영화에 영감 부여한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달려라 내아들>

2002년 8월 말 KBS2TV에서 4회에 걸쳐 방영된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달려라 내아들>은 배형진씨가 춘천마라톤에 출전하여 2시간57분의 기록을 세운 이듬해, 철인3종경기를 준비하는 모습을 다룬다. 영화 <말아톤>이 끝난 몇달 뒤의 상황인 셈이다. 아주 사소한 문제도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자폐 겸 정신장애인 배형진씨의 일상, 그런 형준씨를 돌보느라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어머니와 가족들의 모습 등 많은 부분이 그대로 영화화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갈등을 부각해야 했던 영화와 달리 형진씨와 그 가족들의 모습은 언뜻 지극히 안정적이다. “고통을 함께하는 것은 가족이라면 당연한 일”이라며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동생, 간간이 눈물을 비추긴 하지만 이것이 아들을 위한 최선의 길임을 굳게 믿는 어머니, 연습 중간에 먹는 음료수까지 세심하게 체크하는 코치 등은 <말아톤>의 해피엔딩 이후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몇십년 동안 장애를 일상으로 받아들인 이들의 하루하루는, 기승전결을 가진 영화의 내러티브 못지않게 극적이다.

아들이 일반인들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어머니는 아들의 지능검사 결과가 정상에 한참 못 미침을 알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TV 위에 올라앉기 일쑤고,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만”했던 형진씨의 상태가, 운동을 하면서 역력하게 나아진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시합을 앞두고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 형진씨는 어린 시절 이웃사촌을 찾아 서울에서 용인까지 혼자서 길을 떠나는 모험을 감행하고, 보란 듯이 성공한다. 애초에 숙제였던 트랙 50바퀴를 완주하기 전에는 아무리 코치가 만류해도 끝까지 달리고야 마는 고집, 한여름의 강행군임에도 운동을 하는 동안은 그저 좋아서 “매미는 맴맴”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은 엄살과 변명을 모르는 초원과 형진씨가 동시에 가진 장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처음엔 도전하는 데 의의가 있었고, 다음은 완주가 목표였는데, 이제는 기록에도 욕심을 내게 됐다”는 형진씨는 결국, 주위 사람들의 진심어린 응원의 힘으로 수영 3.9km, 사이클 180km,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해낸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초원이 보여준 가장 아름다운 웃음은, 경기를 마친 형진씨의 행복한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편집 권은주·디자인 문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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